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부 35 : I'm gonna paint my face like the Guggenheim

| 2012. 8. 10. 21:50

이래보여도 정말 엄청나게 더운 날씨였다.

그 날의 뉴욕은, 한국식 사우나에 들어가 1시간 가량 땀을 시원하게 빼면서 몸을 구석구석 닦고, 거기에 냉수욕까지 10분쯤 곁들인 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마루에서 시원한 식혜를 한 사발 들이키고 최대한 간결하게 단장을 한다 하더라도 밖으로 나오면 5분만에 땀이 삐질삐질 흐를 것만 같은 그런 날씨였다.
한 번만이라도 더 샤워를 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등 뒤의 호텔은 내게 또 다른 숙박료만을 요구할 터라 일단 발걸음을 옮겼다.
2박 3일의 두 번째 뉴욕 나들이에서 유일한 계획은 구겐하임 미술관에 들르는 것이었다.
친구의 아이폰으로 숙소와의 거리를 살펴 보니 거리가 그렇게 멀지는 않았다.
가는 길에 대충 브런치 ㅡ 물론 낮 2시가 넘었을 때 먹는 식사를 브런치라 부르지 않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우리의 생체 시계에 따르자면 충분히 그것을 브런치라 부를 수 있었다 ㅡ 로 끼니를 때우기로 했다.
적당히 새로 오픈한 것 같은 느낌이 나는 브런치 집이 저기에 보였다.

Hㅑ, 정말 맛있게 생겼군?

위 사진을 좌측 위부터 오른쪽으로 1번, 2번 순으로 번호를 매겼을 때 4번과 5번에 해당되는 것을 하나씩 시켰다.
인심 좋게 생긴 라틴계 요리사 아저씨가 바로 재료를 가져와 조리하기 시작했다.

그의 숨막히는 뒤태를 어렵사리 포착했다.

맛보다는 양이 문제였다.
시키기 전에는 철근이라도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던 내 위가 잠시 여기가 미국임을 망각했던 것이 분명했다.
결국 미국 특유의 기름짐을 당하지 못한 녀석은 나를 식사 중간에 자리에서 일어나게 해 화장실 변기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몸에 쌓인 지난 날의 찌꺼기를 처리했음에도 도저히 샌드위치 반 조각을 해결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중에 언제 배가 고플지 모르니 포장을 부탁해 가방에 조심히 챙겨 넣고 다시 길을 나섰다.
이 정도는 되어야 헝그리한 여행자 정신이 아닌가 하는, 개똥 같은 자부심이 약간 들었다는 사실을 감출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적지 않은 거리를 걸어 아이폰이 가르쳐 준 곳으로 갔는데 영 미술관 같은 것이 있을 동네가 아니었다.
오버를 덧붙이면 우리가 구겐하임이 있다며 찾아간 동네는, 미술관보다는 정육점이나 NYPD가 빈번하게 들락날락할 것 같은 비밀 업소들이나 있을 동네였다.

대체 뉴욕에는 왜 그렇게 공사를 하는 건물이 많을까?

근처 블럭을 여러 차례 돌았지만 미술관은 커녕 미술을 할 것 같은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왠지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아봤을 것 같은 주변 노점상 아저씨한테 구겐하임 미술관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그에게서 돌아온 충격적인 대답은 모른다는 것.
뉴욕의 노점상들은 교양이라고는 쥐뿔만큼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하던 찰나에 경찰을 만날 수 있었다.
예의를 다해 물은 끝에 우리는 실제 구겐하임이 있는 곳과는 굉장히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까는 타겟을 뉴욕 노점상에서 스티브 잡스로, 다시 스티브 잡스에서 구글 맵으로 옮겨 가며 지하철을 타고 구겐하임 근처로 이동했다.

지하철의 관점에서 한참을 타고 이동한 끝에야 구겐하임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시 거기서 몇 블럭을 더 걸었다.
옛날 교과서에서 봤던 구겐하임 건물의 외관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는 말을 하던 친구가 문득 고개를 돌리더니 그 과거의 인상적인 기억과는 대조적으로, 차분하게 아마 이 건물이 구겐하임인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코너를 돌아 보니 구겐하임이 맞았다.

그 더운 날씨에도 북극곰 분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사람들에게 던지고자 하던 메시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코카콜라 사 먹으라고?

