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의 이야기를 한 포스트에 정리하려면 아무래도 디테일이 희생 당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만, 워낙에 별 일이 없는 한 주를 보냈기 때문에 딱히 희생될 디테일 같은 것은 없다.
보통 사람들한테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남은 여유에 어쩌다 사정이 맞아서 "놀러 가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미국에 온 이유엔 단순한 놀기와 관광만이 아닌 어떤 구체적인 목표가 있고, 내가 특별히 여행기에 언급하는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대개 그 목표에 시간을 쓰는 편이다.
아직은 남들의 호기심을 끌 건덕지도 별로 없지만 어차피 8월 말까지는 내가 미국에서 무슨 일들을 벌이고 있었는지 소규모로나마 공개될 예정이므로 그 별로 중요하지 않은 디테일은 일단 제쳐둔다.
생일 파티를 했던 월요일 다음 날인 화요일, 2012년 5월 29일은 정말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날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다음 날인 수요일, 2012년 5월 30일은 오전까지 빈둥거리다가 오후에 여름 학기를 위해 남아 있는 유학생들을 총동원해다가 농구장에 갔다.
버려진 주차장 어귀, 한 쪽에 허름하게 마련된 농구대를 두고 땀과 열정을 불사르며 농구를 하는 모습은 역시나 미국에 대한 나의 편견 + 빌어먹을 하이틴 영화들의 진부한 연출이 합작된 결과였고, 유펜 학생들을 위한 체육관에서 모이기로 했다.
생각보다 삼엄한 경비에 나는 유펜 학생증을 하나 빌려서 악의적이지 않은 사칭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학생증에 인쇄된 얼굴과 나의 얼굴이 닮지 않아서 들어갈 때 살짝 마음을 졸였지만, 프론트에 앉아 있는 미국인에게 아시아에서 온 안경 쓴 사람들은 대충 모두가 1명의 사람으로 인식되는 모양인지 별 탈 없이 데스크를 통과할 수 있었다.
약간 씁쓸한 마음은 뒤로 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들어가서 사진을 삑삑 찍어대면 의심을 살 것 같아 주머니 속 휴대폰은 조용히 내버려뒀지만 시설이 꽤나 좋은 편이었다.
한 3층이나 4층까지 올라갈 것 같은 규모였고 우리가 흔히 "헬스"라고 부르는 운동을 위한 시설이 넓은 공간에 깔끔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헬스장 안의 사람들도 적진 않았지만 워낙 공간이 넓어서 운동 기구 사용에는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이미 안에서 운동을 하며 농구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을 모아다가 농구장으로 향했다.
이 정도면 꽤 넓지?
평일 오후라 사람들이 꽤나 많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의외로 사람들이 적었다.
'확실히 공부를 잘 하는 학교라 학생들이 운동 같은 것은 잘 하지 않는 걸까…'하고 궁금해하려던 순간 바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서유기>를 보면, 태상노군이 손오공을 벌주기 위해 녀석을 약 만드는 솥에 가두고 49일간 불을 때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날 유펜의 농구장의 공기는 이제 막 불을 때기 시작한 솥 안의 그것과 거의 비슷했다.
단순히 온도만 보더라도 확확 더웠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높은 습도가 합세해 거의 여름 한낮의 온실에 온 느낌이었다.
운동이 끝나고 먹을 과일을 가져왔더라면 어느 새 뿌리를 내리고 자라 울창한 산림을 이루었을 기세.
오버는 그만 하고, 농구를 시작했다.
떨어질 대로 떨어진 저질 체력은 생각하지 않고 풀코트 5:5 경기에 참여해 빨빨거리며 뛰던 나는 거의 탈진 증세를 느껴 후반전에는 좀비처럼 걸어다녔다.
처음 보는 친구들과 이래 저래 인사했다.
눈에 띄지 않는 플레이로 무난한 인상을 심어주려던 나의 계획과는 달리, 뻥뻥 열린 찬스에서조차 제대로 슛을 넣지 못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며 네거티브한 인상만 깊게 심어준 것 같다.
