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부 15 : New York, I love you but you're freaking me out

| 2012. 5. 30. 21:44

밖으로 나와서는 딱히 할 일도, 미리 세워둔 계획도 없었다.
거리에 서 있는 푸드 트럭에서 향긋한 음식 냄새가 나는 것을 느끼고, 생각해 보니 그렇게 일찍부터 집에서 나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계속해서 현재의 문제만 신경을 써야 했던 상황 ㅡ 나를 정말 귀찮게 하는 비가 내렸지 않나 ㅡ 에서 벗어나자마자 ㅡ 하지만 이제는 그친 것 같다! ㅡ 배가 꼬르륵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라도 좋으니 일단 허기진 배를 좀 달래기로 했다.
기왕 뉴욕까지 찾아왔으니 아무 곳에서나 먹기보다 그나마 조금 유명한 곳, 의미 있는 곳을 찾아가자는 결론이 나왔다.
친구는 기억을 더듬어 근처에 록펠러 센터(Rockefeller center)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애시당초 먹는 장소에 대한 호불호가 거의 없다시피한 나는 쫄쫄 그를 따라갔다.

큰 길로 나오니 사거리 건너편으로 빌딩 숲에 어울리지 않는 큰 교회가 하나 보였다.
뭔가 대단한 게 있나 싶어 잠깐만이라도 구경을 하고 나오자고 했다.

뭔 사진이 이따구냐고?

근데 진짜로 볼 게 별로 없었다.
외관부터 시작해서 입구 내부까지 전면적인 공사를 하고 있었기에 밖에서는 사진을 찍을 태가 나지 않았고, 실내에 들어갔지만 그다지 특이할 만한 사항은 없었다.
물론 교회 내부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에겐 제각각 나름의 방문 목적이 있었겠지만 종교 문화에 크게 관심이 없는 내겐 그냥 어떤 건물에 불과해 보였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서 최소한 내가 갔던 건물이 이름이 무엇이며 무슨 역사가 있는지 찾아보려고 "뉴욕 교회"라는 검색어를 쳐봤다.
하지만 뉴욕은 교회가 생겼다 하면 없어지는 "사탄 마귀의 힘이 크게 역사하는" 동네라고 떠들어대는 꼴통들이 있다는 사실이나, 무려 뉴욕에도 순복음교회가 있다는 사실 같이 알아봤자 도움은 커녕 화만 나는 것들만 눈에 띄어서 검색을 포기.
사정이 이러니, 어떤 뉴욕 전문가가 나타나 "음, 인테리어를 보아하니 어디 어디 스트릿에 있는 무슨 교회네요."라고 친절하게 알려주기 전엔 내가 방문한 교회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 같다.
모마의 주소를 찾아서 지도를 검색할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마우스도 파워 케이블도 꼽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잉여롭게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상황을 고려하면 그마저도 불가능.

각설하고, 록펠러 센터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바로 이 교회 맞은 편쯤에 있었던 것 같다.
센터 입구에는 그 유명한 아틀라스 동상이 있었다.

앞에서 사진이라도 한 장 찍고 싶었지만 단체 중국인 관광객들이 특유의 혼잡한 된소리와 함께 주변을 점령하고 있어 도저히 사진을 찍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냥 내 사진이라도 찍자 싶어 카메라를 들이대봤지만 동상의 크기가 주변 공간에 비해 압도적으로 큰 관계로 멋진 각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센터로 들어갔다.

록펠러 센터가 그렇게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뭔가 관광객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것이 없나 두리번거렸다.
1층에 레스토랑을 제외하고는 별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경비원에게 물어봤다.
카페나 레스토랑이나 뭐 특별한 것이 없다고 했다.
처음부터 기대한 것도 없었지만 막상 사정이 이러니 왠지 김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쉐이크를 좋아한다면 이 곳 1층에 있는 레스토랑에 한 번 가보라며 넌지시 팁을 주었고, 어차피 커피만을 마시기에는 조금 배가 고팠던 우리는 망설임 없이 레스토랑에 들어 섰다.

