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eautiful Mind

| 2012. 2. 16. 22:32

여름의 기억이니까 아마 2009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합주를 하다가 잠깐 쉬고 있었을 때인지, 이펙터를 만들다가 잠깐 쉬고 있었을 때인지, 학교 매점 뒷편에 나가 지인과 담배를 벅벅 피우고 있는데 허리 높이의 난간 숲풀에서 새끼 고양이가 한 마리 기어나왔다.
어미가 잠시 자리를 비운 모양인지 주변 환경에 굉장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 같았고 다소 겁을 먹은 듯 온 몸이 오들오들 떨리고 있었다.
딱히 동물을 싫어하지 않는 우리는 그가 최대한 우리 때문에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연기도 다른 방향으로 뿜고 조용히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저 새끼 고양이에겐 에어컨 실외기 돌아가는 소리마저 너무 시끄러운 소리일텐데 그 소리에 얼마나 괴로울까.

영화 '뷰티풀 마인드'는 실외기 소리에 겁을 먹는 새끼 고양이와 같은, 살랑거리는 봄 바람에도 움츠러드는 여리고 섬세한 천재의 이야기다.

http://almostsideways.blogspot.com/2011/09/movie-milestones-10-years-of-beautiful.html


이제는 한국에서 워낙에 유명한 영화가 되었기에 이 영화가 존 내쉬라는 실제 인물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라느니, 실제 존 내쉬는 영화에서 묘사된 대로 환영을 본 적이 없다느니, 아름다운 아내 앨리샤는 존 내쉬가 정신분열을 앓기 시작했을 때쯤 법적으로 이혼 상태였다느니, 그리고 이 존 내쉬라는 사람은 아직 정정하게 살아 있는 사람이라느니 하는 잡소리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니고 혹시나 해서 이렇게만 써놓고 넘어간다.
전반적으로 준수한 영화다.
촬영도 좋았고 음악도 좋았다.
조금 더 디테일한 단상들을 나열하면 아래와 같다.

1. 현실 기만

'뷰티풀 마인드'의 연출과 대사는 너무 멋드러져 있다.
조금만 비꼬면 학자의 고리타분하고 구질구질한 삶을 폼나게 잘도 꾸며놨다는 생각이고, 더 많이 비꼬면 이건 순전히 현실 기만이라는 생각이다.
너무 때를 빼고 광을 내놔서 꼭 NBA 올스타전의 어색함을 맛보는 듯하다.
최고의 선수들이 나와 최고의 기량을 펼치지만 작위적인 냄새가 심해서 뭔가 구멍이 뻥뻥 뚫려 있는 그런 느낌 말이다.

2. 특수 효과

하지만 이 영화의 몇 안 되는 특수 효과는 굉장히 뛰어나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특수 효과가 블록버스터급의 화려한 CG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터.
존 내쉬가 거의 무한의 복잡도를 가지고 있는 자료로부터 어떤 패턴을 읽어내는 장면에서 문구, 사진, 글자 등이 번쩍이는 효과는 미니멀리즘의 미학을 간직하면서 동시에 아주 효율적으로 그 효과가 의미하는 바를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과연 이 영화 이전에도 이러한 효과가 있었던 건가?


3. 진부한 스토리

그럼에도 전기적 영화가 갖는 고전적인 스토리텔링은 '뷰티풀 마인드'가 차마 피할래야 피할 수 없었던 벽이었다.
그가 환영과 치르던 대의(大義)와 소의(小義)의 명분 싸움도 그러한 진부함의 한 축에 속하고, 존 내쉬 본인의 회복에 결정적이었던 순간에 제기된 어떤 것이 진실이냐는 인식론적 질문을 진부한 이분법인 머리 ㅡ 뇌, 가슴 ㅡ 심장의 관계로 풀어내는 것도 그렇다.
혹시나 그 진부한 스토리가 통하지 않을까봐 걱정하며 제니퍼 코넬리의 미인계까지 써가며 말이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은 꼬마 여자애가 아니고 제니퍼 코넬리였다.
아무리 꾸며놔도 그 얼굴의 묘한 매력이 가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더라.

후반부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환영들 역시 조금 진부한 장면을 연출한다.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던 장면은 이제는 영영 무시해야 할 그 환영들과 생뚱 맞게 감동적인 작별을 하는 장면이었다.
'식스 센스'도 아니고, 무슨 유령 페티쉬도 아니고 대체 그 장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했다.
영화 스토리에 따르자면 존 내쉬에게 필요했던 것은 과거와의 화해가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과거를 깨끗하게 청산하고 자신이 지나치게 집착했던 것과 깔끔하게 헤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개상 더 어울리는 장면은 그 환영들을 과감하게 때려부수는 것이었을 게다.

빠지는 이야기지만 존 내쉬의 일대기를 보며 계속 앨런 튜링의 인생이 생각났다.
누구도 그의 길지 않았던 인생을 2시간 내외의 필름에 담을 생각은 없는 것일까.

4. 러셀 크로우

'뷰티풀 마인드'의 감상을 다른 식으로 줄이자면 러셀 크로우의 재발견이었다.
이 사람 연기에 그닥 감탄한 적이 없었는데 불안하면서 섬세한 감정을 가진 사람의 내면을 정말 훌륭하게 소화했다.
명품 조연 에드 해리스, 폴 베타니, 조쉬 루카스의 연기도 박수 짝짝짝.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MVP는 단연 자체발광의 제니퍼 코넬리다.

울지마요. http://h33t.com/details.php?id=bc5f60650d10c5d3afd73c4755b32bb82a557b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