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부 27 : 탬파베이의 남자, 야구장에 가다 (1)

| 2012. 7. 2. 10:44

나와 탬파베이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시작되었는가는 가장 최근에 올라온 이 글을 확인하면 될 테고, 현재 그 관계가 어느 정도까지 진전되었는가가 궁금하다면 이 카테고리의 글들을 확인하면 된다.
둘 중 어느 것도 확인하기 귀찮아 할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알기에 세 줄 요약을 하자면, 1번은 내가 2003년부터 탬파베이 레이스 ㅡ 당시에는 데빌 레이스 ㅡ 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2번은 10년 동안 그 짓을 계속 하고 있다는 것이며, 3번은 글쎄 잘 모르겠으니까 그냥 두 줄 요약이라고 하면 되겠다.

이번 미국 일정의 첫 시작이었던 비행기 표 발권을 마치자 마자 MLB 공식 사이트의 일정을 체크했다.
애초에 별 목적이 없는 여행이었기에 당장 떠오르는 계획이라고는 필라델피아에서 레이스 경기를 보는 것 정도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인터리그 시즌에야 성립이 가능한 필리스와 레이스 시리즈가 내 미국 일정에 끼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최초인 동시의 최후가 된, 한국에서 세운 유일무이한 미국 계획이 정해졌다.
만약 내가 이 시리즈를 보러 가지 못한다면 두 달이 넘는 미국 체류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 된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면서 말이다.

표를 구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지난 번에 NBA 플레이오프를 보러 간 적이 있어서 티켓 구매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도 알고 있었고, 경기장의 위치 또한 머리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할 일은 그저 금토일로 예정된 시리즈 중 어느 경기를 보러 가느냐를 정하는 것뿐이었다.
선발 투수 로테이션이라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불규칙성을 띨 수밖에 없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나는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느긋하게 기다렸다.
지난 주 초가 되어 주말 로테이션이 거의 확정적으로 발표되었을 때 내게 주어진 선택은 금요일과 일요일로 줄어 들었고 당시의 날씨를 봤을 때 일요일 낮 경기는 스태미너 소모가 너무 많을 것으로 예상, 금요일 저녁 경기를 보는 것으로 계획을 마무리 지었다.
선발 투수 매치업은 이번 시즌 널뛰기 피칭을 보여주고 있는 제임스 쉴즈 대 류현진보다 승운이 없는 비운의 투수 클리프 리였다.
승리를 확신할 수는 없는 매치업이었으나 내가 가는 날이라면 이기리라 생각하고 자리를 골랐다.
외야의 아주 값싼 자리는 상당히 저렴한 편이었으나 기왕 보러 가는 야구인데 관람에 불편한 자리에 앉고 싶진 않았다.
홀 오브 페임 클럽(Hall of fame club), 우리 말로는 명예의 전당 클럽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일종의 특별석을 골랐다.
사실 특별석이래봤자 아주 특별한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고 그냥 나의 동거인들이 지난 번에 갔던 자리와 비슷한 자리고, 그 당시 관람이 썩 괜찮았기 때문에 고른 자리였다.

야구 관람에 대한 나의 기대는 생각보다 큰 것이었다.
심지어 25살이나 먹은 다 큰 어른이, 전 날 밤에 괜히 설레는 마음에, 잠을 이루기가 쉽지 않을 정도가 아니었겠나.
하긴 10년 동안이나 팬이었으면서 직관 한 번 해보지 못한 사람이 첫 직관을 눈 앞에 두고 있다니, 그 흥분감은 첫 경험을 눈 앞에 둔 숫총각의 그것보다 컸으면 컸지 작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드디어 대망의 금요일 아침이 밝았고 나는 오전부터 괜히 분주하게 ㅡ 나의 순수한 소년 같은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또 다른 포인트 ㅡ 움직였다.
금요일이지만 어김 없이 인턴 근무를 나가야 하는 한 친구의 퇴근 시간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설레는 소년의 마음이 그 시간을 얼마나 길게 느꼈는지는 알아서들 생각해 보길.
어쨌든 그 때는 오고야 말았고 이미 목욕 재개를 하고 집을 떠나기만을 기다리던 나는 가방에 정성스레 짐을 챙겨 친구들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상당히 후덥지근한 날씨였지만 하늘이 흐린 편이라 경기를 보는데 큰 지장은 없을 것 같았다.
출발하기 전에 지하철을 이용해 가자는 이야기도 잠깐 나왔으나 내가 경기장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둘러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기에 일단 편도 교통 수단은 택시로 정했다.

택시를 타고 가면서 관전의 재미를 더해 줄 우리 셋끼리의 베팅(betting) 라인을 결정했다.
각각 어떤 기준을 제시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를 제외한 두 친구는 필라델피아의 우세를 점쳤고, 당연히 나는 탬파베이의 우세를 예상했더랬다.
올드 팬의 자존심을 두고 묘한 신경전을 벌이다 보니 어느 새 경기장에 도착해 있었다.

지난 번엔 멀리서 보고 지나쳤던 시티즌스 뱅크 파크(Citizens Bank Park).

필리스 팬들이 가득한 이 곳에서 거의 혼자 레이스 모자를 쓰고 다니려니 기가 죽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상당히 주눅이 들어서는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다니기가 힘든 정도였는데, 선수들에게 있어 홈 경기의 편안함이란 어떤 것인지, 그것에 앞서 홈 팬이 팀에게 의미하는 것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간단하게 옷 검사와 가방 검사를 받고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경기장은 내부의 필드가 지하로 파여져 들어간 구조였다.
따라서 1층에서 바로 접근했음에도 불구하고 야구장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주변의 번잡한 것들 ㅡ 야구장에서 번잡한 것이라면 뻔하게도 먹을 거리를 파는 사람들과, 그 먹을 거리를 사려는 사람들이겠다 ㅡ 따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탬파베이 선수들이 필드에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장 관중석을 관통해 들어갔다.

