The Feeling <Together We Were Made>

| 2011. 8. 27. 09:20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대개 보수적이다.
꽤 위험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지만 범위를 한정시키면 그렇게 위험한 말은 아니다.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대개 '뮤지션의 음악적 변화에 대해' 보수적이다.

어떤 뮤지션이 이리저리 다소 호평을 받은 데뷔 앨범을 내고 나면, 대부분의 팬들은 그들의 2집에서도 전작과 비슷한 사운드를 들려주길 원한다.
아주 훌륭하게 분위기의 전환을 이루어 낸 극소수의 경우 ㅡ 자미로콰이가 4집 'Synkronized'에서 5집 'A Funk Odyssey'로 변신한 그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면 팬들은 기대 이상의 변화를 불편하게 느낀다.
이유는 정확하지 않다.
자신이 좋아했던 소리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새로운 사운드에 귀를 맞춰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인지, 변화에 대한 배신감 때문인지, 생각할 수 있는 사소한 이유가 너무 많다.

더 필링의 3집, 'Together We Were Made'는 그런 보수주의에 피해를 입은 대표적인 예로 기록될 앨범이다.
분명히 3집에서 이들이 구사하는 음악은 종전의 두 앨범에서 보여준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하지만 조목조목 따져본다면 이 3집이 지금과 같이 형편없는 대우를 받기엔 썩 훌륭한 앨범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상업적으로 정말 처참하게 무너진 3집은 사실 1집이나 2집과 별로 다르지 않은 퀄리티를 지니고 있다.
극단을 달리는 평은 단순히 변화에 저항하는 음악적 보수주의가 발현된 것뿐이다.
어떻게 보면 이번 앨범 'Together We Were Made'가, 내가 직접 음반을 보유하고 있는 1집보다 의미있는 앨범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영국 남자들처럼 생겼다.


단순히 음악적 진보주의를 신념으로 삼고 있는 나의 생각만이 아니다.
더 필링의 'Together We Were Made'가 데뷔 앨범보다 의미가 있는 이유는 드디어 세 번째 앨범에서부터야 이들 고유의 사운드를 찾으려는 노력의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까놓고 말해서, 1집과 2집은 '영국 사람들이 하는 평범한 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트랙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굴지의 싱글 'The sewn' 같은 트랙에선 확실히 이들만의 색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나머지는 그저 트렌드에 부합하는 무난한 곡들에 불과했다.

전반적으로 새 앨범에서 더 필링은 전세계적으로 불어닥치고 있는 전자적인 사운드와의 하이브리드를 시도했다.
세계적인 트렌드와의 영합을 꾀했다는 것은 고유의 사운드를 찾으려는 시도와 전혀 반대의 방법론을 말하는 것이지만 이들의 경우는 달랐다.
더 필링은 기존에 시도하지 않았던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통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음악적 역량이 대체 어느 정도나 넓고 어느 정도의 음악을 포용할 수 있으며 앞으로 자신들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얼마나 다양한지 보여주었다.
1995년에 밴드를 결성한 이후 ,단 한 번의 멤버 교체 없이 꾸준히 음악을 하면 정말 무시무시한 내공이 쌓이는 것이다!

3집 'Together We Were Made'는 전 두 앨범이 가지고 있던 평범함의 찌꺼기 'Set my world on fire'로 시작한다.
분위기는 바로 다음 트랙 'Dance for the lights'로 반전된다.
장난스러운 전자음으로 시작하는 이 트랙은 빛과 춤을 노래하며 더 필링식 하이브리드를 대변하는 트랙이다.
댄 길레스피 셀스의 보컬을 보코더로 대체하면 카니예 웨스트가 '808s & Heartbreak'에서 보여줬음직한 노래로 탈바꿈하는 'Another soldier' 역시 마찬가지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현악 세션과 합창이 어우러지는 멜로디를 듣고 있으면, 과연 그 누가 더 필링이 이런 음악까지 커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나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뒷통수를 연달아 맞아 아직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청자에게 더 필링은 'Leave me out of it'으로 카운터를 날린다.
베이시스트 리차드 존스의 아내, 소피 엘리스-벡스터와 입을 맞춘 이 트랙은 내가 꼽는 이 앨범의 베스트 트랙이다.
이 정도면 꽤 준수하지 않은가!


5번 트랙 'Build a home'부터는 다시 과거로의 회귀가 시작된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끌어안고 '피쓰!'를 외치면서 행진할 것만 같은 만국평화의 분위기를 잘 살린 'Searched every corner'에서 콜드플레이가 생각난 것이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그 속에는 더 필링만의 고유한 정서가 흐르고 있다는 것 역시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A hundred sinners (come and get it)'은 1집과 2집의 사운드를 원하는 사람들에겐 아주 단비 같은 트랙이다.
친절하게 링크까지 걸어두었으니 가서 들어보라.
3집이 거지 같은 앨범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아마 귀가 번쩍 뜨이면서 '역시 이런 음악이 더 필링이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8번 트랙 'Mr Grin'은 제네시스가 자신들의 마지막 정규 앨범 'Calling All Stations'에서 보여준 복고적인 분위기를 표방하는 트랙이다.
초반에 특수 처리된 코러스 부분은 레드 제플린을 떠올리게끔 하는데 이런 쪽의 음악을 하더라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란한 기타 솔로와 이어지는 코러스, 그리고 페이드 아웃으로 마무리되는 깔끔한 트랙이다.

그 뒤로 나오는 트랙은 대부분 전형적인 더 필링 스타일이다.
9번 트랙 'Say no'와 10번 트랙 'Back where I came from'은 두말할 것 없다.
다소 클래시컬한 느낌이 나는 'Another life', 1집의 'Strange'를 떠올리게 하는 'Love and care'도 마찬가지.
마지막 트랙으로 삽입된 'Undeniable'은 앨범의 제목을 가사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웅장하다는 점에서, 퀸의 베이스 진행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니까 여러모로 'Blue piccadilly'와 닮아있다.

보라색 양말을 신겠다는 센스는 대체 어떻게 생기는 걸까.


다소 긴 글을 줄이면, 우리가 더 필링의 3집에 아쉬워해야 할 필요는 거의 없으며 언젠가 나올 4집에 상당히 큰 기대를 걸어도 좋다는 것이다.
더 필링이 이번 앨범의 실패 아닌 실패를 딛고 빨리 더 훌륭한, 이번에는 정말 그들만의 색으로 완벽하게 무장한 음악을 들고 나오길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