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라는 고유 명사와 사상의 향연이라는 거창한 일반 명사구가 만났다.
927쪽에 달하는 책의 외관은 꼭 판도라의 상자를 연상시켰다.
일단 책장을 열면 양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한 촘스키의 사상이 쏟아져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두꺼운 책을 읽게 된다는 마음의 부담감을 안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원래는 책을 끝까지 읽고 나서 하나의 평을 쓰려고 했으나 책의 분량이 분량인 만큼 그렇게 될 경우 평의 길이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았고, 내 머리 속에 정리되는 내용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크게 4장으로 구분되어 있는 이 책의 절반 ㅡ 그러나 양은 절반이 넘는다 ㅡ 인 2장까지 읽은 뒤에 그 때까지의 내용을 하나로 정리하기로 했다.
목차를 보자마자 책의 우리 말 제목이 좀 거슬리는 방식으로 번역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책의 영어 제목은 'Chomsky On Democracy And Education'이다.
직역을 하자면 '민주주의와 교육에 대한 촘스키의 이야기' 정도이고, 우리나라에 다량 번역된 촘스키 책 제목의 트렌드를 따르자면, '촘스키, 민주주의와 교육에 대해 말하다'쯤이 되겠다.
책을 절반까지 읽은 결과 물론 이 책에서 촘스키의 사상의 향연이 펼쳐진다는 말은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태까지 나온 촘스키의 책이 전제에 대한 이야기는 부재하고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 것에 비해, '촘스키, 사상의 향연'에서는 어째서 촘스키의 생각이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것인지 그 근원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책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던 촘스키 사상의 총체가 어떤 것인지 그 실체들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사람의 어떤 구체적인 사고 ㅡ 지금의 경우에는 촘스키의 미국, 세계 사회에 대한 분석 ㅡ 의 근원을 파고들어가면 그 사람이 암묵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철학적 사조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1
책의 초반에서 촘스키는 자신의 반경험주의적 인식론에 대하여 짧게 이야기를 한 뒤, 그로부터 파생되는 경제 정책, 교육 정책, 후생 정책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정책에 대한 입장 차이가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를 서술한다.
고작 그런 인식론의 차이가 어떻게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겠냐고, 어차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비슷비슷한 것이 아니겠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촘스키에 따르면 이것은 사실이다.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와서, 왜 이 책의 우리 말 제목인 '촘스키, 사상의 향연'이 맘에 들지 않냐면, 촘스키는 이 책을 통해 민주주의와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지, 정말 자신의 사상들로 잔치를 벌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2
그는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와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며, 우리가 "사상의 향연"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그의 기타 생각들은 사고 전개 과정에 있어 필수적인 부가 요소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촘스키가 자신의 사고를 차곡차곡 정리해 분야별로 보기 쉽게 요약된 '사상의 향연'을 기대했던 내겐 조금 김 빠지는 일이었다.
'사상의 향연'이라니, 일반 대중들을 위한 촘스키의 의도와는 달리 너무 무게 잡는 느낌이기도 하다.
뭐, 그렇게 거대한 문제는 아니고 그냥 지엽적인 취향 차이 정도로 치부해도 무난하다.
다시 전전 문단으로 돌아가서, 촘스키가 자신의 반경험주의적 입장을 내세우며 주장하는 것은, 촘스키를 일약 스타 자리에 오르게 한 보편문법이다.
1장은 발생학과 유전학을 포함한 생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한 언어학에의 접근을 다룬 촘스키의 언어론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그 핵심이 되는 아이디어, 스키너의 행동주의 이론을 전면으로 반박하고 나서 이제는 언어학의 주류가 된 보편문법이란 대체 무슨 개념일까?
일반인으로부터 제기될 수 있는 반론은 뻔하다.
'만약 우리의 언어적인 능력이 유전자에 내재된 것이라면 어째서 영어, 한국어, 일본어, 스와힐리어, 체코어 같이 다양한 언어 분화가 이루어진 것이냐?', '인간에게 보편문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왜 나는 영어 문법을 공부하면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냐! 이 사기꾼아!' 같은 것 아닌가.
명쾌한 답이다.
장자의 곤과 붕 이야기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자, 그럼 다음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이런 것일 가능성이 크다.
천부적인 능력이 주어졌다면 대체 언어 교육의 필요성은 무엇인가?
