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부 9 : 남은 5월의 계획들

| 2012. 5. 24. 03:52

평온했던 5월 22일 화요일 아침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뒹굴거리기로 시작되었다.
지난 날에 농구를 보며 먹다가 남은 피자와 치킨 스틱으로 아점을 먹었다.
서로 자신의 랩탑을 붙잡고 시간을 보내던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대로 앉아 있기에는 20대 중반으로서 너무 무기력한 것이 아니냐는 결론으로 흘렀고, 지난 며칠의 외출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맹목적인 "외출을 위한 외출"을 또 다시 감행했다.

흐린 건지 안 흐린 건지 말하기 애매한 하늘 아래로 걸었다.

30번가 역(30th Street station)의 진지한 자태.

며칠 전부터 계속 뜬 구름 잡듯이 이야기 해온 조깅의 코스로 지목된 강가를 따라 걸어보기로 했다.
사진으로 보기엔 굉장히 궃은 날씨처럼 보이지만 햇살이 군데군데 비치고 있었고, 습도가 높은 편이라 날이 덥게 느껴졌다.
그대로 걸으면 상당한 수분 소모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마실 것이나 하나씩 사들고 본격적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바로 근처로 30번가 역이 보였다.
필라델피아에서 이 역 주변은 대중 교통의 집결지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근처에 다른 도시들로 갈 수 있는 버스 터미널이 있고, 역 지하로 지나가는 지하철도 있으며, 지상으로 달리는 기차도 이 곳에서 탈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건물 내부에는 여행객들을 위한 푸드 코트가 마련되어 있었다.
친구가 자주 들른다는 코지(Cosi)라는 가게에 가서 아이스 티 하나와 레몬에이드 하나를 샀다.
종업원이 꽤 상큼하게 생긴 여자였는데, 친구 말에 따르면 딱 봐도 고등학생이란다.
그래서 뭐?
내가 언제 마이너인지 확인해달라고 했나?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건대 나는 절대로 그런 적이 없다.

각설하고, 겉으로 물이 줄줄 흐르는 음료를 들고 강가로 내려갔다.

필라델피아의 중심을 살짝 서쪽으로 비켜 관통하는 강의 이름은 스퀼킬 강(Schuylkill river).
서울의 심장을 뚫는 한강이 워낙에 큰 강이라 다른 지역의 강들과 한강을 비교하는 것이 썩 합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폭만 따지자면 한강은 커녕 그 지류 중의 하나인 홍제천의 그것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강이다.
물 역시 전혀 깨끗하지 않고 푸르죽죽한 색에 정체불명의 거품이 둥둥 떠다니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악취 같은 것은 나지 않았다.
친구에 따르면 여름이 되더라도 냄새는 나지 않는다고 한다.

일단 강가로 내려갔다.
평일 정오 무렵이었고 날씨가 그다지 좋지도 않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강 옆을 따라 마련된 조깅 코스 위를 뛰고 있었다.
애초에 당장 뛸 생각도 없었고 옷도 캐쥬얼 차림으로 입은 우리는 일단 답사 형식으로 우리가 언젠가 뛰게 된다면, 그 때 뛸 코스를 한 번 걸어갔다 오기로 했다.

사진을 찍은 것이 없어서 인터넷에서 찾은 사진으로 대체. http://blogs.phillymag.com/bewellphilly/2011/09/15/runnin-on-the-river

왕복으로 약 5km 가량 되는 조깅 코스의 끝은 미국 3대 미술관에 들어간다는 필라델피아 미술관(Philadelphia Museum of Art) 근처였다.
위 사진에서 보이는 것이 필라델피아 미술관인데 날씨가 꾸질꾸질해서 그런지 고풍스러운 맛은 좀 덜했다.
즉흥적으로 생긴 산책이었던 만큼 그 목표가 달성되자 마자 1의 미련도 없이 바로 돌아서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미술관이든 조깅이든 일단은 뒤로 미뤄놓고 보자는 청년 특유의 근성이 유감 없이 발휘된 순간.

