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부 20 : 다시 돌아온 필라델피아

| 2012. 6. 5. 01:11

이대로 더 페이스가 밀린다면 영영 쓰지 않게 될 거란 생각에 할 일을 제쳐두고 글을 쓴다.

작열하는 태양 빛 아래 수면 부족증에 시달리던 우리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백악관으로 향했다.
발 밑에 깔린 잔디가 ㅡ 솔직히 그 풀이 잔디인 건지는 잘 모르겠다 ㅡ 아주 어설픈 높이로 자라 있었기 때문에 발을 들었다 놨다 하는 과정이 그렇게나 귀찮고 힘들 수가 없었다.

모바일로 지도를 보니 이 근처 어딘 가에 백악관이 있어야 했다.
방향을 대충 정하고 찾아 보니 저 멀리, 정말 저 멀리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저 멀리에 백악관(The White House)이 작게 보였다.
당연히 더 가까이에 가서 보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건물을 향해 전진하던 우리는 어디선가로부터 제지의 일갈을 받았고, 왜 사람들이 더 가까운 곳에서 사진을 찍지 않고 애매한 곳에서 셔터만 눌러대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일반 관광객들은 백악관 정문 거의 300~400m 부근까지만 접근할 수가 있는 시스템인 것 같았다.
뭐가 이 정도로 경계가 삼엄한 건지 미국답지 않게 살짝 쪼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게 관광객으로서 내가 뭐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이 정도면 가까이서 본 편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사족을 붙이자면 내 카메라의 줌을 있는 힘껏 가득 당겨 찍은 사진이다. 솔직히 육안으로는 저게 백악관인지 걍 하얀 건물인지 알아보기가 힘들었을 정도.

백악관까지 찍었으니 워싱턴 관광은 이것으로 완전 종결이었다.
딴 소리지만 타이핑을 하면서 자꾸 백악관을 청와대로 쓰려고 한다.
빨리 글 마무리 짓고 할 일이나 하라는 계시인 듯.

배가 고파왔다.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뻘뻘 돌아다니기만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대충 브런치를 먹고 남은 시간을 봐서 유니언 스테이션까지 택시를 타고 가든가 걸어 가든가 정하기로 했다.
사실 이름이 좋아서 브런치이지 우리가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고 앉은 것이 약 1시 30분쯤이었을 것이다.
'브'자를 없애고 그냥 런치라고 해야 옳은 표현이겠지만 이미 뉴욕까지 다녀온 한국의 흔한 관광객에게, 런치보다는 브런치가 좀 더 있어 보이며 기왕이면 더 있어 보이는 쪽으로 여행을 포장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는 브런치를 먹으러 근처를 좀 더 기웃거렸다.

옛 여자친구와 이 근처에서 뭔가를 먹어본 적이 있다는 한 친구의 제보에 따라 길을 걸었다.
백악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딱 봐도 브런치를 즐길 수 있어 보이는 레스토랑들이 보였다.
바로 옆 호텔 레스토랑에 같이 운영하는 노상 음식점으로, 분위기도 괜찮아 보였고 사람들도 적당히 붐비고 있었다.
우리도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름부터가 세련된 옥시덴탈 카페. 옥시덴탈이라고 하니까 옥시크린이랑 무슨 치약 이름이랑 합쳐진 것 같다.

뚱뚱한 백인 여자가 서빙을 맡았다.
메뉴를 들여다 보았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확실히 가격이 싸지는 않았다.

깨알 같은 미국식 '시가'. 다른 곳에는 MP, 즉 마켓 프라이스의 약자로 적힌 곳도 있더라.

뭘 먹을지 고민하다가 그냥 대충 샐러드로 배를 채우고 나중이 집에 달아가서 저녁 밥을 먹기로 혼자 계획을 세웠다.
샐러드 중엔 무엇이 맛잇을까 봤다.
가격도 저렴했지만, 여기서 잘 먹지 않았던 과일이 땡겼다.
무슨 어쩌구 저쩌구 과일 샐러드를 골랐다.
나머지 친구들은 무슨 햄버거들이랑 게살인지 랍스터 살인지로 만들어진 비스킷 비슷한 걸 시켰다.

음식이 하도 서빙이 안 되고 빵조차 나오지 않아서 웨이터를 불렀더니 뭐 엉뚱한 소리만 했다.
어차피 버스 출발 시각까지 시간이 좀 남는 편이라 어딘가에서는 시간을 좀 버려야 할 판이었지만 기본으로 갖다 주는 빵조차 나오지 않는 것은 좀 심했다.
결국 다른 웨이터를 불러 빵을 좀 갖다 달라고 부탁하고, 우리의 웨이터에게는 팁을 적게 주자고 의견을 모았다.
진부할 대로 진부해져서 한 방울의 웃음조차 나오기 힘든, 뭐 '이제야 과일 씨앗 심었나 보네.' 또는 '이제 소 한마리 잡기 시작했나 보다.' 따위의 드립이나 치면서 시간을 보냈다.
원래 우리가 타고 돌아다니기로 했었던 워싱턴 시내 관광 버스들이 레스토랑 밖 도로로 지나다녔다.

