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최초로 공개되는 나의 필라델피아 일상 생활 이야기다.
최초 공개라는 단어 조합은 듣는 이로 하여금 약간의 설렘과 약간의 두근거림 따위를 느끼게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만, 내 일상 생활 공개에 그런 도키도키함을 느낄 사람은 설마 없겠지?
어떤 대상을 여태까지 공개하지 않았다는 말은 공개를 할 수 없었다는 말도 되겠지만 공개를 할 것이 없었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이번 포스팅의 경우는 전적으로 후자의 노선을 따르고 있는데, 사실 이렇게 뻘쭘한 말로 포스트를 시작하면서도 과연 내가 앞으로 어떤 내용으로 무한의 흰 공간을 채워나갈지 나조차 감이 오지 않는다.
빈 수레가 애써 요란한 소리를 내는 꼴만큼은 되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고 본론으로 들어간다.
이제 주변의 지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알고 있겠지만 사실 이번 여정은 여행을 위한 여행 외에 목적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여행의 목적과 뭔가 또 다른 목적이 양립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후자를 위한 여행이라고 하는 것이 상황상 더 들어맞을 수도 있을 정도다.
아직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이야기이므로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띡 말하자면, 이번 여름에 미국에 온 가장 큰 목적은 간단하게 웹 사업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놀랍게도 개발을 내가 담당하게 되었기 때문에 ㅡ 내가 개발을 맡게 된 이유는 아직도 상당히 불분명한 편인데 아마 나의 전공에 전(電)이라는 글자가 들어가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타당한 설명이다 ㅡ 블로그에 묘사된 여러 에피소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보내는 편이다.
컴퓨터 앞에서 보내는 시간의 구성을 살펴보면 약 절반이 의미 없는 인터넷 서핑, 남은 절반 중 절반이 답도 안 나오는 코딩 가지고 씨름하기, 그 절반 중 절반이 넷 상에 오픈되어 있는 강의 듣기, 그리고 남은 절반이 블로깅 정도겠다.
오래 붙들고 있는 날에는 거의 10시간도 넘게 컴퓨터를 붙잡고 있기 때문에 제3자가 보기에는 이보다 더 한가한 생활을 하고 있을 수 없다라든가 미국에까지 와서 왜 저런 히키코모리 같은 생활을 하고 있나 같은 섣부른 판단과 의문 제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이 짧은 한 문단으로 모든 오해가 풀리길 바랄 뿐이다.
어떤 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 이 재미 없는 이야기에 그나마 재미를 불어 넣을지 고민하다가 가상의 하루를 그리는 것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지는 포스트는, 정말 가감없이 나의 아주 평범한 하루 일상을 묘사하는 글이다.
관점에 따라, 덧없이 흘러간 나의 과거 시간들에 대한 애도문이 될 수도, 어쩌면 찬란해질 가능성이 있는 내 미래에 대한 오마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너무 디테일한 것에 신경쓰지 말자.
내가 90% 이상의 수면을 해결하는 곳이다.
얼핏 보면 내 작은 육신을 눕히기에 소파가 더 작은 것 같지만, 놀랍게도 176cm로 추정되는 나의 신장과 소파의 길이는 거의 2~3cm 오차를 두고 들어맞는다 ㅡ 물론 소파가 2~3cm 더 길다는 뜻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라도 울고 갈 정도로 신통하다.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뒤로 쭉 따져 보면 날씨가 더운 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집이 북향이라 그런지 밤에는 실내 기온이 제법 쌀쌀하게 느껴져 털 이불을 덮고 잔다.
이불 옆으로 살짝 보이는 퍼런 물체는 원래 기내에서 쓰려고 가져온 목 베개인데, 지금은 나의 수면용 베개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당연히 먼저 씻지 않고 물부터 마신다.
냉장고에서 언제나 신선한 물과 얼음을 제공 받는다.
짧게나마 외출할 때에 종종 사들고 오는 각종 음료수로 목을 축이기도 하고, 캡슐 에스프레소 기계에서 커피를 뽑아다가 차가운 아메리카노나 라떼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역시나 디테일에 너무 신경쓰면 골치가 아파지는 사진.
캡슐은 두 종류가 있다.
빨간 뚜껑을 가진 녀석과 파란 뚜껑을 가진 녀석 ㅡ 이렇게 말하니 왠지 <매트릭스>의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어쨌든 당연하게도(?) 나는 두 캡슐의 맛 차이를 거의 구분하지 못한다.
그냥 아무 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먹는다.
소파에서 일어나 목을 축이고 나면 하루의 첫 분기점이 생긴다.
