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부 19 : 메모리얼 데이와 롤링 썬더

| 2012. 6. 3. 00:50

친구 C의 집에서 내려다 보이는 흔한 알링턴의 풍경. 이 정도로 한적한 동네였으니 망정이지.

<인류멸망보고서>의 멘붕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지난 날에 걸은 거리가 꽤나 길었고 취침 시각이 꽤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늦었다고만은 할 수 없는 때에 일어났다.
오후 4시 무렵에 워싱턴을 떠나 필라델피아로 향하는 버스 표를 끊었기 때문에 마냥 밍기적거리고 있을 수 없었다.
아무리 밤에 속성 코스로 워싱턴 관광을 마쳤다지만 그래도 밝을 때 한 번쯤 다시 둘러보고 싶은 건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들 잽싸게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분명히 2박을 해야 했던 집에서 하루밖에 자고 가지 못하는 것에 왠지 숙박비를 날렸다거나 하는 억울함이 들었지만 내가 따질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분통을 표현할 대상도 없는 것이 현실.

택시를 타고 링컨 기념관(Lincoln memorial)로 향했다.
어제 우리가 도보로 건너 왔던 다리가 아닌 다른 다리로 워싱턴에 진입했다.
그런데 도무지 어느 순간부터 길이 꽉 막혀서는 차가 앞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무슨 사정이 있나 싶어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오늘이 메모리얼 데이(Memorial day)에 앞선 일요일이기 때문에 롤링 썬더(Rolling Thunder)의 퍼레이드가 있어서 경찰들이 길을 통제하고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 보니까 다음 날인 2012년 5월 28일은 미국의 현충일이라고 할 수 있는 메모리얼 데이였다.
좋은 볼거리가 생겼다 싶은 우리는 대충 길 옆에 택시를 세워서 퍼레이드의 현장으로 직접 걸어가기로 했다.

확실히 수도이다 보니 행정 건물들이 많았다.
이름만 들어도 대충 누구인지 감이 올 것 같은 사람들이 기관장으로 있는 건물들이 우뚝 우뚝 솟아 있었다.
길을 한 번 꺾어서 언덕 길을 따라 내려가니 슬슬 길가에 보이는 사람들로부터 강렬한 할리 데이비슨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할리 데이비슨이 사람을 바꾸는 것인지, 사람이 할리 데이비슨을 만드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할리 데이비슨을 좋아하는 사람들, 아울러 할리 데이비슨이 상징하는 문화적 코드를 공유하는 사람들은 정말 다들 비슷한 인상을 풍기게 마련이다.
햇빛에 붉게 그을린 피부, 헐크 호건의 수염과 꼭 닮은 콧수염, 두건, 조끼, 부츠, 청바지 등의 어지러운 조합을 갖춘 아저씨들이 군데 군데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막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있던 도로를 본 순간, 우리는 도저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쓸모 없는 이야기지만 워싱턴에는 공항이 많고 그 공항들이 시내에 위치한 경우가 많아 낮게 나는 비행기들을 꽤나 자주 볼 수 있다.

좀 더 가까이 가서 보자.

바글바글, 부릉부릉.

미국에 온 뒤로 본 인파 중 가장 그 규모가 큰 것이었다.
롤링 썬더 ㅡ 원래 이 이름은 아마 베트남전의 한 작전 이름이었을 것이다 ㅡ 라고 하는 것은, 내가 군대에서 있었을 때 듣기로, 은퇴한 참전 미군들의 모임으로 무슨 해병대 전우회 비슷한 인상의 단체로 알고 있다.
현충일에 해당하는 메모리얼 데이를 맞아 이 롤링 썬더의 회원들이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워싱턴의 주요 도로에서 퍼레이드를 벌이는 것이 연례 행사라고 한다.
워낙에 곳곳에서 오토바이가 보였기 때문에 어림 짐작하기가 힘들지만 우리가 아침에 탔던 택시 기사의 말에 따르면 약 5만대의 오토바이가 집결한다고 한다.
광복절을 맞아 강렬한 전자음을 내며 경찰과 대치하는 것을 멋으로 아는 대한민국의 폭주족들과는 애초에 그 규모부터가 달랐다.
더 신기한 사실은 5만대라고 하는 그 수치가 절대 과장된 것이 아님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건 그냥 아무 곳이나 한 부분을 찍은 것이다. 이 날 워싱턴에서는 아무 곳이나 대고 셔터를 눌러도 오토바이가 나올 만큼 시내가 오토바이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복절 폭주족과 메모리얼 데이의 롤링 썬더를 놓고 비교하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이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퍼레이드를 하는 것이 애국심을 표현하는 올바른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어쨌든 이런 지극히 마초적인 문화가 미국을 통해 한국으로 유입된 것은 당연한 듯 보였다.
다만 우리 나라의 경우 그 문화가 왜곡되어 짱깨나 배달하는 고등학생들이 자신의 경주 실력을 뽐내고, 기발하게 개조된 머신을 자랑하고, 온갖 싸구려 LED와 스피커 등으로 치장하는 등 흔들리는 정체성을 잘못된 방식으로 세우려는 광대 문화의 일환이나 중2병의 극단적 표출 따위로 전락해버린 것 같았다.
할리 데이비슨으로 대변되는 문화와는 도저히 취향이 맞지 않는 내게 퍼레이드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을 계속해서 지켜 보는 것은 꽤나 곤욕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최소한 이 미국인들이 시끄럽고 요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광복절이라는 날만 뺀다면 ㅡ 이 광복절이란 날이 선택된 것도 태극기라는 데코레이션이 자연스럽게 가능하고, 다음 날이 공휴일이라 고등학생들이 학교를 쉰다는 점이 작용된 결과라고 본다 ㅡ 정말 아무런 근본도 없이 집단 광기를 표현하는 우리 나라와는 달리, 이들에겐 나름의 굳은 명분과 그에 따르는 엄숙함과 진지함 등의 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이겠다.
퍼레이드 일행이 다리를 건너 워싱턴 시내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이병 짬찌 군인이 쌩쌩 지나가는 오토바이들을 향해 경례를 하고 있는 모습이 바로 이 행사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물론 뙤약볕 밑에서 계속해서 경례 자세를 취해야 하는 그 이병에겐 메모리얼 데이고 나발이고 최근 몇 년 중에 가장 화가 나고 힘든 날이 되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미스테리인 것은 어쩌다가 오토바이가, 그것도 할리 데이비슨 같은 오토바이가 롤링 썬더의 상징이 되었느냐는 것이다.
파보기 시작하면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무언가가 도출될 것 같다는 느낌만 가지고 사색을 멈췄다.
햇볕이 너무 뜨거웠기 때문이다.