식사 시간을 피해 와서 그랬는지 확실히 사람은 별로 없었다.

메뉴에 쉐이크 종류가 여러 개가 있어 신중하게 선택을 했다.
물론 나는 그냥 가장 메뉴 가장 위에 있는 클래식 쉐이크로 가장 무난한 딸기 맛을 골랐고, 신중한 선택은 친구 혼자서 다 했다.
칠리가 곁들어진 감자 튀김을 같이 시키고 오랜 만에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눴다.

솔직히 맛있었다.

테이블로 배달된 쉐이크는 맛도 맛이었지만 양도 상당히 많았다.
쉐이크 하나를 시킬 때마다 사진 좌측에 보이는 쉐이커에 남은 쉐이크를 리필용으로 담아주기 때문에 돈 값을 톡톡히 해내는 가성비를 가졌더랬다.
사실 이 곳에서 먹었던 칠리 감자와 쉐이크에 모두 만족해서 이름이라도 꼭 이름이라도 올려주고 싶었는데, 오 인터넷에 검색하니 바로 튀어나온다.
'빌의 바와 버거(Bill's bar and burger)'라는 레스토랑이란다.
우리 말로 옮겨 놓으니 무슨 힌두어로 된 성전의 한 구절 같은 느낌이다.
빌의 바와 버거.

관람에 지친 다리도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비에 지친 멘탈도 어느 정도 제 자리를 잡았을 때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다음 목적지는 없었다.
근처에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처음에 모마를 오기 위해 내렸던 지하철 역 바로 근처에서 보였던 센트럴 파크(Central park)를 가보기로 했다.
어차피 나에겐 뉴욕 방문이 한 번 더 예정되어 있었고 그 때는 무조건 센트럴 파크를 마음껏 걸으리라는 당찬 계획도 세워놓았지만, 마땅히 할 것도 없는 상황에서 미리 가보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모마까지 올 때는 그렇게 멀게 느껴졌던 거리는, 성큼성큼 걸어가니 그다지 멀지 않았다.

센트럴 파크에 도착했다.
내가 혼자 뮌헨에 떨어졌던 날의 다음 날 아침, 비가 촉촉하게 내리고 있었지만 마땅히 일정이 없던 덕에 방문했던 영국인 정원이 떠올랐다.
따지고 보면 이모저모 비슷한 점이 많은 산책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별 목적 없이 관광이 아닌 산책을 위한 방문이었고, 도심 속의 거대한 자연 공원이라는 점도 비슷하고, 흐릿한 하늘에 축축하게 젖은 풀들도 비슷한 광경이었다.

빌딩을 배경으로 하는 울창한 나무의 모습은 언제 봐도 이색적이다.

좀 여유 있게 걸으려고 했건만 하늘은 여기서 마지막 심술 ㅡ 이 비가 내가 뉴욕에서 본 마지막 비였다 ㅡ 을 부렸다.
또 다시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
미처 가장자리로 나가지 못했던 우리는 정말 운치 있게도 ㅡ 마치 소설 <소나기>의 한 장면처럼 ㅡ 나무 아래서 비를 피했다.
내 머리 위로 높게 뻗은 나무가 무슨 나무였는지 당연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녀석은 상당히 효과적으로 비를 막아주었다.

조금 기다리자 비가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이 때다 싶어 우리는 곧장 센트럴 파크를 벗어났고 약 네 시간 전에 내렸던 지하철 역을 찾을 수 있었다.

너구리만한 쥐가 돌아다녀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환경.

