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전설

| 2012. 7. 2. 09:19

여행기를 쓰려다가 써야 하는 내용이 탬파베이의 야구 경기를 보러 간 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니홈피에 예전에 썼던 글을 퍼오고 싶어졌다.
눈에 띄는 오탈자를 수정하고, 외래어 표기법 규정 따위에 들어가 있지 않는 각종 고유 명사들 중 현재 내 표기법과 맞지 않는 것들 몇 개를 고쳤다.
어릴 때 쓴 글을 아주 오랜만에 읽어 보게 되었는데 내 글 솜씨가 부쩍 늘었다는 것이 실감난다.
오랜 만에 듣는 선수들의 이름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아련함에 잠깐 빠지기도 했다.

글을 작성한 시기는 2008년 9월 21일 정오 무렵으로, 확실히 이 날인지는 모르겠지만 탬파베이 레이스가 사상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이 확정된 날 근처일 게다.
아래 올라온 사진을 보면 아직도 벅차오르는 감동이 느껴질 만큼 내게, 다른 레이스 팬들에게, 그리고 팀에 몸을 담고 있던 모든 선수들과 관계자들에게는 인생의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선수들의 잦은 부상으로 영 맥을 못 추고 있는 2012년의 무더운 여름 한가운데서 훌륭한 분위기 전환용 포스팅이 되길 바라며, 잡설은 여기서 마친다.
사진을 포함해 아래 내용부터 진짜가 시작된다.

무슨 올림픽때 미리 찍어둔 짤막한 영상들을 그 선수가 메달을 따자마자 빵빵 방송에 날려보내는 듯한 '뻔한' 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꼭 짚고 넘어가야만 속이 시원할 것 같다.
가을의 전설을 만들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던 슬픈 가오리들의 소망이 올해에는 이루어졌다.
아니 사실은 그런 소망이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최소한 그것을 실현해낼 수 있을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요 망할 놈의 탬파베이 레이스(작년까지만 해도 데빌 레이스)라는 팀은 전혀 매력적이지 못한 팀이다.
98년에 창단되어 2007년까지 단 한 번만 제외하고 죄다 지구 꼴찌, 그 단 한 번을 제외하면 죄다 70승 미만(전체 약 162경기).
같은 해에 창단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는 2007년까지 한 번의 월드시리즈 우승, 그 것을 제외하고 디비전 1위는 3번을 기록했다.
같은 주 마이애미에 구장을 두고 있는 플로리다 말린스 또한 98년부터 2007년까지 월드시리즈 우승 한 번을 포함해 해마다 그럭저럭 준수한 성적을 냈다.

그 동안 어떻게 이런 팀의 팬이라고 자처하며 다닐 수 있었을까?

내가 메이저리그라는 것 자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중3때. 우연히 EA에서 나온 메이저리그 야구 게임을 시작하면서부터 였다.
나는 그 게임을 시작할 당시 미국 야구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했다.
박찬호의 경기를 꼬박꼬박 챙겨 본 사람도 아니고, 가끔 뉴스에서 틀어주는 박찬호의 팀 메이트들 ㅡ 숀 그린, 개리 셰필드, 무슨 개그니?, 마이크 피아자, 케빈 브라운 ㅡ 정도의 이름이나 고작 손꼽고 있던 그야말로 꼬꼬마였다.
게임을 딱 틀고는 프랜차이즈 모드(여러 시즌동안 한 팀으로 플레이하는 것)를 시작하려 했던 나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무슨 팀을 고를까?

기왕에 고르는 거 제일 후진 팀을 고르자.

이 선택이 인연이 되었다.
잘못된 투자로 돈을 펑펑 날려버린 구단 프론트는 몹시나 쪼잔해있던, 팬들은 몇 년동안 구단의 삽질을 지켜보며 굉장히 소심해져 있던 그 때, 그 때 태평양 건너 대한민국의 중학생 3학년은 이 아기자기한 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당시 탬파베이 '데빌' 레이스는 시애틀에서 10년간 감독을 맡던 명장 루 피니엘라를 외야수 랜디 윈과 트레이드를 통해 팀에 모셔와 새로운 분위기 반전을 꾀하고 있던 차였다.
2003년부터 여태까지 오기까지 매 해마다 중요한 체크포인트들이 있었는데 이 해에는 역시 칼 크로포드와 로코 발델리라는 두 보석이 반짝이기 시작했다는 점.
2002년보다 8승을 더 거둬 63승 99패로 시즌을 마쳤다.

2004년으로 넘어는 오프시즌에서 트레이드를 통해 왕년의 스타 티노 마르티네즈와 좌완의 거인 마크 헨드릭슨를 데려오고, FA 계약을 통해 호세 크루즈 주니어를 비롯한 자잘한 선수들을 보강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순간은 바로 스캇 카즈미르와 빅터 잠브라노의 트레이드.
선발투수 부재에 시달리던 메츠에서 나름 탬파베이의 에이스였던 빅터 잠브라노를 데려가는 대신 반짝반짝 빛나던 좌완 유망주 스캇 카즈미르라는 최고의 선물을 탬파베이에 안겨주었다.
물론 탬파베이에서의 첫 시즌에서 썩 좋은 결과를 보여주진 못했지만(8경기 등판 방어율 5.67), 팬들은 그의 화려한 삼진쇼에 큰 기대를 걸기 시작했다.
그 외에 B.J.업튼이 19살의 나이로 메이저리그 무대에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는 것 정도?
또한 팀 창단 처음으로 70승 달성에 성공했으며, 또한 처음으로 지구 5위에서 벗어나 4위의 성적을 올렸다.