전에 제기된 반론과 마찬가지로 딱 처음 들었을 때는 그럴싸한 의문이지만 촘스키의 답을 듣고 나면 모든 것이 명백해진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질문은, '그런 보편문법의 관점에서 봤을 때 바람직한 언어 교육법은 무엇인가?'이겠다.
다소 동떨어진 답처럼 보일 수 있는데 만약 그렇게 동떨어진 답처럼 보인다면 이는 우리가 언어와 언어 교육이 갖는 의미를 과소평가하고 그것들을 우리 삶의 다른 요소들과 독립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이어지는 장에서 계속해서 강조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그리고 우리가 받는 교육은 우리의 세상에 대한 인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로 우리는 언어와 교육이 갖는 의미를 그 자체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나아가 전 지구인의 삶과 관련지어 생각해야 한다.
촘스키가 여기서 일반론적인 대답을 내놓는 이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터.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2장 '인류학은 어디를 가리키나'는 다소 원론적인 이야기로 시작해 점점 구체적인 실례(實例)의 이야기로 퍼져나간다.
솔직히 이 2장의 이야기는 촘스키의 여타 다른 책에서 빈번하게 언급되어 ㅡ 심지어 다른 책에 실려 있던 똑같은 원본의 다른 해석이 있기도 하다 ㅡ 이미 촘스키의 책이라면 6~7권은 읽은 나 같은 사람에겐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 내용들이 놀라운 것은 읽을 때마다 이렇게 통쾌하고 전율이 흐를 수 없다는 것이다.
촘스키가 지지하는 것은, 그가 언어에 대한 이야기로 접근을 시도했던 인간 본성을 바탕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자유사회주의적인 바람직한 사회 구조를 창출하는 것.
그가 옹호하는 자유사회주의의 근간이 되는 고전자유주의에 대한 레퍼런스로 촘스키가 자주 언급하는 이름은 빌헬름 폰 훔볼트와 애덤 스미스다.
사회적 이론이라는 것이 다소 뜬 구름 잡는 소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감안하고 아래의 인용문을 읽어보면 대충 촘스키가 주장하는 자유사회주의가 어떤 분위기의 개념인지 감 잡을 수 있다.
여기까지라면 기존의 촘스키의 책과 '촘스키, 사상의 향연'이 구분되는 점은 딱히 없다.
그러나 이 책에 조금 더 특별한 점이 있다면 촘스키가 좀 더 직접적으로 변화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언론과 정부와 기업의 꼬리가 꼬리를 무는 악순환의 구조, 또는 기업이 최상에 서서 듀이의 말처럼 그것이 드리우는 그림자가 정부를 덮고 그 정부는 언론과 학교와 종교를 통제하는 구조를 변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전자의 구조론에 따르면 서로가 서로를 감싸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거나 후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들의 의식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언론과 학교와 종교라는 수단을 통제해 기본적으로 대중이 문제 의식을 가지지 못하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기업과 정부는 언론 매체를 통해 대중들에게 전달되는 정보를 제한하고 그 정보 속에 포함된 단어의 어조를 왜곡하는 강력한 프로파간다의 수단을 통해 대중들의 자발적 행동을 억제한다.
창조적 체험을 장려해야 할 대학 교육은 오히려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지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을 파개할 방법은 위로부터의 개혁보다 아래로부터의 개혁에 무게를 두고 이 사회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각종 권위에 맞서야 하며 대규모적인 의식 전환, 문화 혁명을 이루어 소수에 의한 다수의 개혁이 아닌 다수에 의한 다수의 개혁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대한민국의 제3매체의 부흥은 이런 방법론의 하나의 구체적 실현 사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언론-정부-기업이라는 뚫어볼래야 뚫을 수 없는 권력의 벽에 그나마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미디어 혁명이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높게 봤던 나는, 나도 그 움직임의 일환이 되고자 이 블로그를 시작했다.
과연 이 작은 블로그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 될지는 차차 지켜볼 일.
아래는 촘스키가 제시하는 방법론의 개론이다.
아래는 대학의 올바른 역할에 대한 촘스키의 견해.
어떻게 이렇게 똑부러진 소리를 할 수가 있지, 이 노인네.
노인네라서 그런가.
그렇다면 촘스키가 반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여태까지 말한 것의 반대쪽 스펙트럼에 서 있는 것들이다.
자유사회주의와는 정반대의 가치를 추구하는 거대 기업 위주의 국가주의적 경제 이념, 그리고 정부에 의한, 그 경제 이념을 실현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인 국방 문제의 대두, 그 국방 문제의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거대 언론,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재생산하는 교육 기관의 잘못된 교육관과 지식인들의 책임 회피, 또는 이미 자신의 사상이 일편향적으로 물들어 있음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상황 등.
