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부 34 : Back in New York City

| 2012. 8. 6. 23:23

날씨가 굉장히 더워서 그랬는지 버스는 상대적으로 굉장히 시원했다.
터미널에 늦게 도착한 편이었으므로 내가 고를 수 있는 자리는 몇 개 없었다.
어떤 사람 옆에 앉아야 짧지 않은 라이드(ride)를 즐길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얌전해 보이는 백인 녀석 옆에 자리를 잡았다.
출발과 함께 전화기 충전기를 연결해 두고 MP3를 귀에 꼽은 뒤 명상에 빠졌다.

언젠가쯤 잠에 들었고, 다시 언젠가쯤 잠에서 깼다.
버스는 여전히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원래 버스에서 한 번 잠에서 깨면 다시는 잠에 잘 들지 않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뭐라도 하기로 했다.
가까스로 버스 내부 와이파이를 잡아 다른 버스를 타고 오고 있을 친구와 연락을 시도했다.
워낙에 신호가 약해서 그가 보내는 메시지를 가까스로 받을 수는 있었지만 발신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어쨌든 처음에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만나자는 계획에는 변함이 없었다.
조금씩 어두워져 가는 허여멀건한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문득 버스 기사들은 운전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극도로 대화가 제한된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생각, 자기 자신과의 대화밖에 없을 것이다.
꾸준히 한 가지 주제에 대해 깊이 파고들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그들은 마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 '완전한 은둔자'의 주인공과도 같이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은 내공의 소유자일 가능성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사고라는 것도 그 재료가 바닥나는 순간부터는 어느 한계 이상으로 깊어질 수 없음을 몸소 체험했던 내게 그 가능성이란 그다지 높지 않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진지하게 생각해 볼 가치도 없을 단편적인 생각에 불과했지만 여행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기록에 남겨두기로 했다.
역시나 그다지 가치 있는 기록은 아닐 것 같다.

지독한 트래픽 잼을 뚫고 뉴욕에 도착한 것은 거의 저녁 7시 무렵이었던 것 같다.
버스에서 내려 바로 메트로를 찾아 들어갔다.
노선도를 확인해 보니 중간에 한 번 갈아타는 것을 포함해 약 30분 정도 지하철을 타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갑 속에 고이 모셔두었던 뉴욕 메트로 카드를 꺼내 개찰구를 통과했다.
왠지 절약 정신이 빛을 발한 것 같아 뿌듯한 순간이었다.

환승역에 도착해서 한 번 전화기를 들여다 보았다.
예상 외로 공짜 와이파이가 잡히길래 바로 와이파이를 잡아서 카톡을 확인했다.
그제서야 겨우 연락이 된 친구는 아무래도 약속 장소와 시간을 좀 바꿔야겠다는 황금 같은 정보를 내게 주었다.
원래 만나기로 한 친구가 아무래도 시간이 애매하다면서 다음에 시간이 될 때 만나자고 했던 것이 계획 변경의 주요 요인.
딱히 다른 선택 사항이 없어 코리아 타운 근처에 있는 지하철 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환승역에서 와이파이를 잡지 못했더라면 또 한 번 드라마 같은 일이 벌어질 뻔 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지하철 역에선 안타깝게도 와이파이가 잡히지 않았다.
어쨌든 간에 나보다 늦게 올 친구와 만나기 위해선 전화기가 네트워크와 연결이 되어 있어야 했기에 일단 밖으로 나와 싸게 와이파이를 잡을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여기 주소가 어떻게 됐더라. 아마 뉴욕 사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

사진 중앙 부근에 보이는 버거킹에 들어갔다.
그냥 앉아 있기는 조금 무안해서 스무디를 하나 시켰다.
마음 같아서는 와퍼 주니어 밀이라도 하나 먹고 싶었지만 ㅡ 사실 나는 이 날 제대로 된 건더기라고는 거의 하나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ㅡ 곧 도착할 친구가 같이 저녁을 먹자는 이야기를 했었기에 일단 참았다.

