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부 29 : 탬파베이의 남자, 야구장에 가다 (3)

| 2012. 7. 7. 00:07

야구장을 가기 전, 대부분의 정신력을 숙취를 해소하는데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상당히 지끈거렸지만 억지로 일어나 밥을 먹고 ㅡ 마침 다른 친구가 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애처로운 목소리로 부탁하여 손쉽게 해장식을 겟할 수 있엇다 ㅡ 쉴 새 없이 물을 마시고 이야기를 하며 술 기운을 날려 보내려 했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차도가 보이지 않아 조금 걱정이 된 적도 있었으나 야구장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설 무렵에는 다행히도 90% 이상은 풀린 듯한 느낌이었다.
대충 씻고 대충 나갔다.
지난 날엔 있었던, 어린 아이에게나 어울릴 만한 긴장감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긴, 어떤 의미에서 보면 나는 여전히 탬파베이 경기 관람에 있어 첫 경험 전의 그 순결함을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었으나 한 번 헛탕을 친 마음이 예전과 아주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게 맛있는 점심 식사를 제공해주었던 친구는 이를 두고 심지어 내가 야구를 보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표현을 할 정도였으니, 이 정도면 내가 그 날 얼마나 무기력해보였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매 번 가던 같은 길 ㅡ 스퀼킬 강변을 따라 남쪽으로 빠져 고속도로를 타는 루트 ㅡ 대신 시내를 뚫고 경기장에 갔다.
보통 사람들이 필라델피아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 중의 하나인 필리 치즈 스테이크를 파는 곳 언저리도 지나가긴 했는데 딱히 동네 자체가 특이할 만한 것이 없어서 사진 따위는 찍지 않았다.
생각보다 자주 신호에 걸리는 듯 했지만 의외로 택시비는 비슷하게 나왔다.
덕분에 우리만의 베팅 라인을 짜는 시간을 벌 수도 있었다.
1회까지 양 팀 합쳐 안타가 세 개가 나느냐, 5회까지 필라델피아의 선발 투수 클리프 리가 안타를 치느냐, 8회까지의 승리 팀은 누구이냐가 각각의 웨이포인트였고 나는 첫 번째는 세 개 이상, 두 번째는 그렇다에, 세 번째는 당연히 탬파베이에 걸었다.
경기가 우천으로 지연이 되면서 선발 로테이션이 꼬여버린 탬파베이가 계투를 선발로 내세우는 강수를 뒀기 때문에, 그리고 더블헤더 첫 경기가 투수전으로 갔기 때문에 우리가 보러 가는 경기의 양상은 전반적으로 타격전으로 가게 될 느낌이었다.
클리프 리는 이 날 경기까지 2할8푼6리의 타율을 기록 중이었는데 수학적으로 따져 보자면 ㅡ 5회까지 두 번의 타석을 얻는다는 가정 하에 ㅡ 두 번째 베팅 라인은 확률 상으로 반반이었다.
8회까지의 승리 팀으로 탬파베이를 고른 이유에 대해선,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지난 날의 표를 들고 가니 그대로 입장이 되었다.
자질구레한 경기장 사진 같은 것은 중복이라 다시 찍지 않았던 모양이다.
카메라에 없더라.

날씨는 상당히 무난한 편.
이대로라면 경기를 보는 것에 지장이 없었다.

표가 같았으니 당연히 자리도 같았다.

순조로운 진행이었다.
지난 날에 봤던 것과 같은 광고를 보고, 같은 선수 소개 영상을 보고, 비슷한 수준의 환호와 야유를 들었다.
데자뷰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이건 그저 비슷한 두 개의 경험에 불과했다.
경기 시작이 다가오자 탬파베이 덕아웃이 선수들로 가득 찼다.

비가 오던 그 날의 사진과 비교할 때 느껴지는 활력의 차이란 엄청난 것이다.

