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 사상의 향연 : Part 3 ~ Part 4

| 2012. 2. 25. 22:38

3장의 제목은 '교육과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4장의 제목은 '언어교육,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대충 어떤 내용일지 예상되는 바로 그 내용이 담겨 있다.
나의 평은 책의 서술 순서를 재구성한 것임을 미리 밝힌다.

지독한 예상.


지식인의 역할을 논하기에 앞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대체 우리가 흔히들 지식인이라고 부르는 그 집단의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었는가다.
촘스키는 자기 자신이 속해 있는 지식인이라는 집단의 태생 자체가, 그 형성 과정 자체가 잘못된 기형적 산물이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당신과 나는 좋은 대학원을 다녔고 좋은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된 이유는 복종을 잘했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비슷한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지시를 기꺼이 따랐기 때문에 현재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중략)
지식인으로 존경받고 인정받는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권력구조를 위협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런 구조에 봉사하는 사람이고 하다못해 중립적인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위협적인 사람들은 지식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또라이, 미친 자, "무대 옆에 숨어 있는 황당한 자들"이라고 불립니다.

처음부터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은 지식인의 대열에 오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지식에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체제 순종적인 교육 ㅡ 교육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뒤에 이어진다 ㅡ 에서 탈선하지 않고 그 교육이 주는 비중립적인 커리큘럼을 따라야 한다.
자연히 "미국의 지식인 사회가 진실과 정의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그 효율적 행사에만 헌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체제 위주의 교육을 받은 자들이 사회를 이끄는 지식인이 되고, 지식인들이라고 하는 자들이 다시 기존 체제를 강화하고, 강화된 체제는 다시 자기의 입지를 강화하는 방향의 교육 구조를 짜는 무한 후퇴의 피드백이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세상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어가야 할 책임이 있는 지식인들은 이 거대한 수레 바퀴의 정촉매 정도의 역할만 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인을 꿈 꾸는 나 같은 새싹에게도, 내가 바라보는 현재의 지식인들에게도 어둡게 느껴지는 현실이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게 암울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분명히 "깨어 있는" 지식인들이 있다.
여러 수단을 통해 기존의 체제에 강력히 저항하고 누군가 숨기려고 하는 문제를 고발하며 대중들을 계몽하는 역할을 선도하는 그런 지식인들도 분명히 있다.
지식인 집단의 한계를 밝힌 지식인 촘스키 자신이 바로 그런 "깨어 있는" 지식인의 대부가 아닌가.
촘스키 같은 사람이 이처럼 명백한 모순을 저지를 리는 없을 테니 어딘가에 비결이 숨겨져 있는 것이 분명하다.
관대한 촘스키 옹은 그의 비급을 꽁꽁 숨겨두지 않고 대중들에게 널리널리 알린다.

하지만 세상에는 알리지 않고 숨겨야 하거나 때로는 없어져야 할 존재들도 있다.


거의 독고구검의 위용을 자랑하는 촘스키 비급의 핵심은 "지적 자기 방어(Intellectual self-defense)"이다.
지식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연과학의 맥락에서"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탐구하며 "자신들의 정신적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할 때에야 비로소 그들의 의식은 "프로파간다로부터 보호"될 수 있을 것이고 "국내외 정책의 속셈을 은폐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들의 본질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체제 친화적인 주류 언론의 정보를 받아들일 때는 특히 주의해야 한다.
그들이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논지의 시작이 그들의 프레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결론 역시 그 틀을 벗어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언론들도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라는 최소한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어느 정도의 진실을 꿰뚫어 보는 것은 가능하다.
고 촘스키가 그랬다.

그렇지만 우리가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힌트를 잘 살피면 기존 언론에서도 진짜 그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노력을 해야 하고 미국의 언론이 통상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좀 알아야 한다.

지적 자기 방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개념의 주체이자 객체가 "자기"인 만큼, 자기 자신의 노력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촘스키는 이에 대해 짧고 단호하게 "뭔가 배우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열심히, 그러나 제대로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가 확실해지는 순간이다.
자연 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한, 다르게 말하면 인간의 본성을 기본으로 한 사회 분석, 비판적인 시각, 데카르트적인 회의주의 그리고 자강불식하는 자기 쇄신이 뒷받침되기만 한다면 지적 자기 방어 자체는 그리 어려운 행위가 아니다.

지적 자기 방어.
항상 견지해야 할 자세다.