다시 소파로 돌아가 시간을 보내는 회귀성 선택과 식탁에 앉아 랩탑의 전원을 누르는 그나마 발전적인 선택이 분기의 내용.
전자를 고르는 경우는 스크롤을 잠깐 위로 올려 방금 읽은 내용을 다시 읽으면 될 테니 생략하고 후자의 선택에서 더 이야기를 진행해보자.
내가 머물고 있는 이 건물에 대해서 친구가 했던 말이 있다.
캠퍼스 근처의 다른 숙소들과는 다르게 계약 조건으로 나이 제한이 걸려 있는 이 곳 도무스(Domus)에 사는 사람들 중엔 학부생이 전무한 편인데, 아무래도 건물 측에서 주요 거주자들의 입맛을 맞출 필요가 있어서인지 공부를 하기에 썩 좋은 환경은 아니라는 것이 요지.
집중이야 어디서든 하면 된다는, 강한 이성의 힘을 믿는 나로서 처음에는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지만 한 달이 넘게 이 곳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 새 그 친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도 같다.
일단 앉아서 랩탑을 키면 나도 모르게 자꾸만 페이스북을 누르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최후의 방법으로 이 집 안에서 내가 맘 놓고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하나 만들기로 마음을 먹었고, 이 집에서 가장 불편한 의자를 가진 식탁 한 켠을 그 공간으로 선택했다.
원래 남자 두 명이 사는 집의 식탁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큰 사이즈의 탁자기 때문에 내 짐으로 좀 어지럽힌다하더라도 귀찮은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실제 개발의 대부분은 바로 이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오전 시간은 어영부영 보내다 보면 굉장히 빨리 지나가는 편이다.
하루 종일 집에만 박혀 있는 것을 조금 답답하게 여기는 친구는 ㅡ 그의 주장을 곧이 곧대로 옮긴다면 아무래도 이 집에서는 집중이 잘 안 된다고 하더라 ㅡ 이 쯤, 즉 정오를 기점으로 집 밖으로 나가자는 제안을 던진다.
매일 매일 배의 사정을 고려하여 대충 끼니를 때운 뒤 짐을 싸들고 집을 나선다.
물론 그 전에 내 타락한 육신을 깔끔하게 씻는 것을 잊지 않는다.
전체 8층 건물의 4층에 위치한 덕인지 샤워 부스 물 줄기가 시원스럽게 내려온다.
서양인들의 종특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공간의 비효율적인 활용 탓에 샤워 후 동선이 애매하게 꼬이는 편이지만 큰 불편함은 없다.
머리에 뭔가 바르고 싶은 날엔 왁스를 바르고, 그렇지 않은 날엔 그냥 모자 하나 살짝 눌러쓰고 1층으로 내려간다.
도무스의 1층은 제2의 거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다.
좁지 않은 공간에 여러 편의 시설이 마련되어 있는데 TV 앞 소파, 당구대, 멀티미디어실 같은 것은 당연히 우리의 몫이 아니다.
1층에서 주로 머무는 곳은 총 3개가 있는 스터디 룸이나 그 스터디 룸이 모두 찼을 때 이용하는 게임 룸 ㅡ 이라고 쓰고 포커 치는 방이라고 읽는다 ㅡ 이다.
테이블 모양을 보고 바로 아는 사람들도 있겠다. 게임 룸에서 한 컷.
와이파이가 잡히고 어느 정도 외부 공간과 차단이 되어 있어 소수의 사람들이 편하게 이야기하며 있기에 이상적인 공간이다.
둘이 얼굴을 맞대고 있기에 여기서는 직접적인 개발을 한다기 보다 기획에 있어 같이 의논할 사항들에 대해 정리하는 편이다.
남들이 들으면 참 부끄러운 내용들만 오가지만 아이디어라는 것이 원래 무의미한 정보들의 유의미한 나열 ㅡ 어떻게 보면 카오스 패턴의 개념과 맞아들어가는 부분이다 ㅡ 이기 때문에 쑥쓰러움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대화를 나눈다.
때로 도무스 1층의 공간이 지루하거나 하면 바로 건물과 붙어 있는 스타벅스로 나간다.
한 주 전까지만 해도 야외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요즘 날씨 같아서는 1의 망설임도 없이 실내로 들어간다.
그다지 스타벅스 같은 느낌이 안 드는 것은 나도 알고 있지만 양해해주길.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녁 타임에는 뭔가 항상 일이 있다.
누군가와 밥을 같이 먹는다든지, 농구를 한다든지, 지금 생각하면 딱히 떠오르는 에피소드는 없지만 어쨌든 저녁 시간에까지 컴퓨터를 만지고 있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저녁의 일이 무엇이냐에 따라 두 번째 분기가 생긴다.