모던하고 심플한 외관이 확실히 인상적이긴 했다.
딱히 건물 밖에서 할 일이 없어 바로 내부로 들어갔다.
표를 사면서, 토요일 오후 몇 시부터 공짜 입장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했는데 ㅡ 사실 우리는 오후 네 시인가부터 그런 서비스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충 시간을 맞춰간 것이었다 ㅡ 무료 입장은 다섯 시가 넘어서부터 이루어지며 줄이 굉장히 긴 편이기 때문에 아마 그냥 지금 표를 사서 들어가는 것이 훨씬 나을 거라고 이쁘장하게 생긴 매표원이 알려주었다.
가방을 맡기고, 희미하게 잡히는 와이파이 신호로 페이스북 체크인을 마치고, 뭔가 억지로 떠밀려 공짜 오디오 해설을 손에 쥐고, 그 유명한 나선형 통로 ㅡ 쉽게 생각하면 쌈짓길과 비슷하게 따로 계단을 이용할 필요 없이 나선형 통로를 따라 걸으면서 계속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형태다 ㅡ 를 따라 작품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내부 카메라 촬영은 금지되어 있었다.

잭슨 폴록의 그림이나 조르주 쇠라, 명불허전 피카소의 그림 몇 점을 인상 깊게 봤다.
티켓에 따로 인쇄가 되는 특별 전시치고 규모가 아쉽긴 했지만 어쨌든 칸딘스키의 작품도 훌륭했다.
결국 미술관을 나서기 전에, 그 놈의 나선 구조만 디립다 울궈 먹는 기념품장에 가서 피카소 그림 엽서와 칸딘스키 그림 엽서를 하나씩 샀다.
화장실은 생각보다 상당히 지저분한 편이었지만 공간 활용이라는 면에서는 높은 점수를 줄 만했고, 내부가 반달형으로 생긴 엘리베이터는 효율성은 좀 떨어질지 몰라도 그 느낌이 굉장히 독특했다.
위로 올라갈수록 "우리네" 눈에 낯이 익은 작품들은 점점 없어지고 '과연 이것이 미술인가?' 또는 그 흔한 '나라도 이건 그리겠다!'고 생각할 만한 작품들이 등장하면서 감상의 흥미가 조금씩 떨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아무 생각 없이 걸을 수 있는 나선형 구조가 아니었다면 중간에 포기하고 밖으로 나갔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림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다 보니 그림 옆에 작게 붙어 있는 작가의 이름과 출신지 정도를 확인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생각보다 자신이 태어난 도시에서 죽은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슨 마음의 발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꼭 내가 태어난 서울에서 죽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생뚱맞게도.

건물의 최상층부에서는 중국 작가와 일본 작가의 작품을 몇 개 볼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한국 작가의 작품은 전시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언젠가는 대한민국 출신 작가의 아름다운 작품이 ㅡ 그래봤자 나는 '과연 이것이 미술인가?' 또는 '나라도 이건 그리겠다!'는 생각만을 하겠지만 ㅡ 구겐하임에 걸리기를 바라며 짧지 않았던 미술관 산책을 마쳤다.

마치 위 아래 다른 사진을 합쳐놓은 것 같지만 그냥 실제 사진이다.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결국 실패하긴 했지만 지난 밤 우리를 재워주기로 했고 오늘은 꼭 우리를 재워주겠다고 약속했던 그 친구로부터는 딱히 연락이 없었다.
그래서 바로 코 앞에 있는 센트럴 파크를 걷기로 했다.
뉴요커의 상징인 중앙 공원 ㅡ 아니, 그러고 보니까 분당의 중앙 공원은 센트럴 파크의 직역인 걸까? ㅡ 을 걸으면서 산책을 하고 친구를 만나 저녁을 먹으면 시간이 딱 괜찮을 것 같았다.

'Shut up and let me go'로 유명한 팅 팅스의 'Guggenheim'이라는 노래를 끝으로 포스트를 마친다.
당연히 원래부터 알고 있던 노래는 아니고 그냥 구겐하임과 관련된 포스트라서 한 번 구글링을 해봤을 뿐이다.
다행히 이 노래도 정말 구겐하임과 깊이 관련된 노래는 아니고, 그냥 구겐하임이 지니고 있는 스트레오타입을 자극적으로 이용한 노래일 뿐이다.

괜히 뉴욕과 관련된 포스트 컨셉을 노래로 잡은 것이 약간 후회스러워지려고 한다.
더 이상 아는 노래도 없으니 빨리 뉴욕 여행기를 마무리 지어야겠다는 생각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