이것이 링컨 메모리얼의 숨 막히는 뒤태.

길을 걷다 뭔가 사진 찍기에 좋은 장소가 나와서 지나가는 아주머니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할리 데이비슨 문화에 흠뻑 취한 아주머니여서 그런지 우리의 배경으로 어떻게든 퍼레이드 일행이 지나가는 사진을 찍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셨다.
각도를 달리해가며 무려 6장의 사진을 찍어준 아주머니에게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자리를 떴다.
일단 저 링컨 기념관 건물 앞 쪽으로 가는 것이 우리의 목표.

분명히 깨끗하지 않은 물이었지만 저렇게 수영을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워낙에 더웠던 날씨 탓일 것이다. 역시나 오토바이는 빠지지 않고 있다.

퍼레이드 사정 때문에 도로를 마음 대로 못 지나가는 것이 조금 귀찮았다.
다리 밑을 통해 길 건너편으로 갔다.
조금 걸으니 바로 링컨 기념관 앞이었다.

사진으로는 잘 느껴지지 않지만 역시나 사람들이 득시글거렸다.

건물을 외관에서 보자면 대체 뭐가 유명한 건물인지 알 수가 없으나 그 안에 있는 링컨의 거대한 좌상을 본다면 분명히 어디선가 한 번 봤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는 그 건물이다.
링컨 기념관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 장 또 찍었다.
이번에는 괜히 엄한 사람에게 부탁하지 말고 좀 단번에 깔끔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람을 고르기로 해, 버거워 보일 정도로 큰 카메라를 목에 매고 다니는 이탈리아 풍의 남자에게 사진기를 맡겼다.
사진의 결과물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링컨 기념관을 바로 마주보고 있는 건물은 그 유명한 워싱턴 기념탑(Washington monument)이었다.
바로 마주보고 있다는 말은 두 건물의 거리가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기보다 정말 두 건물의 법선 벡터가 역방향으로 일치한다는 뜻이다.
깐깐하게 굴지 말고 대충 알아 듣자.

상당히 줌을 당긴 사진이다. 다시 말하건대, 두 건물의 사이는 별로 가깝지 않다.

기념탑 앞으로 보이는 거대한 콘크리트 축구장 같은 곳은 원래 인공 호수 같은 것이 조성되어 있어야 할 곳이었다.
어쩌다가 저렇게 무미건조하게 메워진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인파를 따라 같이 계속 길을 걸었다.

무슨 느낌이 드나.

베트남 전쟁에 대한 지식의 대부분을 <하얀 전쟁>과 <지압 장군을 찾아서>에서 얻은 나에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꽤나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시작부터 끝까지 정치적인 이슈로 잔뜩 물들어 있는 이 전쟁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깨알 같이 적힌 젊은 영혼 ㅡ 대부분이 일병과 상병들이었다 ㅡ 의 이름들과 여전히 그들을 잊지 못하고 해마다 꽃을 보내오는, 이제는 늙어버린 사람들에게 베트남 전쟁은 어떤 의미로 남아 있는 것일까.
이름이 새겨져 있는 벽에 종이를 대고 탁본을 뜨고 있던 한 할머니의 모습에서 나는 뭐라 간단히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느꼈다.
작은 행성 지구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명분에 조종 당하고 농락 당하며 희생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날은 언제쯤 오는 건지,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 상처 받은 사람들의 세대가 끝나면 과연 궁극적인 평화가 이루어질 날이 오는 건지, 도저히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사실 이 씁쓸한 마음은 롤링 썬더 퍼레이드를 볼 때부터 근근히 이어져 왔던 것이라 할 수 있다.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사람들의 세대가 저물었다는 가정 하에 ㅡ 물론 저 거대한 전쟁이라고 해서 비판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ㅡ 미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많은 전우회 사람들은 무엇을 기리고 무엇을 추모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일까.
필력이 딸리고 지력도 딸리므로 대충 여기서 일단락을 지어야겠다.

다행히도 나의 급센치해진 마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새 백악관을 향해 가는 길에 접어 들었고 주위엔 더 이상 성조기도, 추모 행렬도, 오토바이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메모리얼 데이는 그렇게 일찍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