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블로그에 딱 한 번 요리 관련 포스트가 올라온 적이 있었다.
지금 봐도 별로 재미가 없는 글의 제목은 '김치찌개와 스티비 원더'.
이미 흥하지 못한 것이 떡하니 증명되었음에도, 염치 불구하고 같은 패턴의 포스트를 올리는 것은 내 맘 99%에 1%의 작은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뭐, 조금의 진보가 있었다면 이번엔 김치찌개라는 초대중적이고 초식상한 소재가 아닌, 참치 스크램블(드) 에그라는 나름 신선하고 독창적인 요리를 해냈다는 것이다.
물론 난이도 면에서 형편없이 떨어졌기 때문에 제로섬의 게임이라는 쓸쓸한 말을 덧붙일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참치 스크램블(드) 에그는 아마 이틀인가 3일 전에 해먹은 음식으로, 기원을 찾자면 2009년 나의 자취 생활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집에서 공수되는 양질의 국과 반찬으로 먹을 걱정은 별로 없던 나였지만, 사람이라는 것이 가끔은 무모한 시도도 하고 싶어지는 그런 때가 있지 않나.
혼자 사는 남자 주제에 제대로 요리 한 번 안 해본다면 그것이 어찌 사내 대장부가 되겠냐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어느 날 나의 머리를 강타했고, 나는 곧바로 기발한 아이디어 ㅡ 어째서 요리를 하는 것에 기발한 아이디어가 필요했단 말인가 ㅡ 를 구상했다.
일단 당장 내가 해먹을 수 있는 요리의 종류는 굉장히 한정적이었다.
내가 가진 조리 도구는 라면 두 개까지 끓일 수 있는 작은 냄비, 작은 프라이팬, 뒤집개가 전부였고 밖에 나가지 않고도 구할 수 있는 식재료는 계란 ㅡ 가끔 계란 후라이를 해먹었다 ㅡ 참치 ㅡ 캔 참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에 하나! ㅡ 그리고 조리 김 ㅡ !!!! ㅡ 그리고 식용유 정도가 전부였다. 1
처음부터가 라면과 계란 후라이만을 위한 구성이었으므로 심지어 내게는 소금도 없었고 대신 후추가 있었을 뿐이었다.
요리왕 비룡 같은 분에게는 그야말로 그로테스크한 상황에서 내가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요리는, 어쩌면 처음부터 이것 하나 외에는 없지 않았을까 싶다.
바로 그 요리가 참치 스크램블(드) 에그. 2
무슨 복잡한 설명 같은 것은 필요가 없고 그냥 내가 찍은 사진들을 주욱 나열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이것이 어떤 먹을 거리인지,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내가 고작 이딴 것들을 보려고 여기까지 글을 읽었단 말이야?' 하는 공황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사람은 충분히, 장광설로도 꺾기도를 구현할 수 있다.
준비물은 사발 하나와 캔 참치, 그리고 계란 2개다.
인터넷 검색 결과 상당히 흡사한 요리를 찾을 수 있었는데 어떻게 같은 재료로 저렇게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는지 궁금해서 유심히 살펴보니 계란 크기가 유난히 작은 것 같다.
어쨌든 나름 이 요리의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한 부분은 바로 계란의 양을 조절하는 것인데 참치의 느낌을 더 살리고 싶다면 계란 한 개를, 더 계란의 세계로 풍덩 빠져들고 싶다면 계란 세 개를 써도 좋다.
나는 물론 그렇게 먹어본 적은 없으니까 책임은 각각의 개인에게 맡기는 바.
스텝 투는 매우 간단하다.
계란 두 개를 톡톡 까서 사발에 담는다.
어떻게 해서 위 사진에서 아래 사진으로 넘어갔는지 모르겠는 사람은 빨리 이 블로그에서 나가라.
자, 여기서 두 번째 포인트가 있다.
캔 참치에는 적지 않은 양의 기름이 들어가 있다.
이 음식의 첫 시도에서 나는 캔 속의 기름을 전부 빼고 참치 살과 계란을 잘 섞은 뒤, 내가 가지고 있던 저렴한 식용유를 프라이팬에 둘러 볶아냈는데, 두 번째 요리를 할 때에는 그냥 참치 기름을 써도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캔을 처음 단계에서 뽀각 딴 뒤에 뒤로 젖혀서 뚜껑을 열지 말고 첫 과정에서 생긴 조그마한 틈 사이로 기름을 쫄쫄 따라 버리자.
