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된 책을 읽었으니 한글로 번역된 책도 읽어 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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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된 'The Problems Of Philosophy'를 읽는데 거의 3주의 시간이 걸린 데 비해 '철학의 문제들'을 읽는 데는 약 4일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책이 훨씬 또박또박 잘 읽혔던 이유는 내가 이미 영어로 된 책을 상당히 꼼꼼하게 읽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 책의 번역이 상당히 잘 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이유는 애초에 러셀이 글을 참 쉽게 썼기 때문일텐데 방금의 두 이유도 이를 기반으로 성립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한글로 된 책을 주욱 읽어 보니 확실히 책에 대한 이해도가 전반적으로 쑥쑥 높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러셀은 '철학의 문제들'에서 모든 철학에 대해서 다루기보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한 인식론과 관련된 부분만 서술한다.
그렇게 내용을 간략하게 줄인 다음에도 그는 가급적이면 일상적이고 쉬운 말로 ㅡ 영어로 된 책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러셀은 이 책에서 상당히 구어체의 말투를 구사하고 비트겐슈타인은 그 점을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ㅡ 논점을 조목조목 설명한다.
그 정도로 일반 독자들을 위해 배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렇게 손쉽게 술술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책의 내용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어느 정도 앞에 해놓은 것도 있고, 번역된 책으로 읽으나 원서로 읽으나 이해 정도에 있어 엄청난 차이는 없으므로 이 포스트에서 내용을 소개하는 것은 중복, 리던던시(redundancy)에 불과하다.
따라서 생략한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내용 중에 철학 그 자체에 대해 논하는 부분은 굉장히 흥미롭고 일반 대중에게 큰 도움이 되는 부분이다.
이 책에 나온 여러가지 철학적인 이야기 ㅡ 비단 이 책에 실린 이야기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닌, 모든 철학적인 지식을 포함해서 ㅡ 는 그 자체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는 하지만, 내 생각에 따르면, '철학'이라는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학문이 자신의 주제에 어떻게 접근하는지, 어떻게 분석하는지, 어떻게 비판하는지 그 사고의 과정과 논리의 전개를 익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나에게는 철학에 대해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훨씬 재미있고 유익하게 느껴진다.
단순히 철학적인 지식을 머리 속에 꾸역꾸역 집어넣는 것은, 물론 무엇이라도 배운다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하지만 그 행위의 고됨에 비해 아주 낮은 성과를 이룬 것이다.
철학이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바는 철 지나간 철학 지식을 쌓는 것에 있지 않다.
우리가 철학을 통해 추구해야 하는 것은 철학적인 사고 방식이고 그런 사고 방식은 최소한의 기본 지식만 있다면 충분하다.
그리고 이 책이 훌륭한 철학 입문서로서 평가 받는 이유는 이 책이 심오한 진리를 탐구했던 옛 철학자들의 낡은 사고 방식을 열거하는, 전통적인 철학 서적의 본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학의 문제들'은 우리가 철학적인 문제를 처음에 제기하는 방법에서부터 시작해서 논리를 전개하는 방법과 일련의 결론을 내놓고 다시 그 결론의 한계로부터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끊임 없는 철학적인 사고의 메커니즘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일상적인 사고의 메카니즘.
그리고 그런 철학적인 사고가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에 얼마나 훌륭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러셀은 물론, 이 책을 옮긴 박영태 씨 역시 강조하는 바이다.
아래의 인용은 옮긴이의 말에서 발췌한 것.