문제를 자각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자신의 자리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만 더 생각하고 ㅡ 스스로의 노력이 이룩한 것도 아니고 그저 처음부터 주어진 환경의 당연한 결과로 비교적 높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위를 얻게된 사람일수록 더욱 더! ㅡ 인간이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한다면 기본 준비는 끝이다.
다음 과정은 이미 우리 주변에 많이 존재하고 지금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새로운 시각과 정보를 담은 매체들에 접근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 번 트인 물꼬는 쉽게 닫히지 않을 것이다.
두려워말고 빨간 약을 삼키면 된다.
927쪽에 달하는 책의 외관은 꼭 판도라의 상자를 연상시켰다.
일단 책장을 열면 양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한 촘스키의 사상이 쏟아져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두꺼운 책을 읽게 된다는 마음의 부담감을 안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면적은 전자 여권의 4배, 두께는 떠먹는 요구르트 높이. 표지의 촘스키가 짓는 표정이 꼭 '어디 한 번 읽어봐라, 풋내기야!' 같은 느낌이다.
원래는 책을 끝까지 읽고 나서 하나의 평을 쓰려고 했으나 책의 분량이 분량인 만큼 그렇게 될 경우 평의 길이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았고, 내 머리 속에 정리되는 내용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크게 4장으로 구분되어 있는 이 책의 절반 ㅡ 그러나 양은 절반이 넘는다 ㅡ 인 2장까지 읽은 뒤에 그 때까지의 내용을 하나로 정리하기로 했다.
목차를 보자마자 책의 우리 말 제목이 좀 거슬리는 방식으로 번역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책의 영어 제목은 'Chomsky On Democracy And Education'이다.
직역을 하자면 '민주주의와 교육에 대한 촘스키의 이야기' 정도이고, 우리나라에 다량 번역된 촘스키 책 제목의 트렌드를 따르자면, '촘스키, 민주주의와 교육에 대해 말하다'쯤이 되겠다.
책을 절반까지 읽은 결과 물론 이 책에서 촘스키의 사상의 향연이 펼쳐진다는 말은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태까지 나온 촘스키의 책이 전제에 대한 이야기는 부재하고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 것에 비해, '촘스키, 사상의 향연'에서는 어째서 촘스키의 생각이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것인지 그 근원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책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던 촘스키 사상의 총체가 어떤 것인지 그 실체들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사람의 어떤 구체적인 사고 ㅡ 지금의 경우에는 촘스키의 미국, 세계 사회에 대한 분석 ㅡ 의 근원을 파고들어가면 그 사람이 암묵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철학적 사조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1
책의 초반에서 촘스키는 자신의 반경험주의적 인식론에 대하여 짧게 이야기를 한 뒤, 그로부터 파생되는 경제 정책, 교육 정책, 후생 정책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정책에 대한 입장 차이가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를 서술한다.
고작 그런 인식론의 차이가 어떻게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겠냐고, 어차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비슷비슷한 것이 아니겠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촘스키에 따르면 이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마치 1도의 발사각 차이가 엄청난 목표지의 차이를 초래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http://www.onlifezone.com/genius2/9673206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와서, 왜 이 책의 우리 말 제목인 '촘스키, 사상의 향연'이 맘에 들지 않냐면, 촘스키는 이 책을 통해 민주주의와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지, 정말 자신의 사상들로 잔치를 벌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2
그는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와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며, 우리가 "사상의 향연"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그의 기타 생각들은 사고 전개 과정에 있어 필수적인 부가 요소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촘스키가 자신의 사고를 차곡차곡 정리해 분야별로 보기 쉽게 요약된 '사상의 향연'을 기대했던 내겐 조금 김 빠지는 일이었다.
'사상의 향연'이라니, 일반 대중들을 위한 촘스키의 의도와는 달리 너무 무게 잡는 느낌이기도 하다.
뭐, 그렇게 거대한 문제는 아니고 그냥 지엽적인 취향 차이 정도로 치부해도 무난하다.
다시 전전 문단으로 돌아가서, 촘스키가 자신의 반경험주의적 입장을 내세우며 주장하는 것은, 촘스키를 일약 스타 자리에 오르게 한 보편문법이다.
