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경험의 중요성

| 2011. 9. 28. 17:55

나는 버트런드 러셀의 'The Problems Of Philosophy'를 읽기 전까지, 내가 신봉하는 철학 사조가 경험주의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영어 단어 'empiricism'은, 한글 '경험주의'의 어근으로 쓰이는 '경험'이 보통 가리키는 뜻은 거의 내포하지 않는다는 것을 러셀의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내가 철학 사조로서의 경험주의가 실제로 무엇을 나타내는지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내가 과거에 경험주의를 신봉하는 줄만 알았던 때의 기반이 되는 신념까지 새로워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내가 그 신념을 철학적인 의미에서 '경험주의적' 자세라고 부를 수 없어져 버린 것뿐이다.
내가 경험주의라고 불렀던 나의 그 태도는 '세상의 어떤 것은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그 본질을 깨우치기 어렵다.'라는 것이다.
저 믿음에서 핵심이 되는 단어는 누가 뭐라 해도 경험이고 그렇기 때문에 철학에 무지했던 나는 경험주의가 저 같은 태도를 가리키는 단어인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경험의 중요성에 대해 다룰 이 글을 쓰기 전에 저 경험주의라는 단어에 대해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필요를 느꼈다.
이 글에서 앞으로 나오는 경험주의란 버클리나 흄이 주장했던 철학 사조로서의 경험주의가 아니다.
이 글의 '경험주의'는 위에서 '세상의 ~ 어렵다.'라는 문장이 나타내는, 일상적이고 소소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자.
그러면 시이작.

대한민국 대표 시트콤 하이킥 시리즈가 이제 세 번째 시리즈를 방영하기 시작했다.
나는 두 번째 작품인 '지붕 뚫고 하이킥'을 전편 감상했을 만큼 좋아했는데 그 중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던 것이 기억난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캐릭터인 체육교사 오현경이 무엇이든 '글로' 보고 그 행위의 전부를 깨달은양 행세하다가 망신을 당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키스 하는 법을 글로 보고는 정보석을 눈 앞에 두고 허공에 혀를 낼름낼름 거리는 모습이었는데 이 장면은 두고 두고 회자되며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준 명장면이었다.
오현경의 우스꽝스러움은 이 글을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상당히 연관성이 크다.

바로 이 장면. http://blog.naver.com/coco0080/10082928411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러셀에 따르면 크게 둘로 나뉜다.
첫째는 직접적인 대면(acquaintance)을 통해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간접적인 기술구(description)을 통해 아는 것이다.
나의 지식이 저 둘 중 어떤 방법으로 더 많이 습득되었나 자문해보면 아무래도 후자의 비중이 더 크다.
무언가 읽기를 좋아하고 쓰는 것을 좋아하며 생각하길 좋아하는 천성적인 영향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직접적인 대면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양적인 면으로나 질적인 면으로나 지식에의 욕구가 매우 강한 사람이다.
모든 예에 대해 일괄 적용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대면에 의한 지식은 질적으로 확실한 편이고 기술구에 의한 지식은 양적으로 이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세상과 우주에 대한 모든 것을 대면의 방법으로만 알려고 한다면 분명히 한계에, 그것도 아주 좁은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기술구의 방법으로 방향을 틀었다.
훨씬 더 다양한 분야에 대해 알고 싶었다.
게다가 이 세상엔 내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훌륭한 기술구도 참 많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얻은 지식의 힘을 간과한 것은 아니다.
비슷한 대상에 대해 직접적인 경험의 기회와 간접적인 방법이 둘 다 주어졌을 때 나는 주저없이 직접 겪어보는 것을 ㅡ 그 경험이 정말 최악의 것이 아닌 이상 ㅡ 선호했다.
무엇이든 한 번 정도 경험하는 것은 개인에게 좋은 밑거름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 경험에 다소 악한 면이 포함되어 있더라도, 그 악함이 개인적인 면으로 국한되고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면 엄청나게 큰 파장을 불러올 리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나의 앎에 있어 나름의 규칙을 정하고 충실하게 그 과정을 수행해왔다.
이제는 어떤 대상에 대해 알고 싶을 때, 어느 방법이 더 효율적일지 그리고 한 방법을 골랐을 경우 어떤 부분에 집중해야 더 효과적일지에 대해 노하우가 생긴 것 같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방법 선택의 여지가 없다.
예를 들어, 우주 공간에서 우주복을 입고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 알고 싶다고 하자.
당연히 무중력 공간의 느낌을 알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제로 무중력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건강한 억만장자가 되지 않는 이상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 남는 방법은 하나인데, 그 방법이란 가능한 한 많은 간접적 경험을 얻는 것이다.
무중력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 역학 공부를 할 수도 있겠고, 무중력 상태를 경험한 사람들에 대한 글이나 인터뷰를 읽어볼 수도 있겠으며, 무중력 상태와 얼추 비슷한 느낌을 주는 번지 점프나 스카이 다이빙을 시도할 수도 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무중력 상태의 본질은 느낄 수 없겠지만, 본질에 상당히 근접하는 것까지는 가능하리라.

