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부 38 : 여행의 꽃은 역시 벼락치기

| 2012. 9. 1. 16:23

개강까지 이 여행기를 마무리 짓지 못한다면 영영 완성할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어 의무감으로 포스팅을 시작했다.

뉴욕에서 돌아온 뒤 몸을 추스리며 살던 내가 가장 중점적으로 했던 일은 필라델피아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깔끔하게 매듭지어 놓는 것.
깔끔한 매듭이란 일방적으로 정리를 한다는 의미는 당연히 아니고, 그 동안 짧게나마 같이 보냈던 시간을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마무리 짓는 것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환송 파티랍시고 주말을 적지 않은 술과 함께 보냈다.
굉장히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오전 시간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한 숙취를 안고 깬 내게, 미국에서의 남은 시간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어차피 별 거 할 수 없는 일요일을 제외한다면, 그나마 시내 관광을 할 수 있는 날은 월요일과 화요일, 양일이 전부였다.
상황이 이렇게 됐기 때문에 당연히 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월요일, 화요일 시간을 충분히 활용해서 필라델피아 시내를 둘러보는 수밖에.

일요일 저녁에 무엇이 볼 만한지, 그것들을 어떻게 볼 것인지 계획을 짜려고 시도했으나 귀찮음이 심하게 발동해서 그마저 관뒀다.
그저 시내로 나가는 지하철과 다시 유니버시티 시티쪽으로 올라오는 지하철이 대충 몇 분 간격으로 있는지를 확인하고 몇 시에 출발해서 몇 시에 돌아올지만 잠정적으로 정해두었다.

그리고 7월 23일, 필라델피아에서 보낸 마지막 월요일 아침이 밝아왔다.
우물쭈물하다가 늦은 시각에 잠이 든 탓에 머리가 개운하지는 않았지만 이 때마저 게으름을 핀다면 정말 필라델피아에서 두 달이나 있었으면서 시내에 무엇이 있는지 한 번도 제대로 돌아보지 않은 멍청이가 되고 만다며 스스로를 자극, 외출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섰다.
지하철은 이미 여러 번 타본 적이 있기 때문에 헤맬 일이 없었다.

첫 목적지는 마치 경주의 에밀레 종과도 비교할 수 있는 리버티 벨(Liberty Bell).
지하철에서 내려 밖으로 나왔다.

날씨는 좋다 못해 더웠다.

자, 대충 이 근처에 리버티 벨이 보여야 할 터였는데 종 형상을 한 물체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별 의미도 없는 저 비석 뒤로 길다란 줄이 보였다.
위 사진 좌측 끝 머리에 어디론가 뛰어가고 있는 바로 저 개를 조련하고 있던 경찰관 같은 아저씨한테 대체 저 긴 줄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는 약간의 지역 텃세 같은 것을 진하게 풍기면서 바로 저것이 리버티 벨을 보기 위한 사람들의 줄이라고 말해주었다.
잠깐만요.

정말 저게 종 쪼가리 하나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란 말인가.

평일 아침이었다.
그것도 월요일 아침이었다.
그런데도 벌써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라니, 난 절대 리버티 벨 따위 보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고는 내가 필라델피아에 처음 왔을 때 갔던 인디펜던스 비지터 센터로 발걸음을 돌렸다.

먼저 수분 보충부터 했다. 미국에 와서 좋아하게 된 음료수인 진저 에일로.

주변 볼거리를 물었다.
거의 싁싁하는 소리와 함께 발음이 새던 할머니 안내원은 왠지 부들부들 떨리는 것 같은 손으로 지도에 체크를 해가며 이런 이런 곳이 가볼 만한 곳이며, 그 중 여기 여기는 돈을 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는 고급 정보를 주었다.
처음 만난 할머니에게 표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감사 표시를 하고 지도를 챙겼다.
바로 옆에 인디펜던스 홀(Independence Hall) ㅡ 이미 위에서 에밀레 종 드립을 쳤으니 비슷한 맥락에서 보자면 불국사나 석굴암처럼, 이 곳에 오면 꼭 보고 지나가야 하는 그런 필수요소 같은 관광 명소다 ㅡ 을 구경할 수 있는 공짜 티켓을 나눠주는 창구가 있었다.
공짜 티켓이란, 이벤트 성으로 하던 행사를 내가 우연히 목격한 것은 아니고 사람들이 몰리는 관광지를 효율적으로 돌리기 위해 시에서 마련한 하나의 절차적인 요소였다.
내가 받은 티켓에 적힌 관광 시각은 오전 10시 40분.
약 40분의 시간이 남는 셈이었다.