한 세 판 정도 했으려나.
모두가 온 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상태에서 농구를 파하기로 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땀으로 범벅이 될 만큼 운동을 했다는 것 ㅡ 사실 이 날 내 땀의 팔할은 그냥 농구장 안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요, 나머지 이할이 진정 운동으로 인해 나온 땀이었으리라 ㅡ 에 기분은 상쾌했다.
집으로 와서 씻었다.
농구를 했던 친구 중 누군가가 그 날 생일이라고 했다.
같이 방을 쓰는 친구 둘은 볼링이라도 치면서 같이 놀기 위해 집을 나갔고, 뻘쭘함을 이기기 힘들었던 나는 그냥 집에 남기로 했다.
할 일을 처리하다가 슬슬 잠을 잘까 고민할 무렵 카톡으로 연락이 왔다.
생일이니까 기념으로 술이라도 살짝 먹기 위해 지금 모두를 이끌고 이 집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 그 내용.
집에까지 왔는데 자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이면서 그들의 분위기를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냥 좀 늦게 자야지 생각하고 대충 집 정리를 하며 그들을 기다렸다.
무리가 집에 들어왔다가 모두 빠져나가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1시간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취하기 위해 술을 먹는 것도 아닌, 말 그대로 술을 먹기 위해 술을 먹는 술 자리였다.
생일이라고 샀던 아이스크림 케이크 하나를 안주로 놓고 8명? 9명쯤 되는 남자들이 각종 술 게임을 통해 거대하기 짝이 없던 발렌타인과 폴란드 보드카를 아작내버렸다.
예상치 못하게 술을 꽤 먹어버린 나는 술 기운에 잠도 달아났고 해서 밤 늦게까지 컴퓨터로 이것 저것 끄적거리다가 늦게 잠에 들었더랬다.
숙취 없이 깔끔한 아침을 맞았고, 2012년 5월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역시나 오전에서 오후까지는 별 계획이 없었고 저녁에는 어제 이리 저리 사람들을 불러 모아 저녁을 먹기로 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시내 중심가로 나갔다.
미국에 오기 전, 미국은 처음인 나는 친구에게 내가 꼭 챙겨갔으면 좋겠는 것을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웬만한 것은 거의 필요가 없다고 하며 ㅡ 도착해서 조금 생활해보니 사실이었다 ㅡ 혹시나 드레스 코드가 있는 레스토랑에 가게 될지도 모르니 너무 캐쥬얼한 옷만 가져오지는 말라는 이야기를 덧붙였는데, 바로 이 날이 그 캐쥬얼한 옷만 입기엔 좀 그런 날이었다.
나름 깔끔하게 차려 입었다.
저녁 식사를 같이 할 사람들과 집 근처에서 만나 택시를 탔다.
레스토랑 이름은 바클레이 프라임(Barclay prime).
좀 분위기가 있음?
이미 많이 와본 친구가 알아서 메뉴를 골랐다.
확실히 가격대가 꽤 있는 레스토랑이었던 만큼, 취향 대로 아무 것이나 골라 먹기가 쉽지 않았다.
애피타이저로 나온 음식 몇 개를 냠냠 먹고 있는데 서버가 이상한 접시를 들고 왔다.
쓱 보니까 고기 써는 칼을 몇 가지 들고 왔던데 짧은 설명을 마치고 우리보고 원하는 나이프를 집으라고 했다.
남자답게 투박한 모양을 가진 나이프를 골랐다.
일행은 총 다섯 명이었으나 이 날 거의 처음 본 것과 다름 없는 두 사람의 나이프까지 뺏어와서 사진을 찍기에 나는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냥 대충 찍었다.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출발할 때는 사람이 네 명이었지만 근처에서 인턴을 하던 친구가 파티에 합류했기 때문에 택시를 타기가 좀 뭐해졌다.