1장은 발생학과 유전학을 포함한 생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한 언어학에의 접근을 다룬 촘스키의 언어론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그 핵심이 되는 아이디어, 스키너의 행동주의 이론을 전면으로 반박하고 나서 이제는 언어학의 주류가 된 보편문법이란 대체 무슨 개념일까?
보편문법이 무엇입니까?
촘스키 : 그것은 유전 작용이 언어기관 속에 짜 넣어주는 불변의 원칙들의 총체입니다. 이 원칙들은 문법과 발성과 의미를 아우릅니다. 달리 말해서 보편문법은 물려받은 유전 기질로서 이것 덕분에 우리가 인간의 언어를 말하고 배울 수 있습니다.
일반인으로부터 제기될 수 있는 반론은 뻔하다.
'만약 우리의 언어적인 능력이 유전자에 내재된 것이라면 어째서 영어, 한국어, 일본어, 스와힐리어, 체코어 같이 다양한 언어 분화가 이루어진 것이냐?', '인간에게 보편문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왜 나는 영어 문법을 공부하면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냐! 이 사기꾼아!' 같은 것 아닌가.
우리들은 각자 매우 다릅니다. 언어들은 매우 다릅니다. 사회들도 매우 다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생물학자들이 동물을 살피는 방식대로 우리들의 입장에서 자신의 특성을 추론하고, 동물을 관찰하듯이 인간의 삶을 다소 밑으로 깔아본다면, 통상적인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보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유별난 인간의 관찰자는 인간 언어의 통일성,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의 변형이 지극히 미미하다는 사실, 매우 두드러진 측면에서 모든 언어들이 동일하다는 사실 등을 알고 몹시 놀랄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는 우리 인간을 관찰하면서 이렇게 깨달을 것입니다. 흐음, 인간은 그런 점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군. 왜냐하면 인간의 삶을 위해서 공통 사항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게 극히 자연스럽고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공통 사항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신경을 쓰는 것은 차이점들입니다.
명쾌한 답이다.
장자의 곤과 붕 이야기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곤과 붕이라고 검색하니까 나온 짤방. http://nilnilism.tistory.com/189
자, 그럼 다음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이런 것일 가능성이 크다.
천부적인 능력이 주어졌다면 대체 언어 교육의 필요성은 무엇인가?
전에 제기된 반론과 마찬가지로 딱 처음 들었을 때는 그럴싸한 의문이지만 촘스키의 답을 듣고 나면 모든 것이 명백해진다.
의심할 나위 없이 모든 인간 언어의 문장 형태와 해석을 결정하는 원칙들과 언어의 기본구조가 대체로 천부적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언어 발달을 강조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어린이가 궁핍한 환경에 처한다면 천부적 능력들은 결코 발달하거나 숙성되거나 번성하지 못할 겁니다. 극단적인 경우를 들어본다면 무척 오랫동안 다리에 깁스붕대를 한 아이는 걷기를 전혀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적절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한 아이는 사춘기를 한참 동안 지체된 후에 맞이하거나 아예 겪지 못할 겁니다. 비록 걷기와 성적 성숙이 천부적으로 결정된 생물학적 특성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치로, 어떤 기관에서 성장한 아이는 충분한 경험과 영양을 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정상적인 상호작용이 결핍되었다면 아이는 정상적으로 발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질문은, '그런 보편문법의 관점에서 봤을 때 바람직한 언어 교육법은 무엇인가?'이겠다.
다소 동떨어진 답처럼 보일 수 있는데 만약 그렇게 동떨어진 답처럼 보인다면 이는 우리가 언어와 언어 교육이 갖는 의미를 과소평가하고 그것들을 우리 삶의 다른 요소들과 독립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이어지는 장에서 계속해서 강조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그리고 우리가 받는 교육은 우리의 세상에 대한 인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로 우리는 언어와 교육이 갖는 의미를 그 자체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나아가 전 지구인의 삶과 관련지어 생각해야 한다.
촘스키가 여기서 일반론적인 대답을 내놓는 이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터.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내 의견은, 보육원에서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어느 수준에서나 가르치는 일은 대체로 자연적 발달을 북돋우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교수 "방법"은 배우는 과목이 배울 만한 가치가 있음을 확실하게 해주고, 진리와 세계 이해에 대한 어린이와 혹은 성인의 천부적 호기심과 흥미가 잘 익고 발달할 수 있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제에 대한 약 90퍼센트 정도의 대답입니다. 교수 방법은 나머지 10퍼센트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릅니다.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2장 '인류학은 어디를 가리키나'는 다소 원론적인 이야기로 시작해 점점 구체적인 실례(實例)의 이야기로 퍼져나간다.