이 쯤에서 애를 먹었던 것이 있다면 가지고 갔던 디지털 카메라가 갑자기 메모리 카드를 인식하지 못한 사태를 말할 수 있겠다.
참 신기했던 게, 전원을 켜자 마자 인식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고, 사진 한 장을 딱 찍자 마자 그 때부터 느닷없이 메모리 카드를 포맷하라는 메시지가 계속 뜨더라.
퇴색된 기억이긴 했지만 어쨌든 저번 야구장 방문의 사진들을 채 옮겨놓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메모리 카드 포맷이라는 강수를 함부로 둘 수는 없었다.
내장 메모리를 빽빽하게 사용해 ㅡ 그래봤자 얼마 되지도 않아 사진이 많지는 않다 ㅡ 사진을 찍는 방법밖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여담이지만 이 날 저녁에 집에 돌아간 나는 인터넷을 뒤져 메모리 카드 복구 기능을 시전해봤고, 거기서 셀카 UCC 야동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이치를 깨우치기에 이르렀다.
내가 셀카 야동의 매니아라는 사실을 얼떨결에 밝혀버린 것은 아니고, 단지 몇 년 전의 사진들까지 복구가 된다는 점에 놀랐을 뿐이다.
보통의 사람들이 이용하는 컴퓨터의 기능이란 게 얼마나 피상적인 것에 불과한지, 소위 "전문가들"의 컴퓨터 사용은 일반 사용자들의 그것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 것인지 깨닫는 기회이기도 했다.

각설하고, 드디어 야구가 시작했다.
계투를 선발로 내세운 탬파베이의 강수와 여전히 시즌 첫 승을 노리고 있던 클리프 리의 불꽃 튀는 맞대결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따위는 당연히 안중에도 없었고 우리 셋에겐 그저 1회에 안타가 세 개 이상 나느냐 마느냐가 당장의 관심사였다.
도박이란 것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그 규모와 의미는 차치하고서 말이다.

제발 안타를 쳐줘. 꼭 세 개 이상이야.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1회 안에 안타가 3개나 난다는 것은 당연히 힘든 일이었다.
첫 베팅은 아주 싱겁게 끝이 나버렸고 내기에서 진 나와 다른 친구가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 맥주를 사왔다.
ID 때문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멋진 친구의 배려 ㅡ 여기서 "멋진"이 "친구"를 수식하는 것인지 "배려"를 수식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ㅡ 로 친구가 실랑이를 해결하기로 했고 나는 경기를 더 볼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2회 초가 되었을 때 레이스가 점수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볼넷과 연속 3안타를 몰아쳐 3점을 선취점으로 뽑았다.

꼭 쿠키 몬스터를 연상시키는 저 캐릭터는 필리스의 마스코트. 관객석에 난입해 바보짓을 하는데, 생각보다 즐거웠다.

4회 초 탬파베이의 공격이 끝날 때까지는 경기가 무난한 승리로 끝날 것 같았다.
하지만 3회 말에 교체되어 마운드에 서게 된 탬파베이의 두 번째 투수 웨이드 데이비스가 역시나 볼넷과 안타 두 개를 허용하며 2점을 내줘 경기는 상당한 긴장감 속에 진행되게 되었다.
4회 말 공격까지 총 두 번을 타석에 들어선 클리프 리는 아쉽게도 안타 하나를 뽑지 못했고 아까 맥주를 사왔던 친구와 나는 다시 뒤로 올라가 집어 먹을 만한 것을 사왔다.

소근소근.

미국도 한국의 사정과 크게 다르진 않아서, 야구장 물가가 시중 물가보다는 확실히 비쌌다.

마운드에 선수와 감독들이 모여 있을 때 외야수들은 저렇게 나름의 회합을 가진다.

왜 갑자기 별로 관련도 없는 사진들을 올리면서 중간에 별로 도움도 안 되는 짧은 내용들을 올리고 있냐면, 뭔가 사진의 순서가 엉켜버렸기 때문이다.
재미 있는 기억이긴 했지만 일단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꽤나 오래 전에 일어난 일들이다.
왜 별로 궁금하지도 않는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역시나 편집상 뭔가 말은 필요했는데 딱히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래 사진에 보이는 것들을 사왔다.
맛은 뭐, 그냥 그랬다.

