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부 21 : 미국에서의 첫 쇼핑을 빙자한 소소한 일상 썰

| 2012. 6. 6. 09:15

마지막으로 올라온 여행기의 마지막 사진, 즉 5월 27일이 일요일의 저녁 차림상을 본 사람이라면 직감했겠지만 내가 필라델피아에서 머무는 이 집에는 먹을 것이 별로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원래 집의 주인인 두 친구는 5월 중순 봄 학기의 기말 고사가 끝나자마자 자메이카 여행을 떠났었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대부분의 음식을 그 전에 먹어 치웠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가 이 집에 잠시나마 머물게 되면서 그마저 남아 있던 식량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고, 일요일 저녁 내가 먹은 라면과 햇반을 끝으로 사실상 먹을 만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집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다음 날인 월요일, 나를 포함한 우리의 가장 큰 할 일은 자동적으로 장을 보는 것이 되었다.
서울에서도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그런 미국식 대형 마트에 가는 것을 상상했던 내게 멀지 않은 곳의 한인 마트를 간다는 소식은 뜻밖이었다.
나름 외국 여행을 좀 다녀봤지만 한인 마트라는 것은 구경도 하지 못한 나였다.
한인 마트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머리 속에 떠올릴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미 서울에서는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재래식 시장의 모습이었다.
스스로 재배한 농산물이나 한국에서 공수해온 각종 공산품을 노상에서 파는 모습, 바로 그것이 내가 생각한 한인 마트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나올 지경이지만 뭐, 정말이다.

집카 (Zipcar)  ㅡ 짚차, 즉 지프(Jeep) 차라든가 집에 딸린 차, 즉 자가용 같은 것이 아님에 유의하자 ㅡ 라는 수시 렌탈 서비스를 이용해 마트에 갈 차를 구했다.

사실 이 날 우리가 탄 차는 오른 편에 보이는 빨간 녀석이었다.

국내에서 상용화된다고 하더라도 꽤나 인기가 있을 서비스 같았다.
도심에서 살짝 벗어난 공용 주차장들에는 집카를 위해 따로 마련된 공간이 있었다.
집카의 회원들은 회원 카드만 있으면 언제든지 이 차를 꺼내 쓸 수 있고, 돈은 사용한 시간을 합산해 월말에 한꺼번에 결제되는 시스템이었다.
2시간 정도 내에 다녀올 수 있고 대중 교통으로는 이동이 불편한 상황이라면 택시보다 훨씬 효율적인 교통 수단이었다.
무더운 햇살을 뒤로하고, 운전자까지 총 5명을 꽉꽉 채워 한인 마트로 출동했다.

이곳이 바로 문제의 한인 마트. 예상컨대 전미에 걸쳐 체인점이 있는 것 같다.

차로 약 20분쯤 이동해서 도착했다.
알고 보니 예전에 필라델피아에서 친구들과 처음 만났던 날 밤에 갔던 술집 근처였다.
비록 본래의 느낌과는 사뭇 다른 의미이긴 하지만, 재래 시장을 상상했던 내게 깔끔한 건물 외관은 약간의 컬쳐 쇼크였다.
100원짜리 동전을 넣을 필요 없이 바로 뽑아 쓸 수 있는 카트를 끌고 마트 내로 진입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완전히 신세경.

비유적인 표현인 건 누구나 잘 알고 있을 터.

고등학교 때 수학 여행차 갔던 금강산 관광길에서, 우리가 머물 리조트에 들어섰을 때 들었던 그 느낌과 분명히 비슷했다.
순식간에 내가 원래 속해 있던 공간과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왔다는 이질적인 느낌.
<매트릭스>의 네오가 빨간 약을 먹고 두 번째 탄생을 했을 때의 그 느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온천장에 처음 들어섰을 때의 바로 그 느낌 정도는 당연히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 같은 미국 뉴비가 일상적인 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것치고는 꽤나 신기한 기분이었다.
그냥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소형 마트의 풍경이었다.

바구 클레멘타인 박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바구 클레멘타인 박스"라는 글자는 읽을 수 있지 않나.

각종 잡다한 것들을 죄다 팔고 있었다.
농산물과 과일, 어류, 해조류, 육류를 포함한 먹을 거리들은 물론, 냉동 식품부터 과자, 아이스크림 따위의 간식 거리도 넘쳐났고 그 외 생활에 필요한 각종 살 것들도 부족함 없이 준비되어 있었다.

양념고기당.

수입을 해오는 건지, 그냥 미국에서 생산되는 것들을 가져온 건지 잘은 몰라도 확실한 건 그냥 대충 봤을 때 먹을 것들의 생김새가 한국의 그것과 비슷비슷했다.
마음씨 착한 친구들은 아무래도 내가 가장 집에서 식사를 많이 하게 될 텐데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골라서 카트에 담으라고 했다.
첫 쇼핑이기도 했고 ㅡ 생각해 보니 미국에 와서 뭔가 구매한다는 것이 이게 처음인 게 아닌가! ㅡ 어차피 돈도 3분의 1로 뿜빠이 하는 것이라 간을 보기 위해 조용히 아이 쇼핑을 즐겼다.

