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와 진지에 대하여

| 2013. 2. 6. 13:22

요즘 들어 내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팀 블로그 ㅡ 당사자들이 이 사이트를 뭐라고 생각하든 일단 내가 보기엔 팀 블로그의 개념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ㅡ ㅍㅍㅅㅅ의 한 포스팅에 남겼던 댓글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글.

그런데 제기랄 글을 다 써놓고 보니 원래의 댓글이 훨씬 더 집약적이고 논리적이며 간결한 느낌이다. 따라서 우선 원 댓글을 인용하고 그 아래 부가 설명 ㅡ 이라고 쓰고 그냥 거추장스러운 사족으로 읽는다 ㅡ 이 달린 글을 첨부한다. 퇴고 따위 하지 않는 내 글 쓰기 습관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할 때.

가장 최근에 읽은 러셀 책의 서문 ㅡ 편집자의 말이었든 뭐였든 누가 쓴 글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ㅡ 에서 러셀을 반어법을 참 잘 쓰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그 반어법의 예를 하나 인용해놓고는, 이것이 반어라고 생각하지 않는 독자는 없으리라 믿는다라는 식으로 쓸데없는 강조를 해놓은 것을 보고, 그래도 러셀 책을 읽겠다고 고른 사람에게 이런 지나친 친절함이 필요한 것인지, 괜히 독자들의 김만 빼놓는 것은 아닌지 회의적인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수많은 댓글들에서 보이는 작금의 코미디를 보아하니 누구에게는 이해에의 사족인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이해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아무리 나 스스로에게 양보를 해도 이 문제 상황의 책임 소재를 글쓴이에게 떠넘길 수는 없는데, 그도 그럴 것이 정상적인 고등 교육 ㅡ 이 때의 고등이란 대학교 수준의 교육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고등학교 교육 과정을 의미한다 ㅡ 을 마친 사람이라면 반어가 무엇인지 모를 리 없고, 심지어 그조차 자기네들의 삶 속에서 반어의 해학이 주는 골계미를 즐기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약하면 이는 말초적이지 않은 유머를 즐길지 모르는 사람들의 병이요, 나아가 쓸데없는 것에 거품을 물고 진지 빠는 특유의 "그들"만이 가진 문화의 태생적 문제다.

집단 이성의 힘을 맹신하는 내게, 가끔씩 닥쳐오는 이런 상황은 나를 충분히 좌절시킬 만큼 습하고 어두운 느낌이다. 오늘은 술을 먹어야지.

물론 편집장의 저 주옥 같은 글과 그 아래 달려 있는 줙 같은 댓글들을 직접 읽어 보는 편이 내용을 이해하는데 더 많은 도움이 되겠지만 그럴 의지도, 시간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줄거리를 정리해 보자. 포스트의 주 내용은 오늘의 유머 사이트를 종북 관련 사이트라 규정 짓고 거기서 대북 활동을 펼쳤다는 국정원의 헛소리를 반어의 즐거움을 사용해 풍자하고 비판한 것. 그 아래 달린 댓글들이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구분이 되는데 첫 번째는 우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유를 종북으로 몰다니 이거 완전 일베충이네 ㅉㅉ.'의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 두 번째는 '확대해석하지 마라 일베충아.'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부류는 앞선 두 부류의 사람들의 무지를 탓하는 사람들이다. 문제 상황은 이 두 문장으로 정리가 가능하다.

하루에도 수백 개의 이슈가 부침하는 온라인 세상에서 사실 이 정도의 일이야 한낱 단편적인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단순해 보이는 이 사건의 이면을 바라 보면 나름 우리 사회에 대한 의미 있는 고찰이 가능하다고 본다. 주제는 제목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무지와 진지. 엄청나게 재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준수한 유머를 갖추고 있는 이 글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에서 나는 이 사회에 만연한 폭력적인 무지와 진지라는 코드를 읽었다. 아니, 솔직히 이와 비슷한 광경을 지난 몇 년간 지켜봤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점을 느끼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비단 이 사회의 문제가 이런 것뿐이겠냐마는.

