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2013. 5. 29. 02:21

책을 읽은 기간을 봤을 때 "정독"이라는 표현을 붙이기에 아깝지 않은 시간을 이 책에 소비했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를 이렇게 주욱 정독하고 나서 든 생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뭐라 한 마디로 정의내리기 어려운 사람이지만 이 사람은 거의 99%의 확률로 ㅡ 최소한 이 책에서 보여지는 모습만 보자면 ㅡ 내가 바로 그런 타입의 사람이라고 종종 말하는 바로 그런 타입의 사람이다. 너무 그런 타입 그런 타입하면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는 것 같으니 그런 타입을 이하 "그런 타입"이라고 표현하기로 하자. 이 그런 타입의 사람들이 가지는 공통점은 고학력에 멘탈이 굉장히 말랑말랑하며 적당한 필력을 바탕으로 본인의 상황을 모르는 타자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자신의 어떤 상황에 대해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편이다. 그러나 그 본인의 상황이라는 것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과연 저렇게까지 표현해야 했을 정도로 극단에 치달았었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게끔 거시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ㅡ 때로는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고 딱 봐도 인간 군상에서 흔히들 벌어지는 일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는 무작정 진지병에 휩싸여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중2병과는 구분을 지을 필요가 있는데 그들 이성의 고상함이나 표현 방식면에 있어서 중2병의 그것보다는 조금 더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수준이기 때문일 터.

2. 그렇다. 나는 그런 타입의 사람을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내가 이미 그런 타입이라고 성급하게 일반화를 짓는 이유는 바로 그런 타입의 사람이 내 주변에 심심치않게 존재한다는 것의 방증.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다면 사실 나는 그런 타입의 사람을 선호하지는 않지만 주변에 두는 것 정도는 어떻게 그럭저럭 괜찮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되겠다. 1번의 장광설에서도 얼핏 내세우긴 했지만 그들의 실제 삶, 즉 글과는 상당한 괴리감이 있는 그 실제 삶 속에서 그들을 만나는 것은 생각보다 별 문제가 없다. 오히려 적당한 이성과 그 정도의 필력을 뽑아낼 수 있는 일종의 센스를 갖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과 대화하는 일은 꽤나 생산적인 결말로 끝날 때가 많다[각주:1]. 거슬리는 것은 그들의 글이다. 정확히 어떤 메카니즘을 통해 그런 사람으로부터 그런 글이 뽑히는 것인지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어쨌든 그들의 글은 그들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그런 글을 잘 읽지 못하거나 이마에 주름이 생길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읽곤 한다.

이런 글귀는 참 읽기가 힘들다.

3. 결론은 뻔하다. 나는 이 책을 펼치고 나서 덮을 때까지 도저히 만족스러움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왜 이런 철 지난 감성팔이를 읽고 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웠고 굳이 잠을 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또는 그냥 전공책 읽는 것에 시달린 내게 한글로 된 활자를 읽는 즐거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면 언제든지 책장에 박아둘 만한 책이라는 생각을 내내 했다. 전혜린은 분명히 타고난 글쟁이다.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쓰는 글은 항상 최선을 다해 쓰려고 하는 것이 20대 중반인 나의 눈에도 선하게 보인다. 형식적인 면에서는 좋은 글이지만 도저히 그 내용 면에서는 "좋다"라는 평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그럼 마지막 결론으로 나아가기 전에 그 형식적 훌륭함과 내용적 부실함이 공존하는 것이 무슨 느낌인지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아무 것에도 자신이 없었고 막막했고 완전히 고독했던 내가 겪은 뮌헨의 첫가을이 그런데도 가끔 생각나고 그리운 것은 웬일일까? 뮌헨이 그때의 나에게는 미지의 것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인지 또는 내가 뮌헨에 대해 신선한 호기심에 넘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안개비와 구라파적 가스등과 함께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때의 나의 젊은 호기심인지도 모른다.

나의 다시없이 절실했던 고독인지도 모른다.

