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부 13 : New York City, can be so pretty

| 2012. 5. 29. 22:27

아침의 해프닝은 친구가 자신의 호프 수건을 챙기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오히려 아침에도 응원용 타월로 몸을 닦을 뻔했던 상황이 불가피하게(?) 해결되었으므로 더 나은 결과가 도출되었다고 볼 수도 있었다.
사실 우리가 뉴욕과 DC에서 머물 곳은 모두 지인들이 사는 곳이었기에 꼭 우리들의 수건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비상용으로 하나 챙겨두자는 것이었고 두 명에 하나라면 "비상용"으로는 충분한 것이 아니겠는가.

사나이라면 아침 따위 먹지 않고 출발하는 것이 인지상정.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친구는 가던 길에 푸드 트럭(food truck)에서 쉐이크를 하나 사 먹었다.

한국에는 없는 문화라지만 미국에서 봐서 그런지 너무나도 자연스럽기 그지 없었던 푸드 트럭.

터미널이라고 하는 곳으로 나갔다.
당연히 동서울터미널이나, 최소한 대전 청사 앞 터미널 정도의 구조물을 생각했던 내게 필라델피아의 버스 터미널은 푸드 카트보다는 훨씬 더 큰 컬쳐 쇼크로 다가왔다.

터미널이라고 알고 갔기 때문에 이 장소가 터미널처럼 보였지, 만약 나 혼자 터미널을 찾아 가라고 했다면 상당한 혼란을 겪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터미널이 운영되는 방식이야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솔직히 위 사진을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메커니즘이다.
그냥 자신의 목적지가 적힌 이정표에 서 있으면 버스가 제 시각에 맞춰서 온다.
그게 끝이다.

목요일 아침, 다소 이른 시각이라 그랬는지 뉴욕으로 가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미리 인터넷으로 끊었던 볼트 버스 표를 들고, 오전 9시 정각에 거의 맞춰 도착한 버스에 올랐다.
고속 버스에 타면 안전 벨트를 매어야 뭔가 안정감이 들어 잠에 잘 드는 스타일인 나는, 왼쪽 어깨에서 튀어 나오는 안전 벨트 방식에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옆 자리가 비어 공간에 여유가 있었으므로 수면에 알맞은 자세를 취하는 것엔 문제가 없었다.

버스는 곧 출발했다.
자연스레 감상에 빠지지 아니할 수 없었다.
아마도 나의 행선지가 뉴욕, 뉴타운도 뉴라이트도 뉴또라이도 아닌 뉴욕이었기 때문이겠지.
비록 1박의 짧은 일정이고, 다른 루트를 통해 다시 한 번은 꼭 방문하리라는 계획이 있었지만 "뉴 욕"이라는 2음절의 고유 명사가 의미하는 바는, 나 같은 미국 뉴비에게 굉장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머리 속으로 뉴욕을 중심으로 한 마인드 맵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지난 밤의 부족한 잠과, 아침의 해프닝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뉴런은 활발히 제 기능을 다 했다.

마인드 맵의 최종 목적지는 불세출의 메탈 밴드, 익스트림의 가장 유명한 대표곡이자 밴드의 음악적 취향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비주류곡인 'When I first kissed you'.
21살, 익스트림의 익스트림한 맛깔스러움에 한창 빠져 있던 시기가 오버랩되며 무한의 센티멘탈로 침잠해 들어갔다.

이 얼마나 낭만적이며 이 얼마나 치기 어린 감성이란 말인가!
잘 생각나지 않는 가사를 조금씩 떠올리면서 이 휘발성 강한 정크 감성을 만끽했다.
뉴욕 시티를 향해 가는 버스에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노래를 만든 누노에게 심심한 감사와 존경의 뜻을 표하며 조금씩 잠에 들기 시작했다.

는 솔직히 포스팅을 위한 개수작이었고, 사실 나는 몰래 받아둔 나꼼수 13회를 들으며 필라델피아 시내를 벗어나고 있었다.
직설스러운 농담과 '조 카터!' 따위의 적나라한 드립에 속으로 낄낄 거리면서, 지나가는 풍경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잠이 쏟아졌고 이어폰을 잠시 뺀 뒤에 편하게 잠을 청했다.

버스가 잠시 멈췄다.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바깥은 뉴욕이라는 두 글자와는 전혀 상관없는 어느 한적한 시골 동네였다.
문득 버스 복도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던 그 동양 여성이 옆 자리에 놓인 나의 가방을 쳐다 보고 있는 것이, 빨리 네 가방을 치우지 않으면 뭔가 말을 건네버리겠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날리고 있었다.
흠칫하고 가방을 품에 안았다.
여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옆 자리에 앉았다.

후에 나보다 4~5칸 앞에 탔던 친구는 그 여성을 비롯해 근처에 앉았던 사람들이 모두 한국 사람들이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그런 줄 알았으면 한 번 따뜻한 인사말이라도 건네볼 걸 후회가 되기도 한 게 아니고 당연히 하나도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뒤로 단 한 번도 그들을 쳐다보지조차 않고 아까 잠시 멈춰두었던 나꼼수를 열심히 들었기 때문이다.
벙커1에서 봤던 '재처리는 확실히'라는 문구를 천천히 되새김질하며 대한민국 사회에 대한 의미 있는 일갈에 귀를 기울였다.

화제가 넘어가기 전에 사족을 붙이자면, 내가 탄 버스가 잠시 멈췄던 곳은 원래 필라델피아 외곽에 하나 더 있는 탑승장이라고 했다.