하지만 치리오스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남자 셋이서 별 망설임 없이 집은 것들을 계산하니 예상을 훨씬 뛰어 넘는 돈이 청구되었다.
하지만 절대 과소비를 한 것은 아니었고, 그냥 좀 더 오랜 기간 쟁여 놓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앗차!' 싶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 우리 세 명 외에, 같이 마트에 왔던 나머지 두 사람도 대충 비슷한 시각에 쇼핑을 마쳤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2층에 볼 일이 있는 사람은 2층으로 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카트를 끌고 밖으로 나가 계산을 마친 짐을 차에 옮겨 실었다.
아직 올라가 보진 못했지만 2층에는 무려 한국식 중국 음식점을 비롯한 푸드 코트 비슷한 것이 있다고 했다.
기왕 마트에까지 왔으니 저녁은 깐풍기를 먹자며 포장된 깐풍기를 산 것은 연막 작전이었고, 사실은 같이 장을 보러 왔던 사람의 깜짝 생일 파티를 위한 케이크 구매가 1차적인 목적이었다.
당사자가 눈치 채지 못하게 잘 마무리를 짓고 다시 집 근처 주차장으로 갔다.
집카의 시스템이 시작 시각은 30분 단위고, 이용 시간은 1시간 단위로 엄격하게 구분되기 때문에 애꿎게 추가 비용을 내지 않기 위해서는 빡빡하게 돌아가야 했다.
이런 종류의 운전에 익숙해져 있던 친구가 능숙하게 차를 몰았고 무사히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중간에 하나 빼먹은 에피소드가 있다.
처음에 집카를 뽑고 마트로 출발하는데 차에 기름이 없다는 신호가 들어왔다.
집카의 경우 기름을 넣는 것은 집카에 내장된 회사 카드를 이용, 무료로 기름을 넣을 수 있고 또 다음 이용객을 위하여 기름을 넉넉하게 채워두는 것이 규칙이라고 하는데 이전에 차를 탔던 그 누군가가 ㅡ 라디오를 틀자마자 볼륨 빵빵한 스웨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100% 흑형이었다 ㅡ 그 규칙을 지키지 않은 것이었다.
거의 게이지가 바닥을 치고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가는 길에 우리가 기름을 넣어야 했다.
바로 보이던 주유소로 들어갔다.
집카 카드를 이용해 어떻게 기름을 넣는지도 잘 몰랐던 우리는 이 차에 어떤 기름을 넣어야 하는지조차 잘 모르는 이중 난관에 봉착했다.
일단 결제 문제는 친구가 주유소 사무실로 가서 해결하기로 했고 차에 남아 있던 우리는 근처의 택시 기사에게 기름의 종류의 관한 것을 물어보려고 하는데.

띠용.

완전히 외국인처럼 생긴 아저씨가 말도 안 되게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하는 것이 아닌가.
일단 놀라는 건 제쳐두고 필요한 정보를 다 얻은 우리는 그에게 어떻게 해서 그렇게 질 좋은 한국말을 배웠는가 물었다.
무슨 일을 했던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국에서 10년 넘게 있다가 이 곳 미국으로 들어와 택시 기사를 하고 있다는 그.
미국에서의 생활도 4년인가 5년인가 되었다고 하던데 여전히 네이티브 수준의 우리 말을 쓰는 것이 신기했다.
공항 갈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을 달라며 명함도 두어장 건네준 그는 아내와 함께 자신이 타고 온 택시를 끌고 먼저 주유소를 떠났다.
우연이라고 표현해야 하는 건지 그냥 몹시 신기한 일이라고 표현해야 하는 건지 헷갈리지만 "에피소드"라는 이름을 달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는 일이었다.

어쨌든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호텔 벨보이들이 쓰는 카트 같은 것을 끌고 집으로 짐을 실어 날랐다.
밤까지 이런 일 저런 일,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11시쯤 모여 다음 날이 생일이었던 사람의 집으로 찾아갔다.
처음에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어, 우리 말고도 누군가 생일을 챙겨주는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우린 지금 굉장히 눈물에 땀이 나는 상황에 처한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지만, 잠에 들었던 그 사람이 뒤늦게 문을 열어주었고 즐거운 생일 파티를 해줄 수 있었다.
물론 내가 미국에 오기 전부터 알던 사람은 당연히 아니었고, 딱 그 생일 파티를 포함해 두 번째로 보는 사람이었다.

케이크도 맛이 있었고 곁들여 먹은 와인도 맛이 있던 밤이었다.
지난 한 주의 이야기를 한 포스트에 몰아 쓰려고 했는데 벌써 분량이 이렇게 되었으니 남은 이야기는 저녁을 먹고 와서 써야겠다.
확실히 글이라는 게 일단 쓰기 전까지는 상당히 귀찮지만 한 번 손가락을 놀리기 시작하면 술술 써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