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oblems Of Philosophy : Chapter 11 ~ Chapter 15/krablog.com

The Problems Of Philosophy : Chapter 11 ~ Chapter 15

| 2011. 9. 24. 08:35

<직관적인 지식에 관하여(On intuitive knowledge)>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믿음에 대해, 근거에 대한 근거, 이유에 대한 이유를 요구했던 사람이다.
소크라테스의 원리를 적용시키자면 일상적인 믿음부터 시작해서 그 믿음을 뒷받침하는 더 근본적인 원리와 원칙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데 언젠가는 더 이상의 근거와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대개 그런 궁극적인 결론은 우리에게 자명(self-evident)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그 궁극적인 결론으로부터 도출된 일반적인 원리를 개별적인 예를 통해서 파악하게 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일반적인 원리보다는 개별적인 예가 우리에게 더 자명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자명한 진실에는 일반적인 원리 이외에 느낌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오는 것도 ㅡ 이에 대한 진실을 '인식적 진실(truths of perception)'로, 그에 대한 판단을 '인식적 판단(judgments of perception)'이라고 하자 ㅡ 있다.
인식적 판단은 느낌소의 존재에 대한 것과 그 성질에 대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예를 들어, '저기에 빨간 딱지가 있다'와 '저 빨간 딱지는 동그랗다'는 서로 다른 성격의 것이다.

'저기에 가슴이 있다'와 '저 가슴은 동그랗다'의 차이.


논리적으로 따져본다면 우리는 과거라는 개념을 알 수 없으나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기억(memory)'은 인식적 판단의 한 종류가 될 수 있다.
러셀은 기억이라는 개념은 확실성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직관적 지식으로서 다루기가 까다롭다고 하면서 최대한 논의의 범위를 한정해보고자 한다.
우선 그는 기억이 경험의 생생함과 경과 시간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집어낸다.
생생함이 떨어지고 경과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억의 확실성은 점점 떨어지게 된다.
둘째로 자기 암시와 같은 방법을 통한 애초부터 잘못된 기억은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억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힌다.
기억을 통해 알 수 있는 자명성의 중요한 성질은, 자명성엔 정도(degree)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믿음은 단지 자명하냐, 안 자명하냐로 판단되어져서는 안 되고 얼마나 자명하냐, 즉 많이 자명하냐, 적게 자명하냐와 같이 많고 적음의 정도에서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 ㅡ 아주 자명한 몇 가지 믿음을 제외한 나머지 믿음에는 확실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지식과 오류 사이의 관계 ㅡ 는 일단 뒤로 제쳐두고, 러셀은 우선 진실의 성질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순서라고 한다.

<진실과 거짓(Truth and falsehood)>

'우리는 어떻게 어떤 믿음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을까?'는 굉장히 어려운 질문으로 완벽히 만족스러운 대답을 찾을 수 없다고 하는 러셀은 그에 앞서 '진실과 거짓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부터 구해보자고 한다.
러셀은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진실과 거짓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필수적으로 지켜야 할 세 가지 사항을 언급한다.

(1) 진실이 있다면 반드시 거짓도 있다.
(2) 믿음이 없다면 진실도 거짓도 없다.
(3) 모든 믿음은 믿음 외부와의 관계를 통해 성립된다.

세 번째 전제를 가정할 경우 생기는 역설적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철학자들이 믿음 외부의 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정의(definition)를 가진 진실을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하나의 대안은 진실이 일관성으로 구성된다는 것인데 이는 두 가지 반론에 ㅡ 꼭 하나의 일관적인 체계만 존재할 이유는 없고 일관성 자체가 논리 법칙의 참을 전제한다는 두 가지 ㅡ 무너진다.
러셀은 믿음이 그 외부의 여러 개념들 사이의 관계로서 성립된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논의를 계속한다.
판단이나 믿음의 행위란 특정 시간에 판단이나 믿음 관계에 있는 대상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우리의 정신과 정신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 그 어떤 것 사이의 관계일 뿐이다.

진실한 판단을 거짓 판단으로부터 구분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판단의 주체와 객체들을 판단의 구성소로 보고 이들의 언어적인 순서에 따라 그 관계가 정해진다는 정의를 받아들여야 한다.
언어적인 관계는 여러 구성소를 묶어 하나의 복합체를 형성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오델로는 데스데모나가 카시오를 사랑한다고 믿는다.'는 판단에서 주체는 오델로요, 객체는 데스데모나와 카시오와 '사랑한다'요, 믿는다는 행위에 의해 형성되는 복합체는 '카시오에 대한 데스데모나의 사랑'이다.
어떤 믿음의 참과 거짓을 결정하는 것은 그 믿음과 부합하는 복합체가 존재하는지의 여부다.
즉, '카시오에 대한 데스데모나의 사랑'이라는 복합체가 있다면 오델로의 믿음은 참이고 그렇지 않다면 거짓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이 그 존재는 정신적 영역에 두지만 ㅡ 믿음이라는 행위는 우리의 정신에 의한 행위다 ㅡ 그 진위 여부는 정신적 영역 밖에 둔다는 것이다.
믿음을 참으로 만드는 것은 사람의 정신이 아니라 특정한 사실(fac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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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오류, 개연성 있는 의견(Knowledge, error, probable opinion)>

