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부 26 : 아주 간만의 센터 시티 출동

| 2012. 6. 27. 01:40

이야기는 지난 목요일, 그러니까 2012년 6월 14일에 시작된다.
체 게바라가 태어난 지 84년이 되고, 막스 베버가 죽은 지 82년이 되던 바로 그 날은, 유펜의 마당발이라고 할 수 있는 친구에게서 무려 내 고등학교 동아리 후배가 이 곳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여차저차 이야기가 있은 뒤 그 새싹 같은 후배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지난 포스팅을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심심함과 소소함 면에서 사하라 사막과도 같은 생활에 이 정도 일이라면 본격적인 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차례 세차게 쏟아지는 소나기와도 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깔끔하게 준비하고 그 사람을 만나러 갔다.
이미 약속 장소로 정해져 있던 69가의 술집을 가는 길에 택시에 같이 태워 갔다.
기수를 따지자면 나와 학교를 같이 다닌 일이 없었기에 어차피 얼굴을 알아 볼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말로 처음 보는 얼굴이라 택시에서는 딱히 별 말을 건네지 않았었다.

술집에 도착해 자리에 앉자 마자 사실 관계가 드러났다.
그녀는 최근 들어 활발하게 OB 모임을 가지고 있는 동아리 후배는 아니었고, 그저 평범한 고등학교 후배에 불과했던 것이다.
만나기 전 날부터 하루를 꼬박 준비해 온 고등학교 동아리 드립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가 여간 아쉬운 것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리 넷은 꽤 즐거운 시간을 보냈더랬다.
신입생이지만 여름 방학에 학교에 남아 열심히 리서치를 하는 모습을 보니 역시 나의 모교가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고, 그냥 참 그 친구가 심심하게 지낼 것 같다는 동정심이 들었다.

뜨거운 동문 의식이 발동, 심심해 보이는 고등학교 동문 후배를 구원하겠다는 열정 하나만으로 나의 모든 귀찮음을 거스르고 저녁 약속을 잡았다.
장소를 확실히 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려 시내라고 할 수 있는 센터 시티 근처에서 먹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여행기를 뒤져 보니 마지막으로 시내에 나갔던 것이 5월 31일이었고, 실제 약속일이 6월 19일이었으니 얼추 3주 만의 외출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될 법하지 않나.

둘이 보기에는 조금 뻘쭘할 것 같아 시내에서 인턴을 하고 있는 나의 동거남 한 명을 이 놀라운 계획에 끌어들였다.
그의 퇴근 시각은 5시.
고등학교 후배는 랩에서 퇴근을 하고 센터로 나오면 한 6시를 넘겨서 도착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백수의 왕인 나는 5시까지 도심으로 나가 인턴의 왕을 만난 뒤, 남자 둘이서 오붓하게 시내를 걸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리서치의 여왕을 만나 대충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위대한 플랜을 내걸었다.
물론 모두 나 혼자만의 소박한 계획이었다.

일찌감치 씻고 준비를 마쳤다.
괜히 혼자 시내에 나간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묘했다.
콜드플레이의 신보 ㅡ 라기에는 나온 지는 꽤 됐지? ㅡ 를 들으며 길을 나섰다.

하지만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도덕적이지만은 않았던 내 과거에 대한 벌인지, 아니면 전생의 업이 이제서야 그 역할을 톡톡히 하는 건지 바깥의 날씨는 거의 지옥, 영어로는 헬에 가까웠다.
콜드플레이의 노래가 이렇게 덥게 느껴지는 것도 처음이었던 것 같았다.

내가 오버한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오른쪽 남자 뒷목 색을 보면 약간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겠다.

