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포도 1

| 2015. 1. 7. 13:37

이야기의 흐름이 다분히 좌파적인 것으로 보아 오래 전에 오웰이나 러셀의 책을 읽다가 언젠간 읽어야 할 책 목록에 이름을 적어둔 것으로 추정되는 책이다. 존 스타인벡이 왜 현대 영미문학의 거장으로 평가받는지 대번에 알아챌 수 있는 소설로 노벨 문학상, 퓰리처 상, 그 외에 책 뒤에 적혀 있는 여러 "100대" 또는 "추천" 목록 등이 아깝지 않은 작품이다. 고작 전반부만 읽었지만 그래도 확신을 담아 이야기할 수 있다. 혹자들이 싫어할 만한 정치적 이야기를 모두 제외해도 마찬가지다. 자연의 풍광을 바라보는 세심한 눈썰미와 그 당시 사람들의 외모와 행태를 정확하게 담아낸 ㅡ 나는 《분노의 포도》를 읽고 드디어 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의 영화에서 등장한 괴상한 사람들에 감독의 특별한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당시의 일반적인 민중을 보여준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ㅡ 서술력은 역대급이다.

이야기의 전반부를 다루는 1권에서는 산업화 이전의 사람들, 어떻게 보면 여전히 봉건적인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미국 동부의 가난한 지역 공동체의 이야기와 그럼에도 그럭저럭 살아낼 수 있었던 그 사람들이 어떻게 조작된 서부 성공 신화에 물들어 자본의 속박으로 빠져들어가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주요 테마다. 전자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땅이라면 후자의 이야기에선 66번 도로로 대변되는 길이 제재가 된다. 땅이 터전을 내리는 안정적이고 반영구적인 공간이라고 한다면 길은 어디론가 움직여야 하는 불안하고 일시적인 공간이다. 스타인벡은 이 두 공간의 극심한 대비 속에서 벌어지는 내적, 외적 갈등을 거의 사료적인 수준으로 묘사해낸다. 문장이 그만큼 사실적으로 다가온다는 말이다.

"참, 웃기는 일이구먼. 사람이 땅뙈기라도 조금 갖고 있으면, 그 땅이 바로 그 사람이고, 그 사람의 일부고, 그 사람을 닮아가는 법인데. 사람이 자기 땅을 걸으면서 땅을 관리하고, 흉작이 들면 슬퍼하고, 비가 내리면 기뻐하고, 그러면 그 땅이 바로 그 사람이 되는데. 그 땅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사람이 더 커지는 법인데. 농사가 잘 안 되더라도 땅이 있어서 사람이 크게 느껴지는 법인데. 원래 그런 건데."

파리들이 방충망에 부딪쳤다가 윙윙거리며 멀어져 갔다. 압축기에서 한동안 칙칙 소리가 나다가 멈췄다. 66번 도로에서는 차들이 휙휙 지나갔다. 트럭들, 멋지고 날씬한 승용차들, 낡아서 털털거리는 자동차들. 모든 자동차드리 심술궂게 휙휙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메이는 접시에서 파이 껍질을 긁어내 양동이에 버렸다. 그리고 행주를 찾아 둥글게 원을 그리며 카운터를 닦았다. 그녀의 눈은 고속도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삶이 휙휙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곳을.

통찰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족을 몇 개만 더 달아본다. 2006년에 개봉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영화 《카》의 주요 배경이 바로 이 소설에서 나오는 66번 도로다. 수만, 수십만 사람들의 꿈을 기만했던 역사에, 어찌보면 한 축을 담당했던 공간을 기반으로 한 애니메이션이라, 우리나라에 과연 비슷한 공간이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강원도 산골의 폐광촌 정도가 생각이 난다. 폐광촌을 배경으로 한 영화로는 최민식 주연의 《꽃피는 봄이 오면》이 생각나는데 관련성은 그다지 없어 보인다. 다만 이런 생각은 하나 해봤는데, 최근 우리나라 문화계에 불어닥친 《국제시장》 파동처럼 정치적 스탠스와 관련된 과거 미화의 해외 사례는 없을까 찾아 봄직하겠다.

언젠가 레딧에서 주워온 짤방.

신은 위대하지 않다》를 깔끔하게 번역한 김승욱의 번역은 조금 아쉬웠다. 아니 그보다 이른바 민초들이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소설에서 만족스러운 번역을 접해본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이는 애초에 번역이란 무엇인지, 번역의 역할과 그 역할의 끝은 어디까지로 한정을 지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리타분한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이야기로 흘러가게 되므로 더 긴 이야기는 하지 않겠지만(왜냐하면 잘 모르니까), 거의 문어체에 가까운 구어를 구사하는 상황을 실제 있었을 법한 상황에 대입하면 아무래도 아귀가 잘 맞지 않는 기분이다. 저명한 지식인이 순전히 쿨해보이기 위해 인터넷 유행어나 비속어 등을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오글거림이랄까.

당연히 영화화가 되었으리라 생각하고 위키피디어를 검색했다. 존 포드 감독에 헨리 폰다가 톰 조드 역으로 나온다고 한다. 어떻게든 구해서 감상해야겠다.

'ART'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Manchurian Candidate  (0) 2015.01.24
우타히메, 그녀들의 스모크 온 더 워터  (0) 2015.01.22
과학적 관리의 원칙  (0) 2015.01.12
분노의 포도 2  (0) 2015.01.09
허양비디오밴드 - 연희동  (0) 2015.01.07
Shattered  (0) 2014.12.29
경주  (2) 2014.12.28
노는 계집 창  (0) 2014.12.08
Claire's Knee  (0) 2014.11.16
American Beauty  (0) 2014.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