과거의 위대한 철학자들의 사상이나 이론도 따지고 보면 그 사람의 반성적인 재사유에 의해 자신이 살았던 시대나 사회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만들어 낸 세계관이나 그 결과에 지나지 않으며, 그러한 사상이나 이론이 그 시대의 역사성이나 문화를 가장 잘 반영하고, 오늘날의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던져 주기 때문에 후대의 우리가 오늘날까지 배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우리가 비판적인 분석을 하지 않으면서 과거 철학자들의 사상이나 이론을 공부하면 그 철학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죽은 이론이요, 아무 쓸모없는 하찮은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한 철학 공부는 우리의 지적인 발전과 현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바람직한 사회에로 발전하는데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우리는 철학이라는 말의 근본적 의미를 반성적으로 재사유하여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태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러셀 본인이 직접 이야기하는 철학적 사고와 그 기능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우선 러셀은 철학의 기능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철학은, 우리가 매우 강하게 믿는 믿음들로부터 출발하여 각 믿음들을 서로 분리시키고, 부적절한 첨가물은 가능한 한 배제시키고 표현하면서, 본능적인 믿음들의 계층 구조를 보여 주어야만 한다. 또한 그 최종적인 형태에 있어서는 우리의 본능적인 믿음들이 충돌하지 않고 조화로운 체계를 형성한다는 것을 보여 주도록 유의해야 한다. 서로 상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본능적인 믿음을 거부해야 하는 어떠한 이유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만약 그러한 믿음들이 조화롭게 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이에 근거한 지식 체계는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다.핵심은 책의 맨 마지막 장인 '철학적 사유의 가치'에 전부 수록되어 있다. 1
우리의 믿음들 전부 혹은 그 일부분이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은 물론 가능하며, 따라서 모든 믿음들은 적어도 어느 정도의 의심의 요소를 가지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다른 믿음에 근거하지 않고서는, 하나의 믿음을 거부할 수 있는 이유를 가질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의 본능적인 믿음들과 그로부터 구성되는 결과들을 체계화함으로써, 또 필요하다면 그 믿음들 중에 어느 것이 수정 가능하고 배제 될 수 있는가를 고려함으로써, 우리는 본능적인 믿음을 유일한 자료로 받아들인 토대 위에 지식의 질서 정연한 체계를 세울 수 있다. 그러한 체계에 오류의 가능성이 아직도 남아 있을지라도 그 가능성은 지식의 부분들 간의 상호 관련성과 비판적 탐구에 의해 감소되어진다. 비판적 탐구는 물론 그러한 지식 체계를 받아들이기 전에 행해진다.
적어도 철학은 이러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철학자들은 옳든 그르든 간에 철학이 이러한 기능보다도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ㅡ철학은 철학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는 획득될 수 없는 우주 전체와 궁극적 실재의 본성에 관한 지식을 제공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사실이 참이든 거짓이든 간에 우리가 이제까지 이야기한 철학의 매우 겸손한 기능은 확실히 철학에 의해 수행될 수 있다. 또한 상식에 의거한 설명의 타당성을 한 번쯤은 의심했던 사람들에게는 이 기능만으로도 철학적인 문제를 풀기 위해 투자해야 하는 힘들고 어려운 작업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몇 문장을 빼고는 정말 단 하나도 버릴 만한 것이 없는 놀라운 명문이지만 내 손가락의 노동 부담도 덜고 이 글을 읽는 사람의 눈동자가 지는 노동 부담도 덜고자 이렇게 저렇게 많이 편집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초반의 내용은 스끼다시를 까는 느낌이 들 수도 있겠으나 대결론을 유도할 때 그 부분이 빠지면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들 것 같아서 다소 억지로 넣어 두었다.
철학은 다른 모든 탐구들과 마찬가지로 지식을 목표로 한다. 철학이 목표로 하는 지식은 과학의 체계에다 통일성과 체계성을 부여하는 종류의 지식이며, 이것은 우리의 확신, 선입견[편견], 믿음의 근거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은 철학 그 자체의 물음에 대해 확정적으로 단정 지을 수 있는 대답들을 제공하려는 시도에 대해 어떤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철학의 탐구 대상에 대한 불확실성은 실제보다는 훨씬 더 분명하게 표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단정적인 해답이 이미 가능한 그러한 문제들은 과학들 속에 자리 잡게 되었지만, 반면에 현재로서는 어떠한 단정적인 해답도 주어질 수 없는 문제들은 철학이라고 불리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철학의 가치는 사실상 그 불확실성 속에서 대부분 찾게 된다. 철학적 사유를 조금도 하지 않는 사람은 상식, 그 시대나 그 나라의 관습적인 믿음들, 신중한 이성의 작용이나 생각이 없이 그의 마음속에서만 생겨난 확신들로부터 나오는 편견 속에 갇혀 일생을 보낸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온 세계가 단정적이고 유한하며 분명하게 되는 것 같다. 또한 그러한 사람은 보통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대상들에 대해 어떠한 의문도 제기하지 않으며, 이러한 대상들의 모습과 친숙하지 않은 가능성들은 쉽게 거부한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철학적 사유를 시작하자마자, 첫 장에서 본 바대로 가장 일상적인 사물들조차도 매우 불완전한 대답만이 주어질 수 있는 문제들로 나타난다. 철학은 그것이 제기한 의문들에게 참된 해답이 되는 것을 단정적으로는 말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의 사유를 확장하고 관습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주는 많은 가능성들을 제시할 수는 있다. 철학은 회의적 의심을 통하여 자유분방한 사유의 영역을 전혀 여행하지 못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오만한 독단주의를 어느 정도 제거하면서, 우리에게 친숙하지 못했던 측면에서 친숙한 것들을 보게 함으로써 우리의 경이감을 생생하게 유지하도록 한다.