필라델피아를 관통하는 주요 도로는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편이다.
그렇다.
사진 속 사람들의 그림자를 보면 알겠지만 내가 걷기로 선택했던 길은 서쪽으로 떨어지는 햇살을 도저히 피할 수가 없는 길이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걸을 만하다고 자위하며 씩씩하게 걸었지만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머리 통에서 땀이 퐁퐁 솟아나기 시작했다.
7월이 되어 계절이 만연한 여름에 접어 들면 필라델피아도 상당히 더운 도시가 된다는데, 만약 이런 날씨가 계속 되는 것이라면 땀이 많은 편인 내게 꽤나 버거운 한 달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이 맞다면 이 날 필라델피아의 낮 최고 기온은 섭씨 35도였다.

혹자는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날이 더운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사람들의 그림자가 좌측으로 약간 기운 것을 보면 길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 방향으로 걸어서 건물의 그림자 발을 좀 받을 수 있지 않았겠냐고 말이다.
햇빛이라면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하는 내가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대로 가면 땀 범벅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직감한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길 오른편으로 건너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또한 녹록한 일은 아니었다.

참 이상하게도, 누군가 교묘하게 꼼수를 부린 것처럼, 길 오른편의 인도는 공사 중인 구간이 많았다.
위에 보이는 사진은 오른쪽으로 빠지는 인도가 폐쇄되어 있고 내가 가야 하는 직진 방향으로는 폭 50cm 정도의 여유가 있어 그냥 지나다니는 것 정도는 가능했지만 어떤 구간은 아예 다시 반대편으로 길을 건너서 가야 하는 곳도 있었다.
계속 지그재그로 길을 건너다가는 약속 시각에도 늦을 것 같고, 몸에서 나는 땀을 줄이는 데에도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을 것 같아서 쏟아지는 햇빛을 작은 등으로 받아내며 계속 길을 걸었다.

그렇게 20분을 열심히 걸으니 갑자기 시야가 막혀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필라델피아가 나름 중대형 도시였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하게 된 순간이었다.

오른쪽에 보이는 2000이라는 숫자가 이 곳이 20가 근처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빌딩의 규모에서 오는 위압감 비슷한 느낌만 따지자면 서울 종로의 그것에 비해 당연히 달리는 편이지만, 한산하기 그지 없는 캠퍼스 근처에서만 머물던 내게 필라델피아의 고층 빌딩이 주는 느낌은 상당히 신선한 것이었다.
물론 그 신선함의 절반 이상이 고층 빌딩이 드리우는 은혜로운 그림자와 빌딩 사이를 선선하게 왕래하는 바람 덕이긴 하지만 말이다.
콜드플레이의 음악도 이 때쯤 되니까 꽤나 괜찮게 들리기 시작했다.

특이할 만한 사항은 없었다.
약속 장소까지 부지런히 걸었다.

좌측 하단에 조그맣게 보이는 건물이 시청.

인턴의 왕과 만나기로 했던 장소, 더 정확히 하자면 인턴의 왕과 만나야 할 장소라고 내가 생각했던 그 곳에 갔는데 보여야 할 스타벅스는 어디에도 없었다.
조금 헤메다가 한 블럭 뒤로 돌아가서야 "그" 스타벅스를 찾을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기엔 조금 애매해서 건물 외벽에 바싹 붙어 와이파이를 포착, 퇴근만을 기다리고 있던 인턴의 왕에게 연락을 했다.
채 5분도 되지 않아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 둘이 함께 보낸 1시간 남짓의 시간은 정말 쓸모 없는 시간들이었다.
처음에는 밥을 어디서 먹을지에 대한 나름 건설적이고 창조 지향적인 대화를 나누었으나 미국에 처음 왔고 필라델피아 시내에도 거의 처음 온 것이나 다름 없는 25세의 남성 여행객과, 필라델피아에서 공부를 한 지는 한참 되었으나 도무지 시내에 나와본 적이 없던 25세의 남자 유학생의 머리에서는 단 하나의 제대로 된 아이디어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서부가 인앤아웃 버거(In-N-Out burger)이라면, 동부는 셰이크 섁(Shake Shack)이라는 그 햄버거 체인점 ㅡ 필라델피아에 생긴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ㅡ 을 들러도 봤지만 딱히 성과는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오늘의 만남 자체가 망할 조짐이 보였다.
포기와 선택이 빠른 남자인 내가 후보군으로 올라온 녀석들 중에 그냥 아무 레스토랑을 골랐다.
선정의 변, 어떤 구체적인 기준이 있었는가 따위는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일단 장소가 정해졌으니 조금 느긋해진 우리 둘은 남은 시간 동안 더위를 피하기 위해 이런 저런 옷 매장을 들락거렸다.
스포츠 용품 매장 비슷한 곳과 H&M, 자라 매장을 들어갔는데 옷 가격은 한국과 비교했을 때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았다.
눈 대중으로만 봤는데도 내 왜소한 몸에 맞을 만한 옷은 눈에 띄지 않았다.
어차피 쇼핑을 할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매장을 둘러 보는 것조차 지루해져서 그냥 좀 일찍 레스토랑에 들어가버렸다.
피에트로스 피자(Pietro's pizza)는 이름에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듯이 이탈리안 피자 전문점이다.
파스타 하나와 샐러드 하나, 그리고 피자 한 판을 시켜 두고 후배를 기다렸다.
예정보다 5분인가 10분 정도 늦은 시각에 파릇파릇한 92년생 꼬마가 가게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무엇이 피자고 무엇이 파스타며 무엇이 샐러드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좌측에 있는 음료는 내가 시킨 맥주.