지하철을 타고 저녁 약속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뭔가 들뜬 마음에 탔던 첫 지하철과는 달리 이번에 타는 지하철은 굉장히 로(raw)한 면모를 보여줬다.
승차감이 안 좋은 것은 물론이요, 출발과 정지에 온 몸이 쏠려 하마터면 주변 사람들에게 큰 민폐를 끼칠 뻔하기도 했다.
역 내부의 더러움은 뭐 말도 못한다.
내가 살면서 탔던 지하철 중에 ㅡ 서울에서 밥 먹듯이 탔던 지하철, 방공용이라 해도 설득력이 있는 키예프의 지하철, 그 외 부다페스트, 오스트리아, 도이치란트에서 잠깐씩 이용했던 지하철, 아주 어렸을 때 일본에서 탔던 지하철을 모두 통틀어 가장 인프라가 낙후된 곳을 꼽으라면 당연히 뉴욕이다.
많이 타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얼마나 노선이 효율적으로 꾸며져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뉴욕 지하철은 확실히 여행객이 느끼기에 쾌적한 공간은 아니었다.
딱 하나의, 그리고 한국 사람에게는 이 하나만으로 어느 정도 다른 단점을 커버할 수 있는 장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속력이 매우 빠르다는 것.
고속 철도 정도의 고급 시설이 아닌 이상 열차의 승차감과 속력은 반비례 관계에 있을 거라고 추정되는데, 뉴욕 지하철은 두 극에서 속력쪽에 중점을 둔 것 같은 느낌이다.
아님 말고.

저녁을 먹기로 한 장소는 약간 타임스퀘어와 브로드웨이의 냄새가 나는 어중간한 동네였다.
주체적으로 여행을 하게 되었더라면 지도를 옆구리에 끼고 내가 어디를 가고 있는지, 또는 어디에 있는지 금방 금방 파악했겠지만 애초에 그런 식으로 떠나온 여행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엇이 어디에 있고 내가 어디쯤에 있었는지 기억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쨌든 약속 시각보다 조금 먼저 도착했고 밖에서 다른 일행을 기다렸다.

일본식 바베큐를 판다는 규-가쿠. 사장이 한국 사람(누군가 그랬다.)이라는 말은 들어서 그런지 느낌은 그냥 한우 파는 고기집.

초면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어 테이블 위에 차려진 식사를 찍진 못했지만 정성스럽게 차린 한국 고기집 밥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배가 터질 만큼 먹고 또 먹고 또 먹었다.
이미 쉐이크와 칠리 감자를 먹은 상태라 그렇게 허기진 것을 느끼지 못했는데도 정말 많이 먹었던 것 같다.

이 날 같이 저녁을 먹었던 사람들은 모두 컬럼비아 대학교에 다니는 사람들로, 한 명은 내 친구의 지인이자 그 날 뉴욕에서 머무를 쉼터를 제공해 주실 형님이었고 나머지 두 명은 그 형님의 같은 학교 지인들이었다.
계산을 마친 뒤에 나머지 두 형님과 작별 인사를 하고, 일단 무엇을 하든 간에 짐부터 두고 오자고 해 다시 지하철을 타고 형님의 집으로 향했다.
우리가 머물 그 곳은, 센트럴 파크 북쪽에 위치한 컬럼비아 대학교 근처에 있었다.
주변에서 가장 높았던 건물로 깔끔한 외관이 인상적이었다.

내부는 아주 깔끔하고 쾌적하고 좋고 정말 행복했다.
가볍지 않은 가방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아무 걱정 없이 편하게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집에 도착했을 때쯤의 시각이 약 저녁 9시, 아마 9시 근처였던 것 같다.
뉴욕에서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기 전에 일단 플레이 스테이션을 켜고 아직 한 번도 플레이하지 못한 PES 2012를 친구와 둘이서 시작했다.

이어지는 뉴욕에서의 첫날밤은, "freaking me out"이라는 구절이 아깝지 않은 그런 밤이었다.
고요함에서 시작해 걷잡을 수 없이 몰아치는 이 트랙의 전개와 아주 흡사하게 진행되었던 5월 24일 밤의 이야기는 다음 포스트에서 이어진다.

단연 LCD 사운드시스템 최고의 트랙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