지식인의 지적 방어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지식인 집단이 낳을 수 있는 가장 큰 걱정거리는 제거된다.
하지만 이 것으로 지식인 역할에 대한 문제 제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촘스키는 사회적인 현상은 외면한 채 자신의 일에만 매달리는 골방 지식인, 또는 자신의 행적이 사회에 불러올 영향에 무관심한 지식인들의 무책임에 강한 일갈을 날린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고 그 다음에 무엇이 발생할는지는 우리의 책임이 아니다." 이런 태도를 갖고 있고, 그런 의견을 표명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현재 상태, 미국의 파워, 현대 테크놀로지의 놀라운 파괴력 등을 감안할 때, 이런 반사회적인 태도는 있을 수 없는 태도입니다.

노암 촘스키의 이런 주장에 깔린 전제는 지식인들의 지식적 행위가 정치적인 판단과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지식인들의 입장은 어떠한 경우에서든 진정한 의미의 중립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시대에 지식인들의 존재가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특히 사회과학과 행동과학은 다양한 방식으로 국가정책을 옹호하거나 특별 이익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동원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지식인들에게는 사회적인 책무가 불가피하게 부여된다.
촘스키는 "전문적 커리어와 정치적 활동을 겸업하는" 것을 "건전하고 책임 있는 사람"의 조건으로 내세우고 수단적인 면에서 과학자가 사회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한 발 앞서" 있기 때문에 이공학도들의 사회 참여를 "아주 바람직"한 행위라고 평가한다.
반박할 수 없는 논리다.
진정으로 목소리를 내야 할 때에 침묵하는 지식인들,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공동체적 의미에서 부과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지식인들의 반성과 회개가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사자에게까지 널리 알려야 할 진실이다.

지식인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이야기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촘스키의 교육관은, 지난 장들에서도 어느 정도 언급이 되어 있는데, "내적 지시 과정(Inner directive process)"의 자연스러운 전개를 돕는 것이다.
교수자가 무엇을 직접 가르치려하기보다 학습자가 자신에게 태생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지적 발달 과정을 통해 스스로 배울 수 있게끔 하는 것이 핵심이다.
교수자의 역할은 논점을 던져주는 것이고 학습자의 역할은 주어진 논점들을 알아서 판단한다.
이 때 학습자들에게 던져져야 할 논점들은 되도록이면 다양해야 한다.
다양한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봤을 때 가장 합리적인 결론이 도출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진리.
또한 일반적인 학습자들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이 특정 결론으로 유도되지 않도록 교수자의 의도적인 노력을 자제하는 것도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사회가 다양성을 외면하고 획일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때, 파시즘과 전체주의가 초래하는 결과는 모두가 잘 알고 있지 않나.
촘스키가 뒷부분에서 조금 언급하는 언어 교육의 방법론 역시 교육의 일반론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어차피 자라날 보편문법이라는 씨앗이 있으므로 그것이 잘 자라나게 북돋워주는 수단만 있다면 족하다.

참으로 무서운 영감이다. http://deulpul.net/641788


책이 워낙에 촘스키의 말과 글을 방대하게 다루기 때문에 한 600쪽이 넘어가면서부터는 계속해서 데자뷰가 발생한다.
반복되는 단어, 반복되는 구절, 반복되는 아이디어들 때문에 '이 책, 설마 편집 실수로 같은 부분이 또 들어갔나?' 싶어서 책을 뒤적거린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각주:1]
사족이다.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 촘스키의 생각을 방대하게 읽으며 나 자신의 역할 ㅡ 현재보다는 미래형으로 ㅡ 을 조금 더 확고하게 정할 수 있었다.
큰 그림으로 봤을 때 그가 경계하는 미국식 제국주의, 패권주의, 전체주의는 우리 사회에도 만연해 있는 존재들이다.
촘스키가 고발하는, 사회가 흘러가는 거대한 메커니즘을 장악하고 조종하는 기성 체제는 국경을 뛰어넘었음에도 다행히(?) 아주 흡사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지식인으로서의 미래를 그리고 있는 내가 앞으로 더 신경써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 더 알아야 하고 배워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파악하기가 용이했다.
비록 내가 새롭게 안 것들이 실제 나의 삶에서 구현되느냐는 아예 별개의 문제이긴 하지만, 일단 앞으로의 길이 다소나마 뚜렷해졌다는 것은 고무적인 사실이다.

재미 있게 봤다고 말하고 싶지만서도 이런 두꺼운 책을 읽는 것은 독자에게 매우 부담이 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당분간은 재미 위주의 도서에 탐닉해야겠다.
  1. 다행히도 그런 결점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