어느 새 주변 지리가 바뀌어 있었다.
꼭 이태원, 한남동 근처의 대로 변을 달리는 느낌이었다.
허나 풍경의 변화는 당시 내게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하늘에서 닭똥 같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정 자체가 불가피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기 예보를 확인하는 것 자체가 꽤 무의미한 일이었으나 우산 정도는 챙겨올 수도 있었다.
당일 아침 필라델피아의 흐린 하늘을 바라 보며 아무런 생각 없이 집을 떠난 내 자신이 정말 바보 같았고 덤으로 막심한 후회가 몰려 들었다.

야속한 비는 버스가 목적지에 다다른 그 순간부터 완전히 전성기를 맞았다.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는 어떻게 뻐길 구실이 없었던 우리는 일단 비를 좀 맞으면서 잠깐 폭풍우로부터 몸을 피할 수 있는 공간에서 대기를 타기로 했다.
하염 없이 내리는 비를 잠시 제쳐두고 내 차림새부터 살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나 자신을 비에서 보호해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청바지에 면 티, 면 재킷, 심지어 가방까지 면으로 된 녀석이었다.

첫 뉴욕 방문치고는 상당히 실망스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수동적인 스탠스를 취할 수는 없는 법.
그나마 비닐 소재로 된 잠바를 입고 있던 친구가 먼저 나가 택시를 잡았고 이내 잡힌 택시에 올라 탔다.

그 유명한 옐로우 캡 내부는 저렇게 칙칙하기만 했다.

첫 목적지는 친구가 예약을 잡아 놓은 미용실.
필라델피아에는 썩 괜찮은 미용실이 없는 모양인지 이렇게 가끔 뉴욕에 나올 일이 있을 때마다 머리를 자른다고 했다.
당초 계획은 머리를 자르고 있는 동안 나 혼자서 어디를 갈 것인지 정하고 있거나 그냥 미용실 주변이라도 혼자 설렁설렁 걸어 보는 것이었으나 본격적으로 내리는 비가 모든 계획을 틀었다.
그냥 미용실 로비에 앉아 비에 축축하게 젖은 몸을 차가운 에어컨 바람에 맡기고 옷을 말리며 친구를 기다리기로 했다.

머리를 자른다는 것, 머리를 자르는 사람이 전문적으로 있다는 것은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100% 서구 문명의 산물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크라이나에서 가봤던 미용실이나, 한국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갔던 미용실이나, 이 곳 뉴욕의 미용실이나 분위기나 인프라에 별 차이는 없었다.
꼭 예약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나 가격이 적지 않다는 것 정도를 차이로 들 수 있겠으나 이는 단순한 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지, 무슨 나라 별 미용실의 차이 같은 문제로 비화할 성격의 것은 누가 봐도 아닐 것이다.

결과적으로 미용실행은 상당히 의미가 있었다.
놀랍게도 깔끔하게 머리를 자른 친구와 밖으로 나왔을 때 지긋지긋했던 비가 그친 것이 아닌가!
건물 안에서 조금 춥기는 했지만 ㅡ 그래서 따뜻한 커피를 한 잔만 내달라고 부탁했었다 ㅡ 내 옷도 뽀송뽀송하게 말라 있었다.
홍해의 기적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 뉴욕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비가 오지 않으니 택시를 타고 돌아다닐 일도, 따라서 뉴욕의 트래픽 잼에 갇혀 고생할 일도 없었다.
일단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5분도 채 걷지 않았는데 유니언 스퀘어(Union Square)가 눈 앞에 띠용 튀어 나왔다.

다시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 놈의 비가 하루 종일 우리를 괴롭힐 것 같았다.
비가 다시 오기 시작하니 아무래도 비를 피할 곳이 필요했다.
조금의 의논 끝에 뉴욕 현대 미술관 ㅡ 모마(MoMA, Museum of Modern Art)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는 ㅡ 에 가기로 결정했다.
뉴욕에 왔으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과 모마 정도는 가줘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생각보다 빡빡한 일정과 축축한 날씨, 좋지 못한 몸 컨디션이 모두 어우러져 조금 더 작은 사이즈인 모마가 경합에서 승리한 것.

근처 지하철 역으로 들어갔다.
비 오는 날 지하철 역 특유의 냄새를 맡으면서 뉴욕에 가면 꼭 지하철을 한 번 타보려고 했었던 게 생각났다.

사진을 보다가 빼먹을 뻔 했던 사진을 찾았다.
클리셰가 될 것 같아서 찍지 않으려고 했지만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손을 막을 수 없었다.
위 전광판은 유니언 스퀘어 근처에 설치된 시계 및 예술 작품으로, 좌측 6자리는 현재 시각이 12시 44분 10초라는 것을 알려준다.
우측 6자리는 오른쪽부터 두 자리씩 읽어서 11시간 15분 49초, 즉 현재부터 자정까지 남은 시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중간에 나머지 세 자리는 랜덤하게 변하는 숫자라고 한다.
실제로 보면 아래와 같이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게, 꽤나 있어보이지만 가랑비 밑에서 보고 있으면 그냥 빨리 지나가고 싶은 생각밖에 안 든다.

신속하게 메트로 카드를 뽑아서 이동했다.
한 번 이동할 때 개인 당 2달러가 드는데 나 같은 1박 여행객에게는 이보다도 더 싼 교통 수단이 없었다.
처음 탔을 때는 생각했던 것보다 그렇게 더러운 것은 느끼지 못했다.
승차감도 뭐 적당히 괜찮았던 것 같았다.

지하철은 꽤나 빠른 편이었고 목적지에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도착했던 것 같다.
하지만 빗줄기는 다시 거세져 있었고 우리는 또 한 번 뉴욕의 쓰라림을 맛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