이보다 멋진 사진을 보고 싶다면 구글 검색을 추천. 좌측 아래에 반가운 탬파베이 팬들이 보인다.

위 사진의 좌측 전경, 즉 외야쪽 모습은 아래와 같다.

타석에서는 타격 연습이 한창이었다.
생각보다 프레스가 많이 보인다 했더니 마쓰이가 공을 치고 있었다.
불현듯 평범한 미국 사람들의 눈엔 나 역시 마쓰이의 영입으로 급 탬파베이에 관심을 가지게 된 평범한 필라델피아의 일본 유학생 중의 하나로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티셔츠에 나는 밴드왜거너가 아니며 10년차 팬이라고 써붙이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말이나 동해 표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강조하며 나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라고 어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냥 있었다.

확인하기 힘들겠지만 저기 저 사람, 마쓰이가 맞다. 슬프게도 이 날 마쓰이는 선발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외야에서는 공 주고 받기, 초등학교 때 무슨 와리가리인가로 불렀던 그 활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와리가리에 전념하고 있는 탬파베이 선수들.

비록 필리스가 전미에서 관중 동원력이 가장 센 구단이라고는 하지만 레이스 팬도 종종 눈에 띄었다.
내가 처음에 들어갔던 게이트가 3루쪽 게이트라 바로 근처에서는 반가운 남색 톤의 티셔츠와 모자를 쓴 사람들이 꽤 있는 편이었다.
잠시 상식을 짚고 넘어 가자면, 야구장에서 어웨이 팀 ㅡ 이번 시리즈에서는 탬파베이 레이스가 필라델피아로 오는 것이므로 어웨이 팀은 탬파베이 레이스가 되겠다 ㅡ 의 관중석은 언제나 3루쪽이다.
뭐 그냥 그렇다.

찍어놓고 보니까 왜 이렇게 없는 것처럼 보이는가.

대충 구경이 끝났다.
하지만 혹시나 이 날 경기에서 졌을 때 혼자라도 싼 표를 사서 경기장에 다시 올 마음이 있었던 나는, 외야쪽 자리까지 한 번 둘러보자는 제안을 했고, 어차피 별로 할 것도 없던 친구들이 거기에 따라주었다.

이것이 대충 외야에서 보이는 필드의 모습. 내가 앉은 자리는 정면에서 약간 좌측으로 빠지는 2층 자리였다.

외야로 나오자 시티즌스 뱅크 파크의 명물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바베큐 집이 보였다.
이야기의 출처는 알 수 없다.
야구장에 오기 전에 걸쭉한 라면 한 사발을 들이킨 나는 일단 빠졌고 저녁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한 친구 둘이 먹는 것을 얌전히 지켜봤다.

줄이 좀 길어보였으나 줄을 서 있을 때 선주문을 받아 처리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빠지는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식탐의 억제가 잘 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는 몇몇 미국인들의 식욕을 자극하기 위해 바로 눈 앞에서 소시지를 구워대고 있었다.
내게는 그렇게 큰 자극이 되진 않았고, 그저 고기를 굽고 있는 사람들이 더위라는 악마와 얼마나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했다.

식탐의 억제가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는 몇몇 방문객들을 위해서 준비한 사진도 있다.

대충 근처 스탠드에 서서 친구들의 저녁 식사를 기다렸다.
레이스 외의 팀이라면 별로 지식이 없는 나였지만 그래도 메이저리그를 보러 왔다는 생각에 아는 이야기 모르는 이야기 다 합쳐서 신나게도 떠들어댔던 것 같다.
문득 고개를 드니 2008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적힌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이 보였다.
2008년 가을.
팀 창단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던 레이스가 극적으로 월드시리즈에 진출,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만나 맥없이 무너지며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이 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그 해.
동시에 필리스 팬들에겐 수십년간의 갈증이 풀렸던 바로 그 해.
나 같은 올드 레이스 팬에겐 갈증이 해소되는 동시에 아쉬움이 남는 그런 애증의 해였다.

정면에 보이는 빨간 깃발 두 개 중 오른쪽 것이다. 녀석은 애증 섞인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펄럭~펄럭~대고 있었다.

필드에서는 가벼운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2012년 6월 22일은 나름 필리스에서 준비한 이벤트가 있는 날이었는데, 그 이벤트의 일환으로 지역에서 왕년에 잘 나갔던 어떤 싱어 팀이 히트 곡 몇 개 부르고 상패를 전달해주고 하는 뭐 그런 그런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주목했던 것은 그들의 노래보다는 믿을 수 없이 선명한 화질을 보여주는 전광판이었다.
어두워져가는 하늘의 깊은 무채색과 대비되어 명도와 채도가 더 부각되었겠지만 저런 하이 테크놀로지가 있다는 것이 정말 놀라울 따름이었다.

먹을 것도 다 먹었겠다, 슬슬 우리의 자리로 갈 시간이었다.
바로 계단을 찾아 2층으로 올라가 티켓을 보여주고 자리에 앉았다.
비싼 자리는 아니었지만 아주 싼 자리도 아니라 경기를 보기에 꽤나 괜찮은 시야가 확보된 곳이었다.

경기 시작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10년 만의 첫 직관이 눈 앞에서 이루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레이스 선수들이 직접 던지고 치고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니, 미국에 온 보람이 이보다 더 크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