가장 최근에 읽은 러셀의 책 《런던통신 1931-1935》의 서문 ㅡ 편집자의 말이었든 뭐였든 누가 쓴 글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ㅡ 에서 나는 조금 재미 있는 대목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글을 썼던 누군가는, 러셀을 반어법을 참 잘 쓰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그 반어법의 예를 하나 인용해놓고는, 이것이 반어라고 생각하지 않는 독자는 없으리라 믿는다라는 식의 쓸데없는 강조를 해놓았더랬다. 물론 이 같은 언급은 앞으로 이어질 글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친절한 해설로서 등장한 것이렸다. 하지만 내가 저 구절을 읽었을 때 느낀 점은 그와는 조금 달랐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래도 러셀 책을 읽겠다고 고른 사람이 노학자의 반어법 하나 알아차리지 못하고 '아니, 이 사람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가 있느냐!'라는 식으로 반문을 하는 상황은 도저히 내 이성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글쓴이의 배려는 지나친 친절함으로 비춰졌고 꼭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하려고 했는데 부모님께 공부 빨리 안 하냐는 잔소리를 듣고 토라져버리는 어린 아이의 마음처럼 괜히 독자들의 김만 빼놓는 것은 아닌지 회의적인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많은 댓글들에서 보이는 작금의 코미디를 보아하니 절절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정말 너무나도 당연해 보여서 사족 그 이상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던 그 구절을 쓴 사람은, 나름 러셀 중년의 ㅡ 하도 오래 살다 간 사람이라 나이 60대 정도를 두고 노년이라고 표현하기가 어렵다 ㅡ 글을 이곳 저곳에서 모아 편집했던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책에 실린 글만 놓고 봤을 때 그 글에 담긴 의미, 그것이 보통의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느낌 등을 세상에서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일 것이 분명하다. 바로 그 사람이 이런 사족을 굳이 달았다는 것과 댓글에서 난무하는 바보 같은 상황이 접목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누구에게는 이해에의 사족인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이해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문제 상황을 파악했다면 책임 소재를 묻는 것이 순서. 아무리 나 스스로에게 양보를 해도, 즉 내 생각과 반대에 선 비이성의 제국민들의 불쌍한 상황을 참작하더라도 이 문제 상황의 책임 소재를 글쓴이에게 떠넘길 수는 없었다. 정상적인 고등 교육 ㅡ 이 때의 고등이란 대학교 수준의 교육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고등학교 교육 과정을 의미한다 ㅡ 을 마친 사람이라면 반어가 무엇인지 모를 리 없고, 심지어 그조차 자기네들의 삶 속에서 반어의 해학이 주는 골계미를 즐기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부분에서 문제가 있었던 사람들, 주제어를 빌려 오면 만연한 무지의 늪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그 문제의 원인이 비교적 간단한 만큼 손쉽게 문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 공부하자. 공부를 하면 된다. 반어법의 정의가 무엇인지부터 알고 그 반어법이 실제로 사용되는 예가 무엇인지 주변에서 한 번 찾아보는 것이다. 물론 이 포스트 맨 위에 링크가 걸려 있는 ㅍㅍㅅㅅ의 오유 관련 글은 반어법이 제대로 구현된 좋은 예 중의 하나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이 무지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지함에 있는 사람들은 진지함이라는 잣대 자체가 절대적으로 상대적인 만큼 그 늪에서 헤어나오는 것이 쉽지는 않아 보인다. 사실 이 진지함, 달라이 라마식의 이분법을 적용한다면 두 가지 진지함 중에 쓸모없는 진지함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선 사회 다방면에서 심층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는 비단 내가 원체 진지함이란 일종의 감정 자체를 지양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반어법"의 달인인 러셀은 위에서 언급된 《런던통신 1931-1935》에서 이 쓸모없는 진지함을 어떻게 그 근본에서부터 없앨 것인지에 대해 논한 바 있다. 리뷰 포스트에도 인용했던 그 구절을 아래에 다시 한 번 인용해 본다.

성인들이 심각한 주제에 관한 논쟁을 관대하게 받아들이려면 학교에서부터 관용을 배우는 과정을 시작해야 한다. 누군가 악역을 맡아 일주일에 한 번 전교생 앞에서 매우 인기 없는 명제, 말하자면 '축구는 비열한 스포츠다' 같은 명제를 주장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그를 반박하는 게 학교의 주요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만약 반박할 수 없다면 그동안에는 그 의견을 수용해야 한다. 이내 그 학생은 정치적인 주제나 경제적인 주제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테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패배는 유감스러운 일이었다'거나 '유색 인종에 대한 착취는 마땅히 중단되어야 한다' 같은 주제들로 말이다.

그런 의견들을 참을성 있게 들으며, 비난 대신에 토론으로 그것들을 대해야 했던 젊은이들은 세상 누구의 견해를 듣더라도 냉정을 잃을 염려 없이 세상에 포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교육을 받은 다음에는 늘 이성을 앞세워 살아갈 것이며 더 이상 자신의 편견을 도덕적 원칙으로 격상시키지 않을 것이다. 현재 정치적으로 중요한 대다수 신조들이 그들에게는 먹히지 않을 텐데, 그런 신조들이 사라짐으로써 현대 세계의 거의 모든 거대 악들도 자연히 사라질 것이다. - 논쟁을 좋아하게 되면

혹시나 하는 이야기지만 설마 이런 부류의 진지함이 무슨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려 한다. 그럼으로써 그 진지함을 지양하는 나조차 그것을 지향하는 것처럼 비춰질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글이 재미 없으니 결론부로 빠르게 워프를 해야겠다. 여태까지의 내용을 각각 내용에 맞춰 비약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반어라는 것 자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문제란 말초적이지 않은 유머를 즐길지 모르는 사람들의 병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상황을 입에다까지 떠먹여주지 않으면 웃지 못하는 이 시대의 슬픈 자화상. 나아가 진지함의 문제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쓸데없는 것에 거품을 물고 진지 빠는 특유의 "그들"만이 가진 문화의 태생적 문제라 칭할 수 있다.

집단 이성의 힘을 맹신하는 내게, 가끔씩 닥쳐오는 이런 집단적 광기 상황은 단순히 집단 이성이라는 것 자체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될 뿐만 아니라 존재의 여부를 넘어 그것이 가진 힘에 강한 신뢰를 부여하는 나 같은 사람을 좌절시키는 커다란 요소이기도 하다. 굉장히 불쾌하고 어두운 느낌이지만 좀 더 넓은 관점에서 이 또한 점진적 진보의 과정에서 피해갈 수 없는 하나의 부침이라 생각하고 인내하며 지내기로 한다.

사족이지만, 나는 저 날 내 오랜 술 친구와 함께 소주 세 병과 맥주 1000cc를 나눠 먹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