솔직히 이 2장의 이야기는 촘스키의 여타 다른 책에서 빈번하게 언급되어 ㅡ 심지어 다른 책에 실려 있던 똑같은 원본의 다른 해석이 있기도 하다 ㅡ 이미 촘스키의 책이라면 6~7권은 읽은 나 같은 사람에겐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 내용들이 놀라운 것은 읽을 때마다 이렇게 통쾌하고 전율이 흐를 수 없다는 것이다.
촘스키가 지지하는 것은, 그가 언어에 대한 이야기로 접근을 시도했던 인간 본성을 바탕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자유사회주의적인 바람직한 사회 구조를 창출하는 것.
그가 옹호하는 자유사회주의의 근간이 되는 고전자유주의에 대한 레퍼런스로 촘스키가 자주 언급하는 이름은 빌헬름 폰 훔볼트와 애덤 스미스다.
사회적 이론이라는 것이 다소 뜬 구름 잡는 소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감안하고 아래의 인용문을 읽어보면 대충 촘스키가 주장하는 자유사회주의가 어떤 분위기의 개념인지 감 잡을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국가에 대한 토의를 위해 두 가지 표준적 유형의 관점들을(고전자유주의와 자유사회주의) 말했다. 이 둘은 국가의 기능이 억압적이라는 점, 그리고 국가의 행위는 제한되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자유사회주의자는 산업사회의 민주적 조직을 위해 국가 권력을 제거해야 마땅하다고까지 주장한다. 민주적 조직으로 구성된 산업사회에서는 모든 기관들에 참여하거나 그 기관들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그 기관들을 직접 관리한다. 그 결과 하나의 관리체제로서 노동자위원회, 소비자위원회, 공동체 회의, 지역 연합체 등으로 이루어진 시스템을 상상할 수 있다. 이 관리체제는 일종의 대표제로 운영된다. 한편 이러한 대표제는 직접적이고 폐지 불가능하다. 명확하게 규정되고 조화로운 통일체로 구성된 사회단체에 대하여 대표자들이 직접 보고하고 책임을 지며, 상위 단체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석하여 그 사회단체를 대변하기 떄문이다.
여기까지라면 기존의 촘스키의 책과 '촘스키, 사상의 향연'이 구분되는 점은 딱히 없다.
그러나 이 책에 조금 더 특별한 점이 있다면 촘스키가 좀 더 직접적으로 변화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언론과 정부와 기업의 꼬리가 꼬리를 무는 악순환의 구조, 또는 기업이 최상에 서서 듀이의 말처럼 그것이 드리우는 그림자가 정부를 덮고 그 정부는 언론과 학교와 종교를 통제하는 구조를 변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전자의 구조론에 따르면 서로가 서로를 감싸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거나 후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들의 의식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언론과 학교와 종교라는 수단을 통제해 기본적으로 대중이 문제 의식을 가지지 못하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기업과 정부는 언론 매체를 통해 대중들에게 전달되는 정보를 제한하고 그 정보 속에 포함된 단어의 어조를 왜곡하는 강력한 프로파간다의 수단을 통해 대중들의 자발적 행동을 억제한다.
창조적 체험을 장려해야 할 대학 교육은 오히려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지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안 좋은 길로 빠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파개할 방법은 위로부터의 개혁보다 아래로부터의 개혁에 무게를 두고 이 사회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각종 권위에 맞서야 하며 대규모적인 의식 전환, 문화 혁명을 이루어 소수에 의한 다수의 개혁이 아닌 다수에 의한 다수의 개혁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대한민국의 제3매체의 부흥은 이런 방법론의 하나의 구체적 실현 사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언론-정부-기업이라는 뚫어볼래야 뚫을 수 없는 권력의 벽에 그나마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미디어 혁명이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높게 봤던 나는, 나도 그 움직임의 일환이 되고자 이 블로그를 시작했다.
과연 이 작은 블로그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 될지는 차차 지켜볼 일.
아래는 촘스키가 제시하는 방법론의 개론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좌파의 운동은 현대사회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다수의 대중에게 설득력 있는 미래의 사회질서에 대한 비전을 세워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성공할 기회도 없거니와 성공할 만한 값어치도 없다. 좌파 운동의 참된 목표와 조직의 형태는 정치적 투쟁과 사회 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만 설정될 수 있다. 진정한 진보적 문화는 대중 대다수의 정신적 변화를 통해서만 창조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창의성과 자유의 지평을 확대시킬 수 있었던 모든 사회혁명의 기본적인 특징이다.
