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글을 올리고 나서 노가리를 까다가 잠에 들기 직전, 뭔가 빼먹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나의 옛 룸메이트와의 만남이 불발로 이루어진 이야기를 빼먹은 것 같았는데, 딱히 길게 언급할 만한 내용은 없다.
단지 그가 며칠이나 전부터 페이스북으로 계속 연락을 시도하며 언제 시간되면 보자고, 그렇게 금요일 저녁에 보자고 약속을 했는데 금요일이 되자 연락이 오는 것은 커녕 밤 9시가 되도록 감감무소식인 것 아닌가.
친구 휴대폰을 빌려 전화를 해보자 미안하다며, 지금 노스 캐롤라이나 ㅡ 노스 캐롤라이나는 윌리엄스의 고향이 있는 곳이다 ㅡ 에 가고 있다는 개풀 뜯어 먹는 소리를 했다.
애초에 그가 나를 보러 필라델피아까지 오리라는 기대가 크진 않았던 만큼 실망하는 마음도 적을 수밖에 없었으나 마음 한 켠이 황당해지는 것까지 멈출 수는 없었다.
각설하고, 토요일은 즐거운 고기 파티가 있는 날이었다.
원래는 소규모의 인원, 그러니까 한 6명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서 고기도 먹고 술도 먹고 훈훈하게 수다도 떠는 그런 모임을 기대했던 우리에게 20명도 넘는 예상 참가 인원은 현실의 차가운 벽으로 다가왔다.
멘붕 상태는 어떻게든 해결이 되었고 금요일에 빈틈 없이 준비물을 샀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이 정도 대비라면 준비한 사람 입장에서 민망해진다거나 부끄러울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토요일 오전은 그저 아주 평범한 어느 날의 오전과 다를 바 없었다.
주섬주섬 잠에서 일어나 물 한 모금 마시고 컴퓨터를 켜서 담도 안 나오는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
그렇게 시간을 쓰고 있는데 친구 휴대폰으로 연락이 왔다.
예정된 시작 시각이었던 오후 5시 30분보다 약 네 시간여 빠른 1시 무렵이었을 것이다.
고기 파티가 시작하기 전에 미리 수영장에 눌러 앉아 태닝이라도 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요구였고 뭐 우리가, 특히나 나는 더욱 더, 그 부탁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이리저리 빈둥거리다가 대충 준비할 때가 되었다.
냉장고에 안전하게 보관해둔 와인과 고기 등을 꺼내 바깥으로 옮기고, 상추는 물에 열심히 씻었으며, 심지어는 밥솥도 없이 생 냄비에 밥까지 지었다.
나를 포함해 두 사람이 이런 저런 간섭을 섞어 가며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불을 줄였다 키웠다 상당히 복작스럽게 만든 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햇반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질이 좋았다.
나와 다른 친구가 밥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사이 이미 수영장 근처 고기 굽는 곳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준비된 밥을 가지고 내려가다가 그 광경을 본 순간 내가 저 무리에 제대로 끼어 들어가지 못할 것임은 물론, 과연 원하는 정도의 고기를 먹을 수 있을지조차 한없는 카오스의 나락으로 빠져갔다.
딴 건 됐고, 고기를 구우면서 덤으로 제 얼굴까지 익히고 있는 친구를 도우며 시끄러운 가운데 혼자만의 여유를 찾기로 했다.
솔직히 고기는 맛있는 편이었다.
고기 굽는 이야기를 자세히 하고 싶은 것은 아니나, 할 말이 워낙 없으므로 그냥 고기 굽던 이야기나 해야겠다.
수영장 양 구석에 하나씩 자리 잡고 있는 구이용 그릴은 기본적으로 가스로 동작하는 것이었고 나름 숯불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바로 불이 올라와 고기를 익히는 대신 반구체의 쇠 돌기를 매체로 열을 주고 받는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가스 불이 쇠를 익히면 그 열기가 철판 위의 고기를 익히는 메커니즘.
원래는 석쇠 위에 알루미늄 호일을 깔고 고기를 구웠으나 기름 컨트롤을 제대로 하지 못해 지옥불이 열리는 광경이 여러 번 연출, 양념 고기만 호일에서 굽기로 하고 그 외의 냉동 고기들은 그냥 석쇠 위에 바로 구워댔다.
필연적으로 생기는 그을음 때문에 겉으로 봤을 때 그렇게 맛있어 보이는 색은 아니었지만 맛은 정말 좋았다.
고기를 구우면서 사람들이랑 이야기도 하고 술도 홀짝 홀짝 먹고 하는 것이 나의 이상이었다면, 현실은 그와 거의 정반대였다.
20명이 넘는 사람들 중에 제대로 이야기를 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나와 같이 생활을 하는 두 친구와 나머지 친구 하나 정도였고, 딱히 할 말도 없고 굽는 사람 주제에 계속 고기를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혼자 계속 술을 들이켰다.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고 남은 고기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가는 쯤이 되었을 때는 술 기운에 정신이 약간 알딸딸했던 정도.
완전히 정리를 하고 집에 올라갔을 때 ㅡ 남여를 합쳐 약 10명 정도 되는 파티 패잔병들도 함께 집으로 올라왔다 ㅡ 에는 다른 사람들이랑 이야기할 의지도 완전히 잃어버렸거니와 술 기운이 적지 않게 돌아서 그냥 혼자 방에 누워 있었다.
