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부 39 : 올드 시티 디스트릭트의 구석 구석

| 2012. 9. 6. 22:25

미국에서 온 지 두 달이 넘어가는 동안 왜 정작 이런 곳을 둘러 보지 않았는지 후회가 될 정도로 올드 시티 디스트릭트(Old city district)는 분위기가 좋은 공간이었다.
리버티 벨과 인디펜던스 홀 근처는 방문객으로 북적였으나 아주 살짝,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거리를 벗어나기만 하면 한적함과 여유로움을 동시에 만끽할 수 있었다.
날씨가 필요 이상으로 더웠던 것이 조금 에러.

필라델피아 관광에서 가장 많이 우려 먹는 요소 1순위는 이미 말했던 벤자민 프랭클린. 2순위는 독립 선언서와 관련된 항목들로, 동상 아래에는 "The Signer"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서양 사람들은 참 동상 세우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지도에 적힌 곳을 단시간 안에 주파했다.
결과적으로 겉에서 딱 보기에 맘에 들었던 곳이 없었기 때문에 내내 땡볕 아래서 걸어다니기만 했다.

자체적인 기록에 따르면, 제2 합중국 은행(The second back of the United States)으로 규모도 그리 크지 않고 안에 들어가봤자 별 거 없게 생긴 건물이었다.

거리의 건물들은 대체적으로 좋게 말하면 고전적인 양식, 있는 그대로 말하면 그냥 오래 되어 낡은 외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관광의 중심지이다보니 숙박 시설도 적지 않게 있었는데 깔끔함이 생명인 그런 호텔들조차 건물 외관 자체는 빈티지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 포스트 모던한 건물도 들어서 있었다.

아마 그렇게 걸어 다니던 어느 순간에 앞으로 몇 분을 더 걸어다녀봐야 건질 것 하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든 뒤로는 진짜 맹목적으로 걷는 것에 집중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기엔 조금 오래되고 사소한 기억들.

유펜과 캠퍼스 구역을 나눠 쓰는 드렉셀 대학교의 어원을 찾고야 말았다. 올드 시티 디스트릭트에는 이와 같이 필라델피아와 관련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소개를 무작위적인 장소에 설치해놨다.

동쪽으로 계속 걷다가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딘가 마리화나가 무럭무럭 자라고만 있을 것 같은 한 공터. 왠지 구도가 좋아 찍어봤지만 작은 렌즈에 담을 수 있는 세상은 렌즈의 크기만큼이나 작은 것이었다.

계속 지도를 참조해가면서 걷고 있는데 뭔가 멋드러진 벽돌담이 내 눈길을 끌었다.
루트를 다소 벗어나는 수고로움을 감소해가며 벽돌담의 정체를 알기 위해 담을 따라 쭉 걸었다.

퀘이커.

방문객들을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정문에 걸어둔 것치고는 담장을 너무 높고 튼튼하게 지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유일신 종교의 태생적 아이러니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광경이 아닌가 하여, 언젠가 내가 유명해졌을 때 자서전이 나오면 "다재다능했던 나는 사진에도 자신의 철학을 투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따위의 문구를 써넣을 수 있을까 해서 찍어봤지만 당시 내가 느꼈던 그 원질적인 느낌에 비하면 사진이 참 저질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또 모르는 일이다.
언젠가 이 사진이 퀘이크교의 멸망을 예언한 사진으로 사료로서 쓰인다든가 또는 리처드 도킨스 재단에서 RT를 한다거나 뭔가 어쨌든 사회에 유용한 자원으로 쓰일지는.

뻥 안 치고 매일 밤마다 울려대던 그 사이렌들은 여기에 거주하고 있었구나.

쭉쭉 걸어 올라갔다.
어둡고 컴컴한 다리 밑 길을 지나고 나서 여기서 더 북쪽으로 올라갔다간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 같은 예감에 다시 방향을 틀었다.

어떻게 찍어도 멋이 없게 나오던 이 교회의 이름은 세인트 어거스틴(St. Augustine) 교회다.

사실 짧지 않은 거리를 이렇게 걸어온 이유는 바로 이 세인트 어거스틴 교회의 첨탑이 아주 멀리에서부터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은 별 게 없었다.
올드 시티 디스트릭트 근처에 높은 건물이 없어서 그냥 자연적으로 돋보이는 것뿐이었던 것 같다.

바로 아래서 올려 찍은 사진인데 사진기가 사진을 가로로 잡아버렸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사진 크기를 강제로 조정했기 때문에 이런 형태로밖에 올리지 못한다.

다리 위 편으로 올라가봤다.
시야가 탁 트였다.

대전 엑스포 공원에나 어울릴 법한 묘한 느낌의 구조물.

좌측으로는 델라웨어 강변에 있는 필라델피아의 조그만(?) 휴양지(?)인 펜스 랜딩(Penn's Landing)으로 향하는 다리가 있었다.
펜스 랜딩 이야기 ㅡ 적당한 때에 가면 꽤나 운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이야기 ㅡ 는 적지 않게 들었기 때문에 걷는 일정을 포기하고 한 번 강가라도 걸어볼까 생각했지만 처음부터 계획을 잡은 것도 아니고 무리하게 갔다가 제대로 구경도 못하고 약속 시각에 늦을 것 같기도 해서 잽싸게 마음에서 털어버렸다.

왠지 모르게 설레는 그 마음이라도 간직하고 싶어 다리 초입 사진을 찍어두었다.

왔던 길 쪽으로 돌아가다가 이번에는 서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지도 상으론 조폐국 건물이 근처에 있어야 했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들만 잔뜩 있는 그런 매캐한 거리를 걸었다.
진부한 진행이지만, 바로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이 바로 조폐국 건물이었다.
퀘이커 교도들의 두터운 벽이 애교로 느껴질 만큼 딱 겉에서 보기에도 무척이나 단단해 보이는 튼튼한 건물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조폐국이란 이름을 너무 작게 달아놓은 것은 아닌가.

한국조폐공사의 건물들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이것보다 거대할 리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참 미국답다는 느낌이 드는 건물.

건물이 얼마나 큰 건지 고개를 들었다가 뒤늦게야 내가 저 거대한 글씨들을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계속 서쪽으로 걸어 내가 처음 관광을 시작했던 비지터 센터 근처의 내셔널 컨스티튜션 센터로 돌아왔다.

그 놈의 공사는 어딜 가나 현재 진행형.

어디에선가는 내부 관광을 할 것이라는 계획으로 시간 계산을 해놨는데 아무 곳도 둘러 보지 않게 되어 시간이 적잖이 남아버렸다.
그렇다면 관광 시간이 정해지는 편인 인디펜던스 홀을 포기하더라도 최소한 리버티 벨을 보고 가는 것이 필라델피아라는 도시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땀에 축축하게 절어버린 몸뚱이를 이끌고 리버티 벨을 보려는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