지도 상에서 바로 근처에 있는 지점들만 간단하게 찍고 인디펜더스 홀로 향하기로 했다.

사람만 없었더라면 참 한적했을 날이다.

내셔널 컨스티튜션 센터(National Constitution Center)가 멀리 보였다.
정확히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모르겠으나 느낌상 대충 박물관 비슷한 곳이 아닐까 한다.

벤자민 버튼, 아니 벤자민 프랭클린의 무덤.

필라델피아 관광을 위해 아주 조금이라도 인터넷 검색을 해 본 사람이라면, 필라델피아와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는 인물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시내 한 켠에 마련된 공동 묘지에 바로 그 벤자민 프랭클린의 묘소가 있었다.
직접 묘지 내부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도 딱히 없었고, 무엇보다 저 높은 벽 어디에 출입구가 있는지 찾지를 못해 그냥 밖에서 사진 몇 장을 박았다.
참 남의 무덤이 뭐 그리 중요한 거라고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인지 약간의 회의감을 가지면서 말이다.

사람은 죽으면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장면.

옆의 벽에는 그의 인생을 간략하게 정리해 양각으로 새긴 것이 있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에 대해 심각한 호기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읽어보도록.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아 여기까지만 보고 인디펜던스 홀로 발걸음을 돌렸다.

근처에서 아주 흔히 볼 수 있던 관광용 버스들.

생각보다 아시아계 관광객들이 많이 보였다.
절대로 절대로 그들과 같은 일행이라는 다른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싶지 않았던 나는 애써 그들을 피해다녔으나 어차피 큰 맥락에서 봤을 때 제3자는 나의 눈물 나는 노력을 알아주지 못했으리라.

내가 이런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과 어울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런데 아주 여기서 난리가 나고 말았다.
가방이라고는 챙기지 않았던 내가 인디펜던스 홀 입장 티켓을 어딘가에서 흘리고 말았던 것이다.
어차피 주머니의 갯수가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더 열심히 내 자신을 뒤져 볼 필요도 없었다.
내가 티켓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증명해 줄 별 의미 없는 종이 쪼가리가 있기는 했으나 그것을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기에 내 의식적 자아는 너무 무기력한 존재였다.
이렇게 된 거 그냥 과감하게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고 먼 발치에서 인디펜던스 홀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이젠 종로에까지 진출한, 세계 어느 곳을 가나 볼 수 있는 흔한 마차.

아마도 벤자민 프랭클린의 동상으로 추정되는 조각을 중심으로 단촐하지만 위엄 있는 건물이 단정하게 서 있었다.

그림의 떡.

내가 없어진 티켓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누가 보더라도 내가 10시 40분 티켓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자료가 있었고, 정 말 싸움을 하기 싫었다면 다시 비지터 센터로 가서 티켓 한 장을 더 끊어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11시 40분에서 50분 사이에는 유니버시티 시티쪽으로 다시 올라가야 할 내 일정 때문에 후자는 무조건 포기해야 할 옵션이었다.
전자에 대해선 스스로에 대해서도 할 말이 없다며 터벅터벅 걷던 나.
하지만 호기심 삼아 걸어 갔던 인디펜더스 홀의 반대편에서 나는 전자에 대해서도 합리화 할 수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인디펜던스 홀의 뒷편.

잘 안 보일 것 같아 사진을 한 장 더 찍었다.

뙇!

대체 줄이 어느 정도의 속도로 빠지는지 가만히 서서 지켜봤다.
계속 한 자리에 서 있기 약간 무안할 때까지 저 줄은 거의 변함 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티켓을 흘린 것을 이런 바보 같은 상황을 미연에 방지한 신의 한수로 자부하며 이내 자리를 떴다.

갑자기 시간이 텅 비게 되었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아까 할머니가 표시해 준 관광지를 하나씩 둘러 보면서, 뭔가 들어가보고 싶게 생긴 곳이 있다면 그런 곳이나 쓱쓱 둘러보기로 했다.
역시 관광이라고는 취미가 없는 내게 정형화된 관광, 규격화된 루트 따위는 어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