눈에 띄는 트랜스액션 없이 시작된 2005시즌.
탬파베이의 몇 안되는 팬을 흥분시킨 것은 카즈미르의 놀라운 피칭이였다.
21살의 나이로 32경기에 등판, 10승 9패 방어율 3.77을 기록하며 메츠 팬들의 가슴에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아쉬움을 선사했다.
그것 말고 별로 안 중요한 사실들로는 호르헤 칸투와 쟈니 고메즈의 선전, 노모 히데오의 삽질, 뭐 그 정도?
67승 95패로 다시 리그 5위에 털썩.

'05에서 '06으로 넘어오는 오프시즌에는 큰 변화가 하나 있었다.
팀의 사령탑이 호통쟁이 루 피니엘라에서 2004시즌 보스턴 차기 감독으로 유력했던 조 매든으로 교체된 것.
그것뿐만 아니라 구단의 운영진이 죄다 물갈이되며 새로운 똘망똘망한 단장 앤드류 프리드먼이 취임했다.
크게 기대를 걸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팀의 변화를 꿈꿨던 나는 그 이후로 팀이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며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데...
어쨌든 시즌 중반에 여태까지 팀의 기둥이었지만 컨텐더를 지향한다고 징징대던 어브리 허프를 휴스턴으로 트레이드시켰고, LA 다저스로부터는 트레이드를 통해 현재 주전 포수 디오너 나바로와 서재응 등을 얻어왔었다.
또한 24살의 제임스 쉴즈가 제대로 선발 등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
확실히 주전들을 내보내고 별 다른 보강도 없는 상태에서 팀이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었다.
61승 101패로 창단 후 두 번째로 안 좋은 성적을 올리고는 시즌을 마쳤다.

오프시즌이 확실히 달라졌다.
탬파베이는 활력을 얻고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준수한 성적을 올리던 내야수 아키노리 이와무라와 싸인, 만년 유망주의 칭호를 이제는 버릴 때가 되었던 카를로스 페냐와 싸인, 그 외에 과감히 마이너 유망주들을 선발로 기용, B.J.업튼과 델몬 영이 주전으로 나선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마운드에는 에드윈 잭슨과 앤디 소낸스타인이 등장했다.
기대되는 2007시즌이 시작.
대전에서의 하루하루를 탬파베이의 야구 결과와 시작하는 때가 도래했다.
시즌 중반에는 타이 위긴턴을 주고 댄 휠러를 데려와 불펜을 보강했다.
뭐 그럭저럭 시즌은 끝났고, 그 결과는 대성공.
비록 팀의 성적은 썩 좋지 못했지만(66승 96패, 역시나 지구 꼴찌 5위), 유망주들의 개인 성적은 우왕ㅋ굳ㅋ였다.
특히 카를로스 페냐는 46홈런을 터뜨리며 모든 탬파베이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리고 오프시즌.
베테랑 마무리 트로이 퍼시벌을 FA 계약에서 줏어오는 것을 시작으로, 클리프 플로이드, 에릭 힌스케 등을 데려왔으며 전미 최고의 유망주로 평가받던 델몬 영과 몇몇 선수들을 패키지로 제이슨 바틀렛과 맷 가자를 팀 로스터에 추가시켰다.
마이너에서 질풍 노도의 시기를 보내던 에반 롱고리아를 주전 3루수로 내세웠고, 발 빠른 B.J.업튼을 중견수로, 늙은 유망주 그랜트 밸포어를 불펜진에 합류시키며 탄탄한 조직력을 갖춘 팀을 구성하는데 성공했다.
시즌 초반 카즈미르가 부상에서 회복해 돌아왔고, 타자들의 부상이 끊임없이 이어질 때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에릭 힌스케나 윌리 아이바 등의 활약으로 야금야금 승리를 챙겨나갔다.
인저리프론으로 증명된 로코 발델리가 시즌 중반 많은 기대와 함께 등장했지만 이내 부상으로 빠지고 기대를 걸지 않았던 밸포어는 위력적인 투구를 선보이며 퍼시발이 부상으로 빠진 불펜진에 확실한 해답이 되어주었다.

시즌 초에는 '이러다 못하겠지', 조금 지나면서 '에이 설마 ㅋㅋ', '응? 아 정말?' 하던 게 '될 것도 같은데....', '어? 어?!!?!' 이러는 사이에 정말 플레이오프에 진출.
경기를 직접 보는 건 물론 불가능했지만 팬 포럼의 뜨거운 열기는 정말 내가 몇 년 동안 이 절망의 팀의 팬이라 자처한 사실을 자랑스럽게 만들었다.

만화 <슬램덩크>에서 북산은 고교 최고의 팀 산왕을 물리치고는 그 다음 경기에서 어이없는 패배를 하게 된다.
탬파베이의 입장에서는 이제 산왕을 꺾은 셈이다.
그렇다고 모든게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나보단 감독과 선수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남은 시즌을 잘 마무리하여 기왕이면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1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편이 훨~씬 쉬운 플레이오프 대진표를 가져다 줄 것이다.
아직 긴장 풀지 말고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