이번 장은 '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우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지식의 정의로 '참인 믿음'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 정의에는 문제가 있다.
우리는 그릇된 전제로부터도 얼마든지 참인 믿음을 끌어낼 수 있고 잘못된 논리 전개 과정을 통해서도 참인 믿음을 끌어 낼 수 있는데 이 두 경우에 우리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두 문제를 수정한 '참인 전제로부터 올바르게 이끌어 낸 믿음'이라는 정의도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 정의에도 여전히 결론적으로 참이 아닌 믿음이 도출될 가능성이 있다.
정의를 '알고 있는 전제로부터 올바르게 이끌어 낸 믿음'이라고 하면 문제가 해결되기는 하지만 순환적인 정의가 되고 만다.
러셀은 여기서 지난 장에서 다룬 개념을 끌어 온다.
그렇게 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정의는 다음과 같다.
'유도적인(derivative) 지식은 직관적으로(intuitively) 알고 있는 전제로부터 올바르게 연역된 것이다.'
이제 해결할 것은 직관적인 지식이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직관적인 지식의 경우, 어떤 것이 참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지 구분하는 분명한 잣대가 없다는 문제가 있다.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독자에게 러셀은 우리의 모든 참에 대한 지식은 어느 정도의 의심에 오염되어 있다는 말로 다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전장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우리는 어떤 믿음에 상응하는 사실이 있을 경우 그 믿음이 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특정한 믿음은 그에 상응하는 특정 사실에 대한 지식을 구성한다.
그러나 지식이라는 것은 꼭 믿음에 의해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사실에 대해 인식(perception)에 의한 지식도 존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일몰 시각을 알고 그 시각에 '해가 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날씨가 좋다면 단지 서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해가 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개념을 사용하면 '직관적인 지식에 관하여'장의 마지막에서 미뤘던 문제에 대해 이제는 답할 수 있다.
직접적으로 알게 된, 인식을 통해 알게 된 복합체에 대한 믿음은 그 복합체에 상응하는 존재가 있을 경우 항상 참이고 항상 확실성이 보장된다.
반면 그렇지 않은 경우에 우리는 어떤 믿음을 특정 정도의 자명성만큼 확신할 수 있다.

러셀은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 장에서 다뤘던 내용을 제목의 단어에 맞춰서 정리한다.
우리가 믿는 것이 참일 때 우리는 그 믿음을 지식이라 부른다.
우리가 믿는 것이 거짓일 때 우리는 그 믿음을 오류라 부른다.
우리가 믿는 것이 참과 거짓 사이에 있을 때 우리는 그들을 개연성 있는 의견이라 부른다.
결국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거의 대부분은 개연성 있는 의견인데 우리는 이에 대해 일관성이라는 기준으로 자명성의 정도를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일관성이라는 수단으로 궁극적인 확실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러셀은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고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철학적 지식의 한계(The limits of philosophical knowledge)>

굉장히 많은 철학자들이 선험적인 형이상학적 논증으로 종교의 근본적 교리나 우주의 필수적 이성, 물질의 허상성 따위 등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러셀은 그런 그들의 노력이 단지 헛된 희망에 불과하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어쩌면 우주, 즉 우리의 세상을 둘러싼 것들에 대한 지식은 형이상학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런 증명들은 철저하게 검토할 경우 한계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러셀은 이 장에서 형이상학적 논증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의 머리는 항상 나쁜 형이상학적 해석을 내놓는다.


헤겔은 형이상학적 논증을 대표하는 근대 철학자다.
그는 변증법을 제시하며, 변증법은 정반합의 진행이 더 이상 불가능한 경지의 '절대적 이데아'로 귀결되며 그 절대적 이데아는 '절대적 진리'를 묘사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궁극적 진리로만 구성된 세계는 영원불변하고 완벽한 것들의 조합으로, 헤겔에 따르면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그것의 부분적인 관점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세계는 자기 모순적인 면을 지닌다.
이를 두고 형이상학자들은 실제 세계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는데, 근대 철학의 주류는 그 같은 모순이 오히려 허상이라는 주장을 폈다.
시간과 공간의 예를 보자.
시간과 공간은 둘 다 무한하게 늘릴 수 있고 무한하게 쪼갤 수도 있는 존재다.
이는 이 세상에 무한한 존재는 없다는 철학자들의 일반적인 주장과 모순이 된다.
이런 식의 모순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한 칸트는 공간과 시간의 불가능성을 연역하여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으나 칸토어 같은 수학자들이 무한한 집합의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의 오류를 지적해 내는데에 성공, 결국 그런 모순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형이상학자들의 커다란 기반이었던 공간과 시간의 불가능성이 허상이었던 것이 밝혀진 것이다.