이런 효용성 외에도, 철학은 그것이 관조하는 대상들의 광대함을 통하여 하나의 가치ㅡ아마도 이것이 주요한 가치인 것 같은데ㅡ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관조로부터 결과하는 것은 인간의 개인적인 목표와 협소한 사유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본능적인 관심으로 이루어진 개인적인 세계는 조만간 이러한 개인적인 세계를 허무하게 만드는 매우 강력하고도 광대한 세계 속에 있는 아주 작은 세계에 불과하다. 그러한 삶에는 어떠한 평화도 없으며, 본능적인 욕구의 강요와 욕구를 억제하려는 의지의 무력성 사이의 영원한 갈등만이 있다.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만약 우리의 삶이 위대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면, 우리는 이러한 감옥과 갈등으로부터 탈피해야만 한다.
탈출하는 하나의 방식은 철학적 관조contemplation[명상]에 의한 것이다. 철학적인 관조는 우주 그 전체를 공평무사하게 본다. 지식의 모든 습득은 자아의 확장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확장은 이러한 확장을 직접적으로 추구하지 않을 때 가장 잘 유지된다. 지식을 향한 욕구만이 작용하면서, 지식의 탐구 대상이 이런 혹은 저런 특성을 가져야만 한다고 미리 희망하지 않고 대상들 속에 있는 것으로 발견하게 된 특성들에 대해 자아가 익숙하도록 만드는 탐구에 의해 이러한 확장이 이루어진다. 만약에 현재 상태로의 자아만을 취하여, 세계란 이러한 자아와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을 배제하고서도 세계에 대한 지식이 획득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할 때에는 자아에 대한 이러한 확장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를 가진 자기 과시는 그 밖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철학적 관조에서도 세계를 그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간주한다. 그래서 그것은 자아 바깥의 세계를 자아 이상으로 더 설명될 수 없는 세계로 만든다. 그리고 자아는 세계가 갖고 있는 재산의 광대성을 제한한다. 이와는 반대로 관조를 하면 우리는 비非자아로부터 출발하고, 그것의 광대성에까지 자아의 경계선들이 확장된다. 우주의 무한성 때문에, 우주를 관조하는 정신은 무한성에 있어서 우주와 어느 정도 공유를 하게 된다.
철학적 관조가 갖는 자유와 공평성에 익숙하게 된 정신은 행위와 감정의 세계에서도 이와 같은 자유와 공평성을 보존할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행위나 감정의 목표와 욕구를 전체의 한 부분으로 보는데, 그것들을 그 밖의 모든 것이 어떤 사람의 행위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 세계의 극미한 단편들로 봄으로써 야기되는 그러한 주장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관조를 할 때 진리에 대한 순수한 욕구가 되는 공평성은 행위를 할 때에는 정의가 되는 그러한 정신이며, 감정에 있어서도 자신에게 유용하거나 존경받을 만하다고 판단되는 그러한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도 베풀 수 있는 그러한 보편적인 사랑이 된다. 그래서 철학적인 관조는 우리의 사유 대상들만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 우리의 감정의 대상들까지 확장시킨다. 관조를 우리를 이외의 다른 나머지 세계들과 전쟁 상태에 있는 성벽으로 폐쇄된 도시의 시민이 아니라 우주의 시민으로 만든다. 사람의 참된 자유와 억압된 소망으로부터의 해방은 이와 같은 우주의 시민 정신 속에 있다.
자, 그러면 철학의 가치에 대한 이제까지의 우리의 논의를 요약해 보자. 철학은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어떤 확정적으로 단정을 내린 해답을 찾기 위해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단정적인 해답들도 대개 일반적인 참이라고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문제 자체를 찾기 위해 탐구한다. 왜냐하면 이런 문제들은 가능한 것에 관한 우리의 개념을 확장시켜 우리의 지적인 상상력을 풍부하게 해주고, 정신이 관조[명상]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독단적인 확신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철학을 탐구하는 주된 이유는 철학이 관조하는 우주의 위대성에 의해 정신도 역시 위대하게 되며, 우주와의 결합도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결합이야말로 정신의 최고선이다.
참으로 훌륭한 글이다.
비록 내가 멋대로 가위질과 풀질을 하는 바람에 원본의 훌륭함이 많이 손상되었겠지만 말이다.
러셀이란 참 기가 막힌 사람인 것 같다.
덕후 기질이 다분한 잉여인간인 나로서, 정말 닮고 싶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 나는 이를 '철학의 가치'라고 번역한 바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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