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부 28 : 탬파베이의 남자, 야구장에 가다 (2)

| 2012. 7. 3. 04:51

그런데 경기 시작 시각인 7시를 조금 남겨 두고 하늘이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덥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시원하지도 않았던 공기가 몰라 보게 시원해져 있었다.
어느 새 하늘을 뒤덮어버린 먹구름 저 너머 어딘가에서 번개가 치면, 이내 꽈르릉 하는 천둥 소리가 잇따르곤 했다.
하루 종일 별로 불지도 않던 바람이 쌩쌩 불기 시작했다.

빗방울만큼은 떨어지지 않길 바랐지만 ㅡ 따지고 보면 이런 상황에서 비가 안 내리길 바랐다는 게 말도 안 되긴 하다 ㅡ 딱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빗방울이 뚝뚝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충분히 참을 수 있는 비였다.
야구 경기라는 것이 일단 한 번 경기를 시작하면 정말 폭우가 내리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는 법이기에 일단 경기는 꼭 시작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동향을 살피면서 경기 시작을 기다렸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보고 싶지 않았던 방수막이 필드 위로 깔리기 시작했다.
10년 만에 찾아온 내 첫 직관 기회가 갑작스러운 비로 인해 연기되는 순간이었다.

솔직히 하늘 색이 야구를 하기엔 좀 무리수가 있어 보이기도 했다.

이제 관건은 덕아웃이었다.
한 10분~20분 기다리다가 시작할 정도라면 덕아웃의 선수들이 다시 라커룸으로 들어갈 일은 없을 터.
그러나 매정하게도 몇 분 지나자 탬파베이 덕아웃의 선수들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야구 선수라고는 한 명도 없는 탬파베이 덕아웃.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아 지붕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었던 우리는 어떻게든 자리를 유지하려고 했으나 어느 순간에 참을 수 있는 정도 이상으로 내리는 비를 이기지 못하고 뒤쪽 복도로 올라갔다.
그리고 우리가 복도로 올라간 뒤부터 빗줄기는 말도 못 하게 굵어져, 어느 순간에는 장대비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소나기라는 단어보다는 스콜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게 어울리는, 국지성 집중 호우였다.

그나마 선선한 공기를 맞으면서 비 구경이라도 하고 있을랬더니 안내 방송에서 낙뢰 사고 발생 위험이 있으니 관중들은 모두 건물 내부로 들어가라는 부탁의 형식을 띤 명령을 내렸다.
어쩔 수 없이 홀 오브 페임 클럽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마실 것이라도 사오자는 이야기가 나와 1층에 내려갔다 오기로 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2류 재난 영화에 나올 법한 그것과 아주 흡사했다.

BGM을 깔아주자면 "와글와글와글와글와글와글와글!".

뭐 우리라고 딱히 다른 수단은 없었다.
경기장에서 기다리는 것과 이대로 포기하고 집에 가는 두 가지 선택이 주어지긴 했지만 당장 같아서는 전자를 고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경기장을 떠났을 경우 이대로 입장료 값을 날리는 셈이 되는데 비슷한 가격을 내고 또 야구장에 오기는 내 예산이 빠듯했다.
야구장 직원들에게 언제쯤 경기가 재개될 것인지, 아니 최소한 언제쯤 공식 발표가 나올지 물었으나 한낱 인간에 불과한 그들도 하늘의 뜻을 예측하긴 힘들었다.
그래도 여러 명에게 물어본 결과 대충 1시간을 기다리면, 그러니까 7시 5분이 원래 경기 시작 시각이었으니 8시 근처쯤이 되면 무슨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1시간이면 일단 기다릴만 했다.
자리를 잡고 앉기 위해 다시 홀 오브 페임 클럽에 올라갔다.

처음에 비를 피해 나올 때는 그나마 한산했던 그 곳은 불과 10여분 사이에 난민촌으로 변해 있었다.