아아, 그의 눈만 바라본다면 무중력도 그렇게 먼 꿈만은 아닌 것 같다. http://wkwmdrnfu.blog.me/70071606327


하지만 반대로 이 세상엔 직접적인 경험을 해보지 않고서는 그 본질을 코딱지만큼도 알 수 없는 개념도 있다.
본질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다는 말이다.
대개 그런 종류의 것은 육체적인 활동으로 얻는 정신적 쾌감이나 거대한 자연 앞에서 느껴지는 감동 같이 사람의 감정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사랑[각주:1]은 인간이 느끼는 감정 중에 가장 보편적이면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로, 그 본질을 알기 위해 직접적인 경험이 필요한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사랑에 있어 직접적인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게 된 것은 나 자신의 변화를 스스로 인지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어린 날의 사랑 ㅡ 그 때의 우리가 그 감정을 사랑이라고 표현했을 뿐이지, 사랑이라기보다는 남다른 관심이나 치기어린 호기심에 가까웠던 그 감정 ㅡ 이 사람 대 사람으로의 사랑 전부라고 착각한 나는 꽤 오래 정신적인 방황기를 가진 적이 있다.
진부한 것이라면 언제나 질색인 나는 사랑에 대해 남들과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다소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나의 그 조금의 다름은 타인에게, 내 사랑의 상대방이든 나와 함께 사랑 이야기를 나누던 지인들이든, 적잖은 놀라움을 선사했다.
내가 보편적인 입장과 다른 태도를 가질 수 있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엔 내 성격이 원래 모나고 제 멋대리로인 것도 한 몫 하겠지만 단지 내가 진짜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 주된 원인이었다.

사랑을 몰랐기 때문에 그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있었고, 사랑을 몰랐기 때문에 그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는 법을 몰랐다 ㅡ 자책과 반성이 이 글의 주제는 아니니 사적인 이야기는 접어둔다.
그러나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비록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한참 멀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그 본질을 깨닫기 시작했다.
피상적으로만 바라보던 사랑을 더 이상 나와 떼어두려하지 않고 몸소 그것과 뒹굴면서 내게 직접적으로 와닿는 그런 경험을 한 것이다.
깨달음의 과정 속에서 내가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였는지, 얼마나 허세와 가식으로 차있었는지 알게 되었고 그런 점을 어떤 식으로 고쳐 나갈지 방향을 세웠으며 그 때 취해야 할 방법론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확실히 과거보다 사랑에 있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부정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최소한 나와 내 주변의 몇몇 사람은 인정하는 바다.
흥미로운 것은 그 모두가 변화의 원인으로 '직접적인 경험'을 꼽았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자기 암시로 거짓 경험을 만들어내지는 말자.

 
직접적인 사랑 경험이 나를 바꿔놓았다는 이야기로는 직접적인 사랑 경험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를 설명하기에 굉장히 부족하므로 앞선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자.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감정은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절대 모른다는 이야기는 5살 꼬마도 알 만큼 진부한 것이므로 패스.
우리가 정말 알 필요가 있는 것은 그런 황홀함과 경이로움의 형이상학보다 좀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다.
우리에게 직접적인 사랑 경험이 필요한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부된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상황들에 대처를 하기 위해서 반드시 많은 직접적 경험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교적 좋은 사랑 관계를 더 좋게 만들거나 최소한 그 관계를 현상 유지하거나 또는 나쁜 상황을 나아지게끔 하는 방법엔 정답이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지극히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서 당사자들의 특수성이 무한하게 개입하기 때문이다.
연인들, 또는 예비 연인들, 또는 짝사랑 관계의 두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이슈는 어떤 특정한 상황 자체가 만들어 내는 것이라기보다는 두 사람의 특성이 빚어내는 것이다.
같은 상황이라도 그 상황의 구성원이 누구냐에 따라 그 결과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게 그 근거.
그렇다면 이슈는 우리가 얼마나 자신을 알고 있으며 상대방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느냐[각주:2]에 대한 것으로 옮겨간다.