내가 만약 다시 구라파에 간다면 나는 우선 커피를 마시겠다. 여기서는 먹을 수 없는 생크림을 잔뜩 넣어서. 내가 만약 뮌헨에 다시 간다면 물론 우선 맥주를 일 리터짜리 족기로 하나 숨도 안 쉬고 단숨에 마시겠다. 쓰고 향기롭고 입술에 부드러운 호프의 냄새 속에서 나는 나의 잊어버린 이십대를 다시 되찾을 것이다.

뜨거운 돌과 땅 위에 쏟아지는 스콜에 피어 오르는 무지개, 피부가 다시 소생하고 고무나무와 야자수의 냄새가 한창 짙어지는…… 그런 곳에서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시원한 방갈로와 밤마다 우는 밀림의 온갖 짐승들의 심포니…… 때로는 호랑이의 기습도 받고 검둥이 하인은 매운 커리와 시원한 위스키ㅡ소다와 목욕 후에 몸에 감을 긴 원색 무늬의 헝겊을 준비할 것이다. 생은 얼마나 단순해질 수 있는 것일까?

그들은 스스로의 생을 택하지도 살지도 않았으므로 결국 남의 생(아이들의 또는 남편의 생) 속에서 그 보상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자기 자신이 아무런 생활도 갖지 않은 어머니가 아이들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은, 그리고 환멸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인 것이다. 가장 풍부한 개인적 생활을 가진 여자만이 아이로부터 가장 적은 요구를 한다.

4. 하지만 문득 그녀가 1930년대에 태어나 1960년대에 숨을 거둔 사람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내가 1980년대 후반에 태어났으니 생년만 따지자면 약 반 세기 이상의 격차가 있는 셈이다. 바로 그 사실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순간, 뭔가 무릎을 탁 칠 만한 깨달음이 왔다. 최첨단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삶의 양식이 빠르게 바뀌어 가는 21세기에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고전적인 방식으로 살아갔던 50년 전에도 그런 타입의 사람이 있었다. 아마 그들은 그 전부터 존재해왔을 것이다. 인류의 유구한 역사를 반추했을 때 아마 내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시대의 그 이전부터 그들은 자신들만의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 타입이란 것은 피할 수 없는 무언가였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그 가치관을 통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을 것이다. 역시나 말로 옮기기는 힘들지만 갑자기 그들이 그들의 글을 통해 진정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이해가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과연 나는 전혜린의 글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이 근거 없는 해탈감은 진정한 것일까, 고민하던 찰나에.

5. 바로 다음 문장을 마주하게 되었고, 나는 아마 드디어 그런 타입의 사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자아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끊지 말고 자기를 미칠 듯이 사랑하고 아끼되, 자기의 추나 악을 바라보는 지성의 눈동자도 눈감지 말아줘.

〈南獨 뮌헨에서·1956년 1월 27일·너의 언니〉

그리고 그런 타입의 전형을 보여주는 예로 집어놨던 다음 문장들도, 예전과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기억해두겠다며 표시했던 다른 부분들도 모두 전과는 다른 의미로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남에게 보여서 부끄러운 사랑은 마약 밀매상적인 요소가 있다.

그것은 없느니만 못하다.

대낮을 견딜 수 있는 사랑이라야 한다.

공부할 때와 사랑할 때를 분명히 분간하고 긴 설명 없이 사랑하지 않느냐고 의향을 묻고 그 대답이 노(Nein)인 경우에는 서슴없이 다시 인식에 몰두하거나 딴 대상을 찾는 그들.

6. 다른 사람에 비해 넓다고 자부하지만 실제로는 좁디 좁았던 내 가치관을 조금이라도 더 넓힐 수 있었다. 나도 일주일 정도 머물러 있던 뮌헨에 대한 이야기도 좋았고 딸에 대한 헌신, 동생에 대한 탈가족적 애정 역시 좋았다. 끊임없이 불안해하는 와중에서도 사명감을 찾는 모습도 좋았고 그런 그 또한 일상의 소소함을 느끼는 방식은 다른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사실도 좋았다. 책의 편집은 굉장히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에세이 집을 출간한 출판사의 노력도 좋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훌륭한 책이다. 최소한 나에게는 말이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전혜린에세이1)

저자
전혜린 지음
출판사
민서출판사 | 2002-01-1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독일 유학후 대학교수로 생활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저자의 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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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술이 올바른 사고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