거의 30분이나 기다려서야 음식이 나왔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접시를 보고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으아니!

이게 뭔가 싶었다.
내가 생각한 과일 샐러드라 함은 볼(bowl)에 각종 채소와 과일이 버무려진 배가 고프지 않을 때 먹으면 어느 정도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그런 음식이었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친구들에게 물었다.
한 친구가 자기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무슨 무슨 샐러드라는 메뉴 자체가 원래 채소와 함께 나오는 무언가가 아니고 그냥 그 무슨 무슨을 여러 종류 섞어서 나오는 음식인 것 같다고, 자신도 어디선가 아이스크림 샐러드라는 것을 시켰는데 풀 비슷한 것이 나오기는 커녕, 그냥 아이스크림 세 종류가 덩그러니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뭐 그런 일화가 있었든 없었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과일을 맛있게 먹는 것이었다.
싱싱한 과일을 오리지날 상태로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같이 나온 요거트 드레싱에 과일을 찍어 냠냠 먹었다.
뭔가 안쓰러워 보였던 친구가 자기 햄버거를 조금 떼어줬는데 그것도 맛이 있었다.

하도 여자 웨이터가 시간을 질질 끌어서 식탁의 음식을 다 먹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택시를 타고 가느니 그냥 걸어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방향을 잡고 걸었다.
서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남자들의 일상적인 이야기가 그렇듯 별로 쓸모 있는 내용의 대화는 아니었을 것이다.

한 30분 정도 부지런히 걸으니 유니언 스테이션이 보였다.
더위에 충분히 지친 우리들에게 유니언 스테이션의 빵빵한 냉방이 매우 쾌적하게 느껴졌다.

버스 출발 시각까지는 약 2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워싱턴에 처음 도착했던 밤에 몰래 와이파이를 잡아 썼던 그 스타벅스 근처에 앉아서 짧게 대화를 나눴다.
출발까지 10분을 남기고 워싱턴에서의 여행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친구 C와 헤어졌다.
인턴을 하다가 여유가 있으면 언제 한 번 필라델피아를 방문하겠다고 했다.
그 때는 어떻게든 내가 그에게 멋진 노숙의 경험을 선사하리라 마음 먹었다.

는 농담이고 다시 셋으로 줄은 우리 일행은 버스를 타러 갔다.
우리가 타야 했던 망할 놈의 필라델피아 행 메가 버스에 문제가 생겨서 다음에 워싱턴으로 도착하는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버스를 탔다.
도무지 시간 개념이라고는 없고 손님들에게 한 마디의 사과도 없는 메가 버스 측 사람들을 보면서 친구 한 명은 미국은 이러다가 10년 내에 망할 것이라는 분노 섞인 말을 내뱉기도 했다.
서 있기에도 약간 힘들었떤 나는 10년이고 뭐고 좋으니까 빨리 당장 나를 버스에 앉혀달라는 생각을 속으로 한 10번쯤 반복했다.

원래 출발 시각보다 한 20분인가 30분 늦게 버스에 탑승할 수 있었다.
거의 반사적으로 가방을 의자 아래에 넣고 안정감 있게 안전 벨트를 채운 뒤 숙면에 빠졌다.
워싱턴에서 필라델피아로 가는 버스 역시 볼티모어를 들렀다가 갔다.
예상보다 좋은 교통 상황에 예정보다 더 빨리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다.

그 때 시각이 거의 8시 무렵.
엄밀하게 따지자면 모두가 타지이지만 내가 편하게 잘 수 있고 그나마 익숙한 도시에 도착했다는 것이 그렇게나 편안할 수가 없었다.

뉴욕을 가기 위해 이 장소를 떠났던 것이 아련하게 느껴질 정도로 긴 여행이었다.

많은 것을 보고 느낀 여행이었다.
일상적인 소회는 지난 여행기들을 참고하면 될 것이고, 작은 생각의 알갱이들이 모여 뭔가 거대한 줄기를 이룬 것이 있다면 앞으로의 여행기 ㅡ 를 빙자한 체류기 또는 생활기가 되겠지만 ㅡ 에 틈틈이 등장할 것이니 이 일련의 글을 열심히 읽어주시면 된다.

집으로 돌아왔다.
일단 씻는 것은 둘째로 하고 바로 저녁 밥을 차렸다.
같이 사는 두 친구들은 다른 저녁 약속이 있어 금방 나가봐야 했다.
성대한 저녁을 차리는 것은 개뿔이었고 그냥 라면에 햇반을 놓고 대충 저녁 식사로 먹었다.
한국에서였다면 이렇게 부실하게 저녁을 먹느냐는 이야기를 들어도 싸겠지만, 이제 막 여행을 마치고 집에 온 미국 관광객에게 이 정도면 상당히 호화스러운 저녁이 아닐 수 없었다.

김도 있었다.

드디어 뉴욕, 워싱턴 여행기가 일단락되었다.
위에서 짧게 언급했지만 다음 포스트부터는 지루한 듯 지루하지 않은 일상 이야기가 이어질 예정이다.
글을 이틀이나 쉬었으니 필력이 좀 올라올 타이밍도 되었겠다, 흥미로운 글들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