적당히 버려졌다고 생각했을 때 캔을 완전히 개봉하고 안에 있는 참치를 싹싹 긁어 미리 풀어놓은 계란들과 잘 섞어야 한다.
참치 살은 생각보다 단단한 편이므로 만족스러운 식감을 얻기 위해서는 숟가락을 사용해 살덩이를 좀 더 작은 덩어리로 분해하면 된다.
드디어 실력 발휘를 하는 시간.
여기서 잠시 슬픈 이야기를 하자면, 사실 맨 처음 내가 구상한 요리는 평범한 계란 프라이에 참치 알갱이가 송송송 박힌, 생각만 해도 '와! 맛있겠다!'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의 뒤집기 능력이 형편없는 것인지 아니면 참치 알갱이가 포함된 계란의 점성이 떨어지는 것인지 도저히 이노무 녀석은 제대로 뒤집혀질 생각이 없었고 그냥 그렇게 망해버린 나는 차라리 스크램블(드) 에그를 만들자는 플랜 B를 시도했다.
이 사진을 찍을 때도 최선을 다해서 꼭 내가 처음에 의도했던 그 요리를 만들고자 노력했으나 도저히 잘 안 되더라.
계란이 노릇노릇해질 때까지 잘 볶았다가 접시에 담아 냈다.
여러 가지 양념을 취사 선택하여 뿌려 먹으면 될 테고, 나는 옛날의 그 잔인했던 삶을 떠올리는 취지에서 오직 후추만을 사용했다.
참치에 배어 있던 간이 부드럽게 계란에 스며들기 때문에 센 간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별도의 소금은 필요 없으리라고 본다.
단촐한 식단은 나의 선비 정신을 반영한다.
클로즈-업.
계란과 참치의 고단백을 입 안 가득 느낄 수 있다.
물론 혼자 사는 남자 자취생에게 과도한 단백질은 42번의 자위와 사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말자.
우리는 사람이고, 남자도 인간이다.
요리를 하는 내내 스타세일러의 음악을 들었다.
요새 활동이 거의 없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 영국 밴드는 1집 때는 무작정 아래로 더 아래로 가라 앉는 음악을 했지만 2집 <Silence Is Easy>부터 이 봄날에 잘 어울리는 트랙을 내놓기 시작했다.
내가 요리를 하던 이 날도 상당히 화사한 봄날이었는데 그 때 미니 컴포넌트에서 흘러 나오던 'Restless heart'가 귀에 파득파득 꽂혔다.
그러고 보면 스타세일러의 1집과 2집은 상당히 훌륭한 앨범이다.
내가 꽤나 좋아하는 밴드임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이렇게 묻어놨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가사의 내용은 그다지 분위기와 어울리는 편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쨍쨍 내리쬐는 햇살과 잘 어울리는 분위기라고 자신한다.
원래는 훨씬 짧은 트랙이지만 이 클립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뒤에 30초 정도의 공백이 포함되었다.
물론 이렇게 뜬금 없이 참치 스크램블(드) 에그와 스타세일러를 연관 짓는 것이 어이 없는 일인 건 나도 안다.
짧게 결과를 정리하자면, 역시나 맛있게 먹었다.
- 믿기 어렵겠지만 그 흔한 조리용 칼도, 도마도 없었고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조리 도구는 죄다 없었고 바로 요 앞에 언급한 녀석들밖에 없었더랬다. 참 어떻게 그런 환경에서 거진 6개월을 살 수 있었는지 신기할 따름. [본문으로]
- 왜 자꾸 재미도 없는데 (드)라는 거슬리는 친구를 달고 다니냐고 묻는다면, 우리가 보통 스크램블 에그라고 부르는 요리는 'scrambled egg', 즉 스크램블 되어진 계란이라는 뜻이다. 수동형 분사꼴의 형용사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거의 나지 않는 (드) 발음을 살려야 미국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 친구 영어 제대로 배웠군?'이라는 생각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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