수학자들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우리가 기존에 알던 유클리드 공간이 아닌 다른 새로운 공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는 수학의 범위를 넘어 우리가 가지고 있던 모든 지식에 대해, 우리가 '그렇다'라고 생각했던 지식의 힘을 약하게 하고 '그럴지도 모른다'와 관련된 지식의 힘을 강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논리(logic)가, 우리의 경험과는 전혀 다른 것에 대한 생각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러셀은 과학적 지식의 위와 같은 면은 철학적 지식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철학적 지식이 갖는 고유한 특성이자 과학적 지식으로부터 자신을 구분짓는 것은 '비판(criticism)'이다.
이 때의 비판은 무조건적인 비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와 비슷한 개념으로 의심스럽게 보이는 것을 의심하는 것 ㅡ 반대로 말하면 의심스럽게 보이지 않는 것까지 의심하지는 말자는 ㅡ 을 뜻한다.
하지만 언제나, 철학적 지식이 약간의 오류와 약간의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러셀이 지적하는 철학적 지식의 한계다.[각주:1]

<철학의 가치(The value of philosophy)[각주:2]>

마지막 장에서 러셀은 철학의 가치가 무엇이며 왜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가라는 '철학의 문제들'과는 다소 벗어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해 보이는 주제를 다룬다.
우리가 보통 과학이라고 부르는 학문은 그 학문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저런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그토록 좇는 이유는 그 학문이 인류 전체에게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반면 철학의 경우엔 그 학문을 공부하는 사람들 정도만 영향을 받는 편이고, 설령 그 외의 사람에게 영향이 있더라도 그것은 간접적인 성격의 것이리라.
따라서 우리가 철학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선 바로 이 간접적인 영향부터 살펴 봐야 할 것이다.

러셀은 그런 행위의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철학 공부가 시간 낭비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도발적인 말을 던지면서 우선 마음의 양식으로서의 철학의 가치를 논한다.
철학은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지식을 좇는 학문이다.
철학이 수학, 지질학, 역사학과 같은 다른 학문과 비교되는 점은, 그 학문이 좇는 지식에 대해 정답(定答)을 내놓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정답이 나오는 철학은 더 이상 철학이 아니다.
지금의 천문학, 물리학, 심리학 등은 원래 철학의 범주에 속하는 학문이었으나 다들 각자의 정답을 찾아 독자적인 영역으로 발달한 예들이다.
우리가 풀지 못한 숙제 ㅡ 우주는 창조되었는가, 우주의 생명체는 지구에만 있는가, 선과 악은 인간에게만 존재하는가 등 ㅡ 들은 여전히 철학의 몫으로 남겨져 있으며 해결의 희망이 아무리 희박하더라도 그들의 중요성을 생각해 볼 때 모든 방법을 동원해 탐구해야 할 것들이다.
러셀은 따라서, 철학이란 그 답보다 질문이 더 중요한, 정답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사실로 평가저하될 학문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한다.

사실 불확정성은 철학이 지니는 큰 가치 중 하나다.
철학의 'ㅊ'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 세상은 정(定)하고 한(限)하며 명(明)하다.
그러나 첫 장에서 봤던 것처럼, 우리의 주변에 대해 철학적인 사고를 시작하면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던 것들이 모두 불확정적이 되고 그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 된다.
우리는 그런 사고를 통해 우리의 사고력을 기르고 편견과 선입견으로부터 우리의 정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

또 다른 철학의 가치는 ㅡ 러셀은 이를 철학의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본다 ㅡ 철학이 우리의 관심사와 지식을 과열되고 폐쇄적인, 개인적이고 본능적인 영역 너머로 보낸다는 것이다.
철학적 사고가 지향하는 우주는 일상의 삶처럼 졸렬한 사고가 통용되는 곳이 아니다.
정신과 우주의 무한함 속에서 비자아(not-Self)로부터 시작한 사고를 통해 자아의 영역을 넓히는 것, 그것이 철학이다.
러셀은 이런 관점에서 인간이 모든 진실의 척도라는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철학을 경계한다.
그런 철학이 주장하는 바는 앞에서의 논의로 봤을 때 틀린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간 중심적인 철학은 우리의 지식을 자아와 비자아의 결합으로 보지 않고 편견과 관습, 욕망으로 가득찬 자아에만의 지식으로 국한시키는 영향이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철학은 비자아에 뿌리를 둔다.
자유로운 이성으로 마치 신과 같은 관점에서 모든 왜곡과 관습을 거스르고 우주를 바라보는 것이다.

철학으로 단련한 그런 시각적인 변화는 우리의 일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철학적 사고의 불편부당함은 우리의 행동에 있어서 정의로, 감정에 있어서는 범우주적 사랑으로 나타난다.
철학적 사고는 우리 자신을 우주의 일원으로 보게끔 만든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인류의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1. 전반적으로 이 장의 내용은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모르겠지만, 내 느낌에는 다른 장보다 논의의 난이도가 한 차원 높은 것 같다. 이 장의 논의를 이해하기 힘든 다른 이유는 사실상 앞에서 언급된 내용들이 철학적 지식의 한계와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적 지식의 한계는 결국 사람이라는 존재가 현실이라는 공간에서 사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결론이라면 과연 앞의 내용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본문으로]
  2. 이 제목을 읽으면서 '아, 드디어 마지막이다.'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는데 왠지 이런 생각은 남겨둬야 할 것 같아서 주석을 달아 둔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