하나는 그냥 그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그대로 뻗어 자는 것, 다른 하나는 ㅡ 대개 이 선택을 하는 경우는 늦잠을 잤다거나 오후에 뭔가로 인해 시간을 날려서 죄책감이 들 때다 ㅡ 밤에도 집중하여 뭔가 일을 벌이는 것인데, 전자에 뻗어 잔다는 표현을 쓴 것은 아무래도 술 약속의 비율이 높기 때문.
밤에도 집중하는 선택지를 고른 경우에는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에 따라 장소가 갈린다.
위에서 짧게 언급한 대로 대화가 필요한 경우는 1층 방에서, 개발이 필요한 경우는 그냥 집 식탁에서 해결하는 편이다.
때로는 술과 스타트 업 이야기가 같이 진행되기도 한다. 내 랩탑에 페이스북이 떠 있는 것은 함정.
밤이 되면 배가 고플 때도 있다.
적정한 체중 유지를 위해 밤에 뭔가를 먹어본 적은 거의 없지만 배에 심슨을 가득 담고 있는 친구의 허기를 위해 근처 편의점에 따라간 적은 몇 번 있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와와(Wawa)라는 이름의 편의점이 있다.
미국 전역에 깔린 체인점인지 펜실베이니아 또는 필라델피아 지역 체인점인지 그냥 전 세계에서 여기만 있는 점포인지 찾아보기 귀찮으므로 현재로선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꽤 쓸 만한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편의점 같이 공산품이 마련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요, 24시간 내내 운영되는 간이 카페와 샌드위치 비슷한 것을 파는 코너도 있다.
언젠가 찍은 사진이 있길래 올려 둔다.
사진 좌측으로 샌드위치 비슷한 거 만들어 주는 코너가 있다.
이것도 저것도 손에 잘 안 잡히는데 잠은 잘 안 오는 상황이라면 동네 마실을 나간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기본적으로 치안이 안정한 곳은 아니라지만 필라델피아의 이 곳 유니버시티 시티 근처는 대학생들 위주의 지역이라 그런지 밤이라도 꽤나 안전한 편이란다.
밤이 되면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기 때문에 거리가 밝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이 되려 나름의 운치로 작용하는 효과가 나기도 한다.
필라델피아에 온 초반에는 강가를 따라 몇 번 뛰고 걷기도 했는데 농구를 주에 한 번 규칙적으로 하게 되면서 최근에는 아예 강까지 나갈 의지조차 사라진 것 같다.
야경이라고 하기엔 딱히 볼 것도 없지만 휴대폰 카메라로 찍는 사진들은 퀄리티가 너무 조악해 저장해 둔 것이 없다.
언젠가는 맘 먹고 밤에 카메라를 들고 나갈 생각이다.
"언젠가는"이라는 단서 조항이 붙는 말이 실현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지만 말이다.
여기가 바로 그 도무스와 그 스타벅스다.
쭉 적어놓고 보니 너무 가식적인 포스팅이 된 것 같아 찝찝하다.
물론 위처럼 보내는 날들이 적지 않은 편이긴 하지만 더 큰 관점에서 봤을 때 현재 나의 삶의 패턴은 불규칙과 무질서함으로 가득하고 건설적인 것에의 귀찮음과 비건설적인 것에의 즉흥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런 생활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이중잣대를 들이미는 것에도 상당히 익숙해졌다.
언제든지 놀고 싶다면 미국에 온 주 목적을 여행과 휴가로 돌려버리면 그만이고, 일말의 죄책감이 나를 괴롭히거나 뭔가 나가기 귀찮은 자리가 생겨버리면 스타트 업 이야기를 들먹이면 된다.
가끔은 스스로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이 일반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했을 때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자조의 빈도와 그 정도 면에서 보자면, 전혀 문제가 될 상황은 아니다.
나는 여기서 충분히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아직까지는 "즐겁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그 누구도 이 사실을 부정하긴 힘들 것이다.
이번 미국 일정의 총 절반이 흘러갔다.
시간이 흘러가는 체감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을 감안하면 까딱하다가 이도 저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어영 부영한 여정이 될 가능성이 크다.
"지극히도 일상적인 일상에 대하여"라는 제목 하에 어쩌면 핵심일지도 모르는 일상을 돌이켜 보니 느껴지는 바가 적지 않다.
자문자답이라는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포스팅이 되지 않았나 싶다.
건강한 모티베이션을 가득 안은 채 오늘 하루는 좀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시계를 보니 벌써 오전 11시 15분!
일단 정오까지는 좀 더 빈둥거리다 뭘 하든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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