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bearable pity for the suffering of mankind

| 2012. 8. 27. 09:05

(어차피 논쟁이 되기에 내 블로그는 너무나도 변방에 위치한 곳이라 진정한 논"쟁"이 발생할 가능성은 적겠지만) 굉장히 소모적인 논쟁이 될 것이라는 건 안다.
최근 네트워크 상에서 유행하고 있는 이 만화를 보면 애초에 이런 포스트를 찌그리는 것 자체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셈이나 내 삶의 개인적인 기록으로서의 포스팅이라 자기 위안하며 키보드를 두드린다.

몇 해 전, 처음 일베라는 웹 사이트를 접했을 때 나는 거의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 느꼈을 것 같은 그런 신비로움에 가득 차 그 사이트를 바라봤던 것 같다.
다분히 좌편향되어 있던 나의 가치관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물론이요, 도저히 건설적인 면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패드립이 난무하는 곳이었다.
왕성하게 발생하는 일베의 트래픽을 보며 대한민국 온라인의 대세가 이미 이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는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도 했으며, 그 잘못된 판단에 근거해 도를 지나쳐 버린 한국 누리꾼들의 양태에 대해 적잖은 분노를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스스로의 스탠스를 명확하게 규정지을 수 없었던 내게 일베의 일침이 하등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 곳에는 바람직하지 않은 몇몇 요소를 제외하면 나름 그들의 사상을 집대성 할 수 있는 하나의 거대한 문화적인 코드가 있었고, 그 코드는 내가 그 때까지만해도 전혀 받아들이려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색깔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뉴데일리를 존재의 가치도 없는 찌라시 매체로 취급하는 만큼 그들은 오마이뉴스를 바라보고 있었고 내가 나꼼수에서 벌어지는 논의에 상당한 가치를 부여하는 만큼 그들은 강용석이나 전원책 같은 "보수 논객"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양극단의 소리를 같이 듣는다고 해서 중용의 도를 실현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어쨌든 대충 반대 편의 이야기는 어떠한가, 반대 편에서 바라 보는 여기는 어떠한가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여간 신선한 공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뒤로 일베를 종종 들어가 눈팅 종자로서 적잖은 트래픽을 유도했다.

그러던 와중 트위터를 시작한 나는 디씨와 일베를 하나로 관통하는 어떤 작지 않은 우파 트위터리안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가 일베를 접한 초창기의 기억을 되살려 이들의 집단 이성에도 분명히 뼈는 있다는 생각에 그들을 가장 대표하는 "당주"[각주:1]라는 사람의 트위터 계정을 팔로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들 사이에서 오고 가는 트윗을 지켜본 지 수 달,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던 지난 새벽에 이들과 관련된 모든 트위터 팔로우를 중단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학자로서 인간으로서 존경을 마다하지 않는 러셀의 말을 인용하면,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unbearable pity for the suffering of mankind)"를 너무 심하게 느낀 나머지 내 마음이 그들의 고통에 못지 않은 고통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주 이따금, 그러니까 마치 내가 가만히 있을 때 자연스레 뭔가에 대해 공부가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정도의 빈도로 건설적인 논의가 오고 가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나 내가 가장 혐오하는 것들 ㅡ 좌좀들이라고 불려도 싼 집단의 부끄러운 정신 승리, 반대를 위한 반대, 비난을 위한 비난 등을 포함, 뭐 별 것도 아닌 일로 말도 안 되는 진지를 빠는 행위까지를 아우른다 ㅡ 에 대해 빈볼을 날리는 모습을 보면 기형적이지만 이런 위태로운 균형이 아니고서는 우리 사회가 그나마도 지탱되지 않으리라는, 어떤 거국적인 의식마저 든다.