무엇을 먹었는지 보여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그릇에 남아 있는 것들이 별로 없다.

1점 차이로 팽팽하게 진행되던 경기는 6회 초 탬파베이 공격 때 다시 양상이 바뀌었다.
탬파베이가 2점을 더 추가하며 5:2로 달아났다.
이어지는 6회 말엔, 필리스가 플라시도 폴랑코의 3루타로 1점을 내면서도 다시 무사 3루의 기회를 잡았지만 그 이후 추가 득점에 실패하는 굉장히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며 스코어를 5:3으로 만드는데 그쳤다.
필리스의 팬인 친구는 이 때 이미 경기에 대한 기대를 접어버렸다고 했다.
하긴 무사 3루라는 상황에서 득점에 성공하지 적이 야구 역사를 통틀어서 대체 몇 번이나 되었겠나.

경기가 후반부로 접어 들면서 어느 덧 필라델피아에 밤이 찾아왔다.

역시 야구 경기는 밤에 보는 것이 제 맛이다.

8회 초 공격에서 총 다섯 개의 볼넷을 얻어낸 탬파베이는 2점을 더 달아나며 승기를 완전히 잡았다.
아무리 요즘의 필리스가 부진을 한다고는 했지만 한 회에 볼넷을 5개나 줄 정도로 팀이 망해버렸나 싶었다.
나 같은 탬파베이 팬의 입장에서는 볼 만한 경기였겠지만, 이 날 경기장을 찾은 4만여 필리스 팬의 입장에서는 여간 실망스러운 경기력이 아닐 수 없었겠다.

경기는 무난하게 9회 말까지 흘러갔다.

이해하면_무서운_사진.JPG

9회 말 마지막 투수 타석에서 짐 토미가 ㅡ 이번 필리스와의 시리즈 첫 경기에서 역전 홈런을 뽑아낸 그 짐 토미가! 대타로 타석에 들어섰다.
고집스럽게 당겨 치는 타자들에게 탬파베이가 자주 써먹는 극단적 쉬프트가 발동되었다.
3루수부터 유격수, 2루수를 차례로 한 자리씩 밀어내 바로 위 사진과 같은 말도 안 되는 수비 포지션을 갖췄다.
아쉽게도(?) 짐 토미가 삼진을 당하며 저 마법의 진이 어느 정도의 효력이 있는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나름 탬파베이만의 야구도 볼 수 있던 즐거운 마무리였다.

최종 스코어 7:3.
무난한 승리였다.

클리프 리는 결국 이 날도 승리를 따내지 못했다. 최근에 마침내 시즌 첫 승을 올렸다는 뉴스를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특이한 일은 없었다.
저번과는 다르게 환승하는 지하철이 상당히 늦게 오는 바람에 오는 길에 조금 지쳐버렸다는 것이 그나마 평범하지 않은 일이랄까.

10년 만의 만남치고 3시간 20분 남짓은 짧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내가 여지껏 응원했던 팀의 활약을 실제로 봤다는 것은 여간 훈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필라델피아의 병신력이 큰 기여를 하긴 했지만 어쨌든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날아 온 작은 팬에게 승리의 기쁨까지 안겨주었다.
과연 이 앞으로 언제 이들의 경기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생각을 하니 당장 복학해서 각종 과제 및 시험 스트레스에 치일 내 미래가 더 걱정스러워졌다.
하지만 여행객에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정말 말 그대로의 사치다.
뭐랄까, 정확히 대응되는 비유는 아니겠지만 밥을 먹으면서 나중에 또 배고파질 것을 걱정한다거나 샤워를 하면서 나중에 또 땀을 흘리게 될 것을 걱정하는 것만큼이나 한심한 사치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금방 털어버리고는 꿀잠에 빠졌다.
다시 탬파베이 경기 직관을 가는 날까지, 오래 기억에 남을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