(중략)
또한 좌파는 모든 진리와 덕성의 원천이라고 자칭하는 "전위부대"가 국가 권력을 잡아 사회생활의 규범으로서 고상한 가치들과 정말로 민주적인 사회구조를 실현할 혁명을 기적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명백하게 표명된 좌파 운동의 목표들이 단지 부수고 파괴하는 것이라면 결국 자기 스스로를 파괴하고 부수는 데에 그치고 말 것이다.
긴 안목으로 볼 때 선진 산업사회의 특징인 불합리한 자원의 낭비 및 파괴를 끝장냈다고 해서, 지구 자원의 평등한 분배 때문에 선진 국가의 생활 수준이 하락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좌파의 사회변혁운동이 기술적으로 선진화된 사회들 속에서 뿌리를 내리려면 대규모의 "문화적 혁명"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아니 그것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
아래는 대학의 올바른 역할에 대한 촘스키의 견해.
어떻게 이렇게 똑부러진 소리를 할 수가 있지, 이 노인네.
노인네라서 그런가.
http://www.allstarpics.net/0006074/012624747/noam-chomsky-pic.html
근본적인 의미에서 대학의 사회적, 지적 역할은 건강한 사회에서라면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꼭 이와 똑같은 말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이것을 자연과학계에서는 어느 정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과학은 종래의 사고에 항상 도전함으로써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과학 교육이 성공적이려면 도전하고 탐구하도록 학생들을 북돋워야 합니다. 개인과 사회 전체는 이러한 자유주의적 이상을 추구하는 정신이 교육계 전반에 걸쳐, 아니 그 너머로 확대될 때 비로소 이득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촘스키가 반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여태까지 말한 것의 반대쪽 스펙트럼에 서 있는 것들이다.
자유사회주의와는 정반대의 가치를 추구하는 거대 기업 위주의 국가주의적 경제 이념, 그리고 정부에 의한, 그 경제 이념을 실현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인 국방 문제의 대두, 그 국방 문제의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거대 언론,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재생산하는 교육 기관의 잘못된 교육관과 지식인들의 책임 회피, 또는 이미 자신의 사상이 일편향적으로 물들어 있음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상황 등.
우리가 과학자, 학자, 지지자 등으로서 수행하고 있는 것은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우리의 말하기나 행동 거부가 일정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과 같다. 한 곳으로 집중된 권력과 특권에 기초한 사회에서는 이 조건을 피할 수 없다. 이런 사회에는 과학자나 학자가 고상한 사회에서라면 부담하지 않아도 될 무거운 책임이 있다. 고상한 사회에서는 개인들이 자기의 삶과 믿음에 대한 결정을 권력자들에게 맡기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정직, 성실, 책임감, 배려 등 단순한 덕목들을 권장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덕목에 따라 사는 일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
노골적이고 저속한 세뇌교육보다 더 중요하게 경계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학교에서 발견되는 전체주의라는 일반적 양상과 문제 해결에서 전문가에 대한 경외감을 앞세우는 기술관료적인 사고방식 등입니다. 이런 사항들은 선진 산업사회에서 퍽이나 당연시되고 있고 우리 삶의 몇몇 분야에서 병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논란을 일으키지 않을 정도로 실제적인 가정에 근거하여 볼 때, 미국의 정치와 미디어는 기업의 소유주와 경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요한 사회문제들에 관하여 정치인들은 기업 권력의 이해관계란 측면에서 지엽적이고 전술적인 사항들을 논의하는 데 그칠 것입니다.
주요한 의제를 설정하는 미디어도 그 자체가 하나의 대기업입니다. 여러가지 요소들로부터 영향을 받는 미디어는 기업주들, 광고주들, 특권층 등 경영을 맡는 자들의 이해를 충실히 대변하는 세계상을 지어낼 겁니다.
문제를 자각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자신의 자리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만 더 생각하고 ㅡ 스스로의 노력이 이룩한 것도 아니고 그저 처음부터 주어진 환경의 당연한 결과로 비교적 높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위를 얻게된 사람일수록 더욱 더! ㅡ 인간이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한다면 기본 준비는 끝이다.
다음 과정은 이미 우리 주변에 많이 존재하고 지금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새로운 시각과 정보를 담은 매체들에 접근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 번 트인 물꼬는 쉽게 닫히지 않을 것이다.
두려워말고 빨간 약을 삼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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