바깥이 조용해졌다 느껴졌을 때는 대부분의 사람이 집을 떠나 있었고 나는 그제서야 남은 사람들과 조금 이야기를 시도했다.
남은 사람들도 한 5분 안에 다 집을 떠났다.
드디어 심신의 안정을 찾은 나는 친구와 함께 남은 술들을 붓기 시작했고 그 날은 그렇게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일요일인 다음 날 아침, 나는 심한 숙취를 느끼며 일어나야만 했다.
역시 술 중의 술은 소주라는 사실을 온 몸으로 느끼며, 와인 특유의 진하디 진한 숙취를 떨궈내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지난 밤의 이야기를 하면서 잃어버린 기억도 찾고 서로 무슨 바보 같은 말을 내뱉지 않았는지 조롱도 해가면서 정신을 차렸다.
아무래도 일요일이니까 너무 뭔가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편히 쉬자고 마음을 먹으니 어느 새 저녁이 되었고 자연인에 가까운 남자 셋의 배는 고파지기 시작했다.
딱히 누가 메뉴를 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어제 먹다 남은 고기 중 먼저 처분해야 할 것들부터 먹기로 했다.
지난 저녁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간소한 짐들을 가지고 아래로 내려갔다.
날씨도 쨍쨍했고 분위기도 조용하고 편안한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바로 이런 것이 내가 생각한 이상적 고기 파티가 아니던가!
고기를 구워다 와서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런데 약간 낌새가 이상했다.
파라솔 너머로 하늘을 올려다 봤다.
어두운 구름들이 무섭게도 몰려들고 있었다.
만약 바깥을 걷고 있었거나 뭐 집 근처 외부에서 뭐라도 하고 있었다면 바로 건물 안으로 대피했을 것이지만 이제 막 고기를 먹기 시작한 우리에게 그 정도 구름은 그냥 단순한 위협 수준이었다.
그런데 구름이 몰려오는 형세가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천둥이 치는 소리도 들려왔고, 바람도 솔찬히 세게 부는 것이 오감으로 느껴졌다.
마침내 수영장 관리인이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하던 것을 접고 들어가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하며 순찰을 돌았다.
우리는 곧 먹고 일어나겠다고 말한 뒤 속도를 올려 고기를 섭취했다.
관리인이 문을 닫고 나간 뒤 약 30초 뒤부터 장대비가 쏟아졌다.
도저히 파라솔로는 피할 수 없는 비였다.
하지만 아직도 고기를 다 먹지 못한 우리에겐 고기가 더 중요했고 비가 세차게 들이치지 않는 코너에 옹기종기 모여 서서 남은 고기를 거의 마셔버리듯 삼켰다.
그 와중에 르포 정신을 발휘해 찍은 사진. 화면이 뿌옇게 나온 이유는 모두 비 때문이다.
순식간에 수영장이 넘실거렸다.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대형 수해만큼은 피하고 싶었던 우리는 잽싸게 버릴 것들은 버리고 챙길 것들은 챙겨서 고속으로 수영장을 탈출했다.
재미 있었던 것은 우리가 고기를 굽던 곳의 반대 편에서 고기를 굽던 남자도, 우리가 들어가는 타이밍에 맞춰 같이 뛰기 시작한 것.
아무래도 자기 짐을 챙겨서 혼자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벅찼던 모양이다.
문을 열어 주자 고맙다는 말만 띡 던지고 잽싸게 자기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다소 정신이 없었긴 했지만 그렇게 찝찝하고 더럽고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런 기억 정도는 아니었다.
대충 역할을 분담하여 고기 먹는데 사용한 것들을 잘 정리하고 각자 할 일을 하다가 잠에 들었다.
토요일의 초대형 고기 파티가 형식 면에서 성공하고 내용 면에서 ㅡ 순전히 나의 관점을 기초로 보자면 ㅡ 실패였다면, 일요일의 소박한 고기 파티는 내용 면에선 좋았지만 형식 면에선 참패였다.
하지만 여행지가 아니라면 느낄 수 없는 그 즐거움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같은 경험을 해도 색다르게 느껴지고, 안 좋은 경험이라도 기분 좋게 기억되는 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닌가.
과거의 내가 여행이라면 질색을 했던 것은 여행이라는 테마를 너무 거창하고 대단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야기를 발전시키자면 여행에 대한 태도나 여행자의 가치관 따위로 화제가 번질 수 있기에 간단하게 줄이지만, 내 스타일 여행의 핵심은 역시나 얼마나 소소한 일상이라도 즐거움과 재미를 뽑아낼 수 있느냐인 것 같다.
그러기 위해 오늘도 나는 아무리 진부하고 작위적인 것일지라도 진지한 자세로 그 속의 재미를 탐구한다.
개소리는 이제 그만 OUT!
관련이 어느 정도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초등학생 때 함부로 던지던 개그가 생각난다.
곱씹을수록 미국에서 보낸 나의 세 번째 주말과 상당히 닮아 있는 것 같다.
갑 : 무섭고 더럽고 슬픈 이야기 해줄까?
을 : 응.
갑 : 호랑이가 똥 싸다가 죽었대.
을 : 그게 왜?
갑 : 호랑이는 무섭고 똥은 더럽고 죽은 건 슬프잖아.
을 :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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