사랑에 있어서의 사람은 혈액형으로도, 별자리로도, 관상으로도, 타로 카드로도, 손금으로도 알 수 없다.
직감적인 것을 제외하면 사랑 스타일을 읽어내는 능력은 철저히 경험에 기반하게 된다.
양적으로 많은 사랑은 자신에 대해 알게 되는 계기가 되고, 질적으로 깊은 사랑은 특정 상대방에 대해 많은 정보를 준다.
일반적인 우리 사회의 통념은 후자의 경우 어느 정도 지지하는 편이지만 전자에 대해서는 굉장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 통념이 문제의 근원이다.
쌍방 간에 이루어지는 사랑이라는 관계가,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다.
유교적인 전통에서 유래한 이런 통념이 대한민국의 높은 이혼율과 기형적으로 발달한 유흥 문화의 토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언급만 해두기로 한다.
각설하고, 나를 알고 상대방을 알아야 하는 사랑에서 우선 알아야 할 것은 당연히 상대방이 아닌 '나'다.
그 '나'를 알기 위해 필요한 것이 직접적인 경험, 되도록이면 다양하고 많은 경험이다.
상대방을 보는 능력은 나를 안 후에야 필요한 능력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중요도가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역시 다양하고 많은 경험을 통해 이성을 만나 ㅡ 사랑의 대상이 동성이라면 내겐 그런 주제를 다룰 능력이 없으므로 이 페이지를 떠나면 되겠다 ㅡ 그 사람이 사랑의 상대로서 어떨지 파악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

이렇게 직접적인 경험을 중요시하는 생각은 가끔씩 들어오는 이른바 '연애 상담[각주:3]'에 대한 나의 반응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나는 거의 항상 누군가와 잘 되어가는 상황이라면 사귀는 쪽에, 누군가와 마찰이 생긴다고 하면 헤어지는 쪽에 무게를 실어 이야기한다.
어차피 그렇게 되고야 말 것이라는 선지자적 태도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 편이 좀 더 많은 경험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 의견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의 경우를 고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 입장과 반대되는 것에도 경험할 것은 있고, 가끔은 내 선택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부분 사랑에 대한 고민은 '옳은 것'과 '좋은 것'의 선택에 관한 것인데 항상 옳은 것만 좇다 보면 좋은 것은 죄다 놓치고 서로의 마음 속에 지독한 기억만을 남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사랑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의 중요성만을 강조하긴 했지만 간접적인 경험 또한 사랑에 있어 중요한 요소다.
처음에 경험주의를 언급했던 부분으로 돌아가 보면, 나는 언제나 직접적인 경험만을 중시했던 것이 아니다.
비슷한 대상에 있어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의 기회가 둘 다 주어진다면 그 때 직접적인 경험을 선택했다는 것이지, 처음부터 직접적인 경험의 기회가 없더라면 최소한 간접적인 경험이라도 얻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사랑에 대해 간접적인 경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면 사랑에 관한 글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다른 사람의 사랑을 살피는 것 정도가 있다.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그런 주변의 것이라도 관심을 가져 보자.
다 당신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나중에 언젠가 써먹을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다.

승부 조작도 언젠가는 기회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사랑 경험이 많은 사람을 보는 시각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그 경험들은 실패가 아니라 더 완벽한 성공을 위한 발판이다.
그러니까 나는 더 많은 경험이 하고 싶다고!

미래를 보고 좀 더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에 '성공'하고 싶다면, 최소한 사랑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탐구하고 싶다면, 단순히 말해 그냥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면, 두려워말고 먼저 사랑하라.
그러면 이루리라.
  1. 사랑이라는 두 음절의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워낙 그 범위가 방대하여 모든 개별적 의미의 사랑에 대해 일반적인 서술을 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여기서의 사랑은 사람 대 사람, 일대일 관계의 사랑으로 한정 짓자. 사실, 이 글을 쓰는 나는 그것 외의 사랑에 대한 직접적 경험이 없는 사람이다. 또한 이것은 글의 초입에 언급할까 말까 상당히 고민했던 것인데 여기서의 사랑은 전(前)사랑 ㅡ 여기서의 전(前)은 전희(前戱)의 전과 비슷한 의미 ㅡ 의 개념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즉, 우리가 보통 연애라고 부르는 말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사랑과 연애의 경험'이라는 제목을 붙이면 조금 난잡해보이고, '연애 경험'이라고만 한다면 너무 싸보이는 느낌에 사랑이라는 본질이 빠져있는 것 같아 제목에 '사랑 경험'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러니 앞으로 나오는 '사랑'의 용법에 주의해가며 읽어보자. [본문으로]
  2. 사람을 안다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는 생략하고 사랑에 있어서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만 하기로 하자. [본문으로]
  3. 한 번도 '결혼 상담' 또는 '이혼 상담'을 받아본 적은 없으니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사랑이라는 단어 대신 연애를 사용했다. [본문으로]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  (2) 2011.11.07
번역의 한계  (0) 2011.11.04
Red Faction : Armageddon  (0) 2011.10.15
어느 날 밤  (0) 2011.10.09
가을의 문턱에 선 나의 근황  (2) 2011.10.08
한강 난지 캠핑장 2차 원정기  (0) 2011.09.06
September와 다이어리와 나의 비극  (0) 2011.09.03
발레의 대중화  (0) 2011.08.31
어두운 소식  (0) 2011.08.27
퀸시 윌리엄스전(傳)  (0) 2011.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