사실 오른쪽으로 뻗은 복도가 진짜 난민촌 뺨치는 수준이었는데 도저히 사진 찍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셋이서 아무 주제나 잡고 이야기를 했지만 갈수록 떡밥거리가 떨어졌고 결국에는 셋 다 각자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와이파이도 터지지 않는 공간에서 나는 며칠 전에 우연히 받은 스도쿠를 즐겼고, 나머지 둘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다.
복도 위에 달린 TV에서는 다른 야구 경기들 중계가 나오고 있었다.
정황을 보아 하니 미국 동부에서 열리는 다른 경기들 모두가 우천으로 중단된 상황이었다.
이 곳 필라델피아 상황도 TV에서 돌아가면서 보여줬기 때문에 딱히 다른 곳을 돌아다니면서 상황을 파악할 필요는 없었다.
화면으로 보이는 비는 정말 무자비하게도 내리고 있었다.
경기가 취소되고 연기되는 어두운 미래가 바로 코 앞까지 바싹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 생각했던 8시가 되었지만 상황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비는 여전히 주룩주룩 ㅡ 현실을 십분 반영하면 쥬!륙!쥬!륙! ㅡ 내리고 있었고 간간히 천둥 번개도 이어졌다.
그나마 고무적인(?) 뉴스가 있었다면 다른 동부의 경기 중 보스턴에서 있던 경기와 뉴욕에서 있던 경기가 재개되었다는 것.
지리적으로 필라델피아가 보스턴과 뉴욕 사이에 끼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 곳의 비 구름도 조만간 걷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도 좀이 쑤셔서 두터운 콘크리트 지붕으로 막혀 있는 관중석쪽으로 나가 있었다.
필라델피아에 와서 이렇게 큰 비를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사람들은 각자 오늘의 날씨와 경기 전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친구 하나는 연식이 상당히 되어보이는 할아버지 직원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믿을 수 없게 큰 천둥 소리가 고막을 강타했다.

너무 갑작스럽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놀랄 수조차 없었다.
원래는 하잘 것 없는 지역 광고나 틀고 있던 전광판이 갑자기 블루 스크린 형식으로 바뀌면서 현재 경기장 내부에 파이어 알람이 작동했으나 동요하지 말아달라는 메시지가 떴다.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야구 팀이 없기에 야구장에 자주 가지는 않지만 어쨌든 간간히 야구 관람을 하는 사람으로서 우천 연기가 되는 경기에 온 것도 처음이었지만, 내가 현재 들어가 있는 건물에 불이 나는 건 또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불이 어디에 붙었든 비가 이런 식으로 내리면 진화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친구와 나누던 찰나에 스크린에 다시 메시지가 뜨면서 방금 울린 파이어 알람은 오작동에 의한 것이라며 뭐 쏘리 포 유어 인컨비니언스(sorry for your inconvenience) 따위의 문구가 나타났다.
야구 경기 한 번 보러 왔다가 무슨 산전수전을 다 겪고 가는 듯했다.

번개의 해프닝이 있은 뒤로 빗줄기가 유난히 약해졌다.
이대로라면 경기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안내 방송에서 8시 45분부터 다시 경기를 시작한다는 살면서 들은 안내 방송 중 3위 안에 드는 즐거운 뉴스가 경기장 내부에 울려 퍼졌다.
이 정도면 기다린 보람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우리 세 일행은 잽싸게 관중석에 앉았다.
비는 그 줄기가 약해진 것이 아니라 아예 멈춰 있었다.
여직원은 친절하게 우리 자리의 물기를 제거해주었다.
필드의 직원들도 슬슬 방수포를 걷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방수포에서 걷어낸 물의 흡수가 굉장히 빠르길래 인조 잔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부심 강해 보이는 골수 필리스 팬으로부터 천연 잔디 밑에 특별히 설치된 배수 시스템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비로 인해 싹 빠졌던 관중석에도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금요일 밤에 야구를 보러온 사람들이라 별 다른 계획을 잡지 않았기 때문인지 지난 1시간 30여분 동안 경기장을 떠난 관중은 거의 없어 보였다.