그래도 화요일에는 큰 성과가 있었다.
이렇게 무책임한(?)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와서, 여태까지 말로만 하던 여러 잠정적 계획을, 빼도 박도 못하게 현실의 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첫째로 시리즈 스코어 3대2로 몰린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와 보스턴 셀틱스의 플레이오프 6차전 경기 표를 예매했다.
둘째로 목요일 아침 9시에 필라델피아를 떠나 뉴욕으로 가는 왕복 버스 표를 예매했다.
엄청 간단하게 끝나는 일이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전자의 계획은 생각보다 큰 예산이 들어가는 일이고, 후자의 계획은 생각보다 큰 육체 노동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나머지 하루를 훑어 봤을 때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나마 여행기에 올릴 만한 일이 있었다면 바로 화요일 밤에, 당일 정오에 답사했던 강가 조깅을 실천에 옮긴 것 정도랄까.
여기 시각으로 밤 10시 30분이 넘어서 숙소를 출발해 대략 11시 30분 무렵에 방으로 돌아왔던 것 같다.
낮에는 가보지 않은 미술관 근처와, 상류 쪽에 설치된 저수지 등을 간단하게 둘러보기도 했다.
날씨가 괜찮을 때 나 혼자라도 다시 찾아와 사진을 찍는다면 꽤 멋진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았다.

미국에 도착해 처음으로 자의적인 땀을 흘리니 ㅡ 타의적인 땀이라면 바로 이 날 무지하게 흘린 적 있다 ㅡ 기분이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잽싸게 샤워를 하고 컴퓨터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 잠에 들었다.

수요일, 현재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오늘 아침에는 잠에서 일찍 깼다.
그렇다고 뭔가 대단한 것을 한 건 당연히 아니다.
흥미로운 동영상이 없나 온라인 세상을 뒤적거리면서 대부분의 오전 시간을 보냈다.
나보다 늦게 잠에서 깬 친구가 오전에 교수와 약속이 있다면서 점심에 샐러드라도 사올 테니 그것으로 가볍게 점심을 먹자고 했다.
그의 몸매 관리에 동참하기로 한 나로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전날 차를 사먹었던 코지에서 사온 샐러드로 이 정도면 약 8불 정도 나간다고 한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풀을 냠냠 쩝쩝 뜯어 먹었다.
야채 자체도 상당히 신선했지만 드레싱의 맛이 참 깔끔하고 좋았다.
아직 미국의 음식 문화에 대해 만족할 만큼 파악한 수준은 아니지만 조만간 내가 느끼는 미국의 음식 문화는 어떤 것인지 별도로 포스팅을 할 생각이다.

샐러드와 햇반으로 대충 배를 채우고는, 캡슐 커피 기계로 내린 아메리카노로 입가심을 했다.
커피를 쪽쪽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났던 모양인지 쏟아지는 낮잠을 도저히 이길 방법이 없었다.
한 시간 정도 낮잠을 자고 일어나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다.
굳이 별 내용도 없는 포스트를 왜 이렇게 급하게 올리냐고 묻는다면, 여행객으로서, 아니 여행기를 꼬박꼬박 쓰는 여행객으로서 앞으로의 계획들은 꽤나 도전적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상의 일을 글로 만들어 올리는 사람에게 가장 빡센 일정은, 글로 쓸 만한 일들은 많은데 막상 글을 쓸 시간은 없는 형태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의 계획을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고작 몇 시간의 여유 뒤에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홈 구장인 웰스 파고 센터(Wells Fargo center)로 가서 치열한 ㅡ 사실 치열하길 바라는 경기를 관람하고 밤 11시쯤 집에 돌아와 뉴욕에 가서 필요한 짐을 싸야 하고, 그렇게 내일 뉴욕을 가면 거기서 하루 밤을 머물고 다시 필라델피아로 돌아와 그대로 워싱턴으로 출발하든지 또는 그 다음 날에 워싱턴으로 출발하든지 하는 터프한 일정을 소화하고, 워싱턴에 가게 되면 우리가 가는 날짜에 따라 최소 하루에서 최대 이틀까지 머물고 다시 필라델피아로 돌아와야 한다.
이 빡센 일정을 소화하고 나면 대략 5월이 끝나는 셈.

따라서 나의 여행기는 당장 지금 시점까지는 일단 써놔야 한숨이라도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바람대로라면 오늘 농구 경기를 보고 와서 그와 관련된 포스팅을 밤에 올리고 뉴욕에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면 되는데, 아마 시간 상 그렇게는 힘들 것 같다.
현실적으로 다음 포스팅은 이틀 뒤나 운이 안 좋다면 나흘 뒤에나 올라올 예정이다.

일단 미국에 와서 한 번도 안 한 빨래부터 처리해야 한다.
뉴욕까지 갔는데 멋 없는 팬티를 입고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나.

하지만 절대 보라색 팬티는 입지 않겠다. 사실 보라색 팬티 같은 거 있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