하지만 그건 이따금씩 발생하는 일이다.
애초에 일베와 디씨를 해쉬태그로 걸어두는 사람들에게서 "발전"이나 "건설"이라는 키워드를 발견하고자 한 내 자신의 실수였다.
시니시즘이라면 거의 그 궁극적 원형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내게, 나이도 적잖이 드신 분들이 나누시는 이야기는 분노를 넘어선 동정과 연민을 느끼게 한다.
새벽에 하도 잠이 안 와서 플립보드로 넘겨 보던 트윗 몇 개를 캡쳐했다.
내가 고른 것은 누가 보더라도 어그로를 끌 수 있는 것들이라 다른 트윗에 비해선 안타까움의 정도가 높은 것들임을 밝혀 둔다.

강경태 씨 연세가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요즘 젊은 세대" 드립을 치며 거품을 무는 모습을 보아 나보다는 연배가 지긋이 높은 분이라고 가정을 한다면, 이건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자충수를 두고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태도에 다름 없다.
어차피 정치와 이념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삶을 주변 환경으로 삼는 밈(meme)들의 각축장이다.
"흥분 잘 하고 감정에 휘둘리면서 선동하다보면 잘 먹히는 세대"를 이용하지 못한 것이 그들의 첫째 잘못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병든 세대를 만들어 낸 것이 그들 자신이라는 것을 모르는 게 두 번째 잘못이고, 그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질 높은 교육을 받은 세대에 열폭하는 그 모습이 세 번째 잘못이다.

닉값을 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걸 두고 이야기 하는 것이렷다.
북한 인권 보호하자며 운운하는 사람 대부분은 사실 정작 그들의 목숨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눈꼽만큼의 관심도 없다.
생명의 문제 앞에서 어찌도 이렇게 경솔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가.
갖은 성폭행 범죄 앞에서는 무슨 범죄자의 인권을 존중하냐며 강력한 법치 질서의 구현을 표방하는 척하면서도, 이른바 보슬이라는 접두어가 붙은 단어의 집단에게는 갖은 추행을 마다하지 않는 졸렬한 이중잣대에 갇힌 사람들.
연민의 정도가 한 층 심해지는 부분이다.

잠시 빠지는 이야기를 하자면, 이번 태풍 볼라벤의 북상 소식과 관련해 무슨 일본으로 우회전을 하면 좋겠느니 4대강 사업을 하지 않은 북한은 물 난리가 나겠느니 하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인류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극에 달한다.
대체 이 집단적인 마음의 병을 구제할 방법은 무엇일까.
마음 한 켠이 먹먹해지는 느낌이다.

당주님께서 친히 남긴 트윗이다.
애초에 티아라라는 그룹을 보수 연예인의 상징으로서 빨아주는 것에 실소를 금할 수 없지만, 이미 팩트가 명확하게 갈린 상황에 대고 "전라디안 화영 OUT!"을 외치고 계시다.
언젠가 그가 나이 40줄에 접어든 아저씨라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는데 그 나이의 반띵을 치고 생각하더라도 유치한 짓이다.
이것이 일베와 디씨를 외치는 사람들의 한 소모임의 수장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현실이다.
역시 가슴이 아파옴을 금할 수 없다.

트위터를 하던 초반, 나는 상당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좌파 논객이라는 사람들의 계정을 하나씩 찾아 차례로 팔로우했더랬다.
하지만 적지 않은 "파워 트리터리안"으로부터 내가 얻은 것은 무한한 실망감뿐이었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이런 사람들로 대변되는 현실이 정말 부끄럽게 느껴졌다.
거의 정체성에 대한 자괴감이 올 것 같은 느낌에 도저히 얌전히 보고 있기 힘든 사람들의 계정을 하나 둘 언팔로우했다.
수많은 좌좀들의 엉망진창인 트윗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는지 태클을 걸 사람이 있을 것 같아 남겨 두는 나의 짧은 흑역사.

참 재미도 없는데 영양가도 없는 포스팅이었다.
마무리로 이 안타까운 현실을 알면 무덤 속에서라도 가슴을 꿍꿍 치고 있을 연민 러셀 선생의, 우리 모두를 향한 따끔한 일침을 쏜다.
자신의 무지에 대한 겸손을 항상 잃지 말자.

  1. 그 온라인 모임은 새누리당, 민주통합당에 쓰는 "당"의 개념을 쓰고 있었고 그 모임의 수장격인 사람은 "당주"라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