슬금슬금 들어오는 사람들. 비가 갠 뒤라 그런지 공기가 아주 맑고 신선했다.

선수들도 덕아웃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는 분위기였다.
8시 45분에 경기가 시작하면 아무래도 집에 가는 길이 막막해지겠지만 그런 걸 걱정할 겨를은 없었다.
일단 당장 내 눈 앞에서 레이스의 경기가 펼쳐진다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조 매든 감독의 모습.

경기 재개 준비가 완료되어 갔다.
필리스 선수들이 필드로 나와 공을 주고 받으며 몸을 풀었다.

밤에 바라 보는 경기장 전경은 꽤 느낌 있었다.

한동안 일에서 손을 놓고 있던 프레스진도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포츠 기자만큼 괜찮은 상팔자도 없는 것 같다.

드디어 전광판에서 탬파베이 레이스 선수들을 소개했다.
어웨이 팀이라 초라한 디스플레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선발진 한 명 한 명의 이름과 포지션을 또박또박 읽어주었다.

흑흑, 드디어 저 선수들을 내 눈을 보게 되다니.

정말 기가 막히게도 필리스 선발진까지 소개가 된 후에 비는 다시 내리기 시작했고, 경기는 다시 연기가 되었으며, 필드에는 다시 한 번 방수포가 깔렸다.
눈 앞에 펼쳐진 모세의 기적과는 정반대의 상황 ㅡ 따라서 이를 기적으로 부르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리라 ㅡ 그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며 나는 초조함과 좌절스러움, 미안함 등이 범벅된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재채기가 나오려다가 말다가 나오려다가 말다가 결국 안 나와버리는 그런 느낌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그나마 천둥과 번개가 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게 돌아오는 장점은 꼭 경기장 내부로 들어가지 않고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서서 상황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날씨 체크를 하지 않은 잘못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것을 떠나 경기가 한 번 연기되었다가 재개되었다가 다시 연기되는 상황을 그 누가 예측할 수 있었으랴.

상당히 실망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천재지변을 인간의 힘으로 이길 수는 없는 법이었다.
지나가던 맥주 파는 아가씨를 불러 맥주 캔 하나를 사먹었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시원한 맥주의 목 넘김 한 번에 부정적인 감정을 하나씩 담아 털어버렸다.

밀러 라이트라는 사실을 감추긴 힘들겠다.

결국 밤 10시가 되어서야 경기가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인터리그가 아니면 맞붙을 수 없는 두 팀의 시리즈라 그런지 바로 일요일에 더블헤더 일정을 잡았고 이 날 경기 표를 들고 있는 관중들은 일요일 경기 중 두 번째 경기에 재입장이 가능하다고 했다.
야구장에서 아무 것도 안 하고 3시간 30여분을 보낸 끝에 나온 결론이었다.

지하철 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우리의 짜증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는지 지하철 환승이 빨리 되어 집에는 은근히 일찍 도착했다.
야구 관람을 제외하고는 별 계획을 세우지 않은 금요일 밤이었어서 다른 약속을 잡기에도 애매했다.
지난 밤의 설렘은 온데간데 없었지만 최대한 남은 찌꺼기라도 긁어 모아 일요일 오후에의 그것으로 바꿔 잠을 청했다.

그래, 어떻게 생각하면 야구장에 한 번 갔을 거 두 번 가는 건데 또 이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결과가 아니지 않나.
고 생각하기엔 너무 자기 합리화였고 어쨌든 어찌어찌하다 즐거운 잠에 들었다.

토요일은 별 일 없이 지나갔다.
그리고 진짜 "대망의" 일요일이 왔다.
아주 무거운 숙취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