애초에 가격 자체가 센 곳이 아니었기에 맛도 막 끝내주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한 잔 맥주와 함께 즐거이 배를 채우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첫 만남의 술자리가 다소 뻘쭘했던 자리였다면 이 날의 저녁 식사는 그 뻘쭘함의 벽을 허무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된 자리였다고 평할 수 있겠다.
나와 후배 사이에는 고등학교가 같다는 공통점이, 후배와 인턴의 왕 사이에는 대학교가 같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워낙에 그 연배가 달라서인지 그 공통점을 바탕으로 공통 화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자연스럽게 화제는 인류 최초이자 최후의 떡밥인 이성 이야기로 번졌고 우리는 각자의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아주 일상스럽게 풀어댔다.
디테일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그저 대화 참여자들이 뭔가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그런 대화.
나름 웃고 떠들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남은 피자 두 조각을 싸들고 계산을 한 뒤 가게를 나왔다.

나오기 전에 의논을 했지만 결국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한 우리는 밖으로 나와서도 무엇을 할까 고민하면서 상당히 걸어다녔다.
햇빛은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여전히 공기의 온도는 무더운 편이라 걸으면 걸을수록 자꾸 체온이 올라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요거트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갔으나 사람이 너무 많아 매장에서 먹을 수 없음이 확실해 플랜 비를 골랐다.
가장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를 찾아 들어갔다.
미국 특유의 빵빵한 냉방이 아주 쾌적하게 느껴졌다.
커피를 시키고 자리에 앉아서 여유로움을 즐겨보려 했는데 종업원이 커피를 다 건네주고 나서야 5분 뒤에 문을 닫는다는 이야기를 해주더라.
무슨 점주도 아니고 우리 같은 양민에게 커피 세 잔을 더 파는 것이 그 종업원에게 무슨 이익이 얼마나 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참 일어나기 힘든 상황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시킨 커피를 무르기도 뭐해 정말 말 그대로 딱 5분만 앉아 있다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
남자 둘만 있었다면 충분히 집까지 걸어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우리가 사는 곳보다 더 먼 곳에 사는 새싹 같은 후배를 위해 택시를 탔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다닌 뒤에야 자신은 사실 걷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한다는 개인의 취향을 밝힌 후배의 기지가 돋보이는 순간.

그녀가 살고 있는 건물 앞까지 바래다주고 남자 둘이 오붓하게 집으로 돌아오니 해가 거의 저물어가고 있었다.
꺼지지 않는 배를 통통 치면서 빈둥거리다가 얌전히 잠에 들었다.

사실은 이 날 밤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그냥 배나 통통 치다가 새벽쯤이 되어 잠에 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