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와 여권(女權) 신장

| 2014. 7. 9. 19:02

The Atlantic의 《How the Bicycle Paved the Way for Women's Rights》를 바탕으로 쓴 글. 나의 썰타임 칼럼 데뷔작으로 최근 들어 생긴 나의 자전거 관심이 동기 부여에 한 몫 했다고 본다. 글을 쓰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과연 걸스데이가 저 픽시들을 실제로 탔는지 여부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나는 내 픽시를 더 신나게 몰 수 있을 것 같고, 만약 그렇지 않다라고 한다면 여전히 걸스데이를 응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전거와 여권(女權) 신장

생각해보면, 4대강 사업의 영향 때문인지 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 자전거 타는 것을 취미로 갖는 사람들의 수가 부쩍 늘어난 것 같다. 느낌으로만 판단하기에는 조금 찝찝해서 관련 통계를 검색해보니 서울시의 경우 2000년부터 2010년 사이 자전거 수단분담율이 4배가 증가했다고 한다. 맞다. 내가 말하는 "지난 몇 년간"의 자료는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니까 재미없는 서두는 이만 줄이고 본론으로 넘어가자.

자전거 같이 타고 싶다.

우리나라에선 자전거가 어느 시대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1890년대 근처, 자전거라는 탈 것이 그야말로 신기술이던 시절에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기술의 발전은 그렇게 새로운 유행을 만들었고 그 일시적 유행은 자연스럽게 지속가능한 문화를 형성했다. 자전거를 같이 타는 사람들의 모임도 생기고 그들끼리 경쟁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가기도 했으며 트릭이나 묘기 또한 개발되었다. 그리고 이 자전거 유행은 미국의 여권(女權) 신장에의 길을 텄다.

글쓴이는 1890년대의 자전거 유행에 대한 기사를 참고한다. 아래는 1895년 The San Francisco Call에 실린 기사의 발번역본이다.

사실 지금 저기 자전거를 타고 가는 한 숙녀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기분 전환 삼아 공원에 가는 것일 수도 있고, 머리핀을 사러 가는 길일 수도 있고, 마을 건너편에 사는 친구에게 병문안을 가는 것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가재도구나 주근깨를 없애는 비결에 대한 조언을 받으러 가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게 어떤 이유인지는 상관없다. 다만 우리 모두가 궁금해하는 것은 이 수많은 여자들이 탄 자전거의 종착지가 어디냐는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 그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이 흔들거리고 낡은 세상을 일깨우는 그런 원대한 약속이 있는 것은 아닐까?

자전거의 유행은 단순히 새로운 탈 것, 새로운 취미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자전거는 거대한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자전거를 타는 여성은 그 자체만으로 신선한 존재", "남성과 동등해질 수 있는 더 큰 자유로의 (자전거) 타기", "의상 철학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여성 자신만의 고유한 취미" 등의 문구가 신문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위 문단에도 등장하긴 했지만, 자전거의 유행이 불러온 큰 변화 중 하나가 개방적인 여성 의상이었다. 자전거의 영향으로 당시의 여성 패션은 구속적이고 수수하기만 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의상에서 벗어나 발목을 노출하는(최소한 속바지라도) 새로운 패션의 시대로 접어들 수 있었다. 비록 다소의 여성 비하적인 성격이 있기는 하지만, The New York Sun은 1897년 5월 에디션에서 상세한 일러스트, 보그체스러운 설명과 함께 전국 도시별로 자전거를 타는 여자들의 옷차림을 특집 기사로 싣기도 했다.

그 중 한 가지 예. 출처는 원 기사.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유행을 낳고, 새로운 유행은 새로운 문화를 만들며, 새로운 문화는 새로운 사회를 형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