약 15~20분 정도 기다려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바로 밖으로 나가서 혼잡한 인파를 뚫고 케이 타운으로 향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케이 타운의 규모는 작은 편이었다.
왠지 뉴욕의 케이 타운이라면 삐까뻔쩍한 거리일 줄 알았건만, 그냥 외적으로 좀 더 나아 보이는 69가 정도 수준이었다.
다소간의 실망감을 안고 술집에 들어갔다.
무슨 찌개 비슷한 것과 밥을 시키고, 그것을 안주 삼아 소주를 먹었다.
술을 다 먹어갈 즈음에 뉴욕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던 다른 친구들이 그 곳으로 왔다.
초면이 2명에 구면이 1명 ㅡ 그것도 고작 두 번 정도 그냥 얼굴만 본 사이였다 ㅡ 이었어서 뻘쭘하게 자기 소개를 나눈 뒤 자리를 나섰다.

첫 목적지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한 여자의 생일 파티 장소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세한 이유를 밝히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자리에 앉은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바로 그 자리를 나왔다.
그리고는 이자카야 같은 분위기의 술집으로 들어가 아주 신나게 술을 먹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다른 이들 ㅡ 여기서 다른 이들이라 함은 나와, 나와 뉴욕에 함께 온 친구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가리킨다 ㅡ 의 최종 목적지가 써클임을 모르고 있던 나는 뒷계획은 별로 신경쓰지 않고 술을 먹었다.
덕분에 "술을 잘 먹는 사내"의 칭호를 따긴 했지만 결국 써클로 향한 내게 남은 건, 지옥과도 같은 시간들뿐이었다.

비단 써클에 있을 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필라델피아 로컬인 우리 둘은 써클에 가는 길부터 헤매기 시작했고, 써클에 들어가서도 헤맸으며, 써클에 나와서도 헤맸다.
처음엔 아무래도 택시 기사가 우리를 잘못된 곳에 내려줬기 때문이요, 두 번째는 방학 초였고 주중이었던 지난 번 방문과는 달리 여행 피크 시즌 금요일 밤에 써클에 몰린 엄청난 인파 때문이요, 세 번째는 그 인파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바닥나버린 에너지 때문이겠다.
딱히 에피소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나와 내 친구의 술 기운이 쑥쑥 올라왔고, 클럽 분위기에 적응을 하지 못한 내가 친구에게 헬프를 쳤으며, 원래 잠자리를 제공하기로 되어 있던 친구와의 연락이 잘 되지 않으면서 발생한 일이었다.

따라서 가까스로 밖으로 나온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숙소를 잡는 것이었다.
바로 근처에 보이는 호텔에 들어갔지만 빈 방이 없다는 말만 듣고 나왔다.
확실히 성수기에 아무런 계획 없이 뉴욕에서 방을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적지 않은 시간을 돌아다녀 세 번째인가 네 번째로 시도했던 호텔에 겨우 방을 잡을 수 있었다.
그것도 아무 문제 없이 정상적으로 잡은 방이라기 보다 협상 끝에 싼 가격에 잡은 방이었다.

방에 올라가 보니, 남자 둘이서 짧게 자고 가기엔 터무니 없이 좋은 방이었다.
처음에는 협상을 제시하던 프론트 직원이 상술을 부린 것으로 의심했지만, 방의 상태와 가격을 고려하면 그는 진정으로 피로에 찌들어보였던 두 불쌍한 아시안 청년을 자신의 직권을 행사해 구원하려 했던 착한 사람이었던 것 같았다.
정말 굉장히 지쳐 있었지만 일단 숙소가 잡히자 술 기운도 깨가면서 다시 슬슬 신이 나기 시작했다.
신나는 기분에 방에서 뛰어 다니던 나는 발을 헛디뎌 발목을 삐고 말았고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잠에 들었다.
그 때 시각이 아마 새벽 4시 30분 무렵이었을 것이다.

귀환치고는 참 화려한 귀환이 아닐 수 없었다.
프로그레시브 락을 대표하는 밴드 제네시스의 사이키델릭 락 'Back in NYC'가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밤이 아니었을까.

다음 날 낮 1시가 넘어 잠에서 깼다.
지난 새벽 체크 인을 하면서 체크 아웃 시각을 오후 2시로 쇼부치지 않았더라면, 나의 두 번째 뉴욕 여행은 이튿 날도 그다지 상쾌하게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빠르게 외출 준비를 하면서 친구와 함께 지난 날의 기억들을 퍼즐과도 같이 맞춰나갔다.
그렇게 얼기설기 맞춰진 퍼즐 조각의 신뢰성이 얼마나 높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지난 날이 절대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하루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