배도 부르고 날씨도 선선하고 하니 그냥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기왕 중심부까지 나왔으니 필라델피아에서 맛있다고 소문난 아이스크림을 후식으로 먹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부정적인 의사를 밝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컵 바닥을 보고 있으면 합성 같은 느낌이 나는데 당연히 합성일 리가 없다.
요거트 아이스크림을 기반으로 각종 토핑을 올려 먹는 흔한 아이스크림 집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뚝딱 먹고 천천히 걸어 집까지 갔다.
밤에는 별 일이 없었다.
5월의 마지막 날 밤은 그렇게 별 일 없이 지나갔다.
2012년 6월 1일의 거의 유일했던 일정은 다음 날에 있을 고기 파티를 위해 전에 갔던 한인 마트에 다녀오는 것이었다.
지난 번과 조금 다른 점을 찾자면, 먼저 마트에 가기 전에 시내 근처에 있는 술집에 가서 고기와 함께 먹을 술을 샀던 것.
집카를 꺼내 시내로 나갔다.
확실히 시내에는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근처 백화점 주차장에 주차를 한 뒤, 나까지 3명이었던 파티를 적당히 분산, 한 명은 백화점으로 보내고 나와 내 친구는 술을 사러 갔다.
술이라고는 대형 마트나 편의점에서 찔끔찔끔 사봤던 내게 미국의 술 가게는 참 신박한 공간이었다.
이렇게 보이는 공간이 사진 왼쪽으로 하나 더 펼쳐져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편의점 정도 사이즈랄까.
서양인들의 와인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진열대가 와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와인이라고는 벌거죽죽한 것과 투명할랑말랑 하는 것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의외로 술발이 받기 때문에 함부로 먹다가는 X되기 십상이라는 것밖에 모르는 나는 그냥 쓱쓱 지나가면서 구경했고, 와인을 고르는 것은 그냥 친구에게 맡겼다.
그런데 대충 고르는 것을 보아하니 이 친구도 그렇게 와인에 정통한 것은 아니고 대충 병이 큼직큼직한 것들 중에 세일을 하는 것 위주로 고르는 것 같았다.
진실은 알 수 없으므로 대충 여기까지.
큰 병으로 7병인가를 사고 밖에 나왔다.
차를 끌고 나와야 했고 내가 밖에서 뭔가를 사가지고 들어가는 모습을 주차장 관리인에게 보이면 안 됐기에, 미리 만날 곳을 정해서 내가 그 곳에 가 있으면 친구가 백화점에 들어갔던 다른 친구와 함께 차를 타고 나를 픽업하기로 했다.
워낙 도심이 좁았기에 핵심이 되는 거리 이름 몇 개만 알아두면 헤멜 일은 없는 곳이었다.
무거운 와인을 낑낑 들고 만나기로 한 사거리에서 조금 기다리자 친구가 차를 끌고 왔다.
한인 마트로 가서는 약 25인분에 해당되는 고기 파티의 재료를 샀다.
역시나 가장 중요한 것이 고기의 양이었는데, 눈 대중이라고는 없는 남자 셋이서 고민할 문제치고는 꽤 중요하면서, 어려운 문제였다.
지나가는 사람들 ㅡ 대상은 왠지 고기 좀 썰어봤을 것 같은 아줌마들 위주로 ㅡ 을 몇몇 붙잡고 이 정도 고기면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 관심 없이 건성 건성 대답해주었다.
그래서 그나마 MT 경험이라도 좀 있는 내가 총대를 매고 양을 결정했다.
냉동 고기에서부터 양념 고기, 쌈장, 야채 등 먹는 것들은 물론, 호일이나 그릇, 컵 같은 먹는 데 필요한 물건들까지 죄다 사고 밖에 나오니 집카의 반환 시각이 우리를 압박해왔다.
폭풍 드라이빙으로 집에 돌아왔다.
짐은 대충 냉장고에 정리해뒀다.
지난 주말의 빅 이벤트였던 고기 파티의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으로 넘긴다.
뭐 사진도 많고 화려하고 할 말도 많고 그래서 넘기는 게 아니고 그냥 분량상의 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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