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영감과 동기를 주는, 그를 싫어하는 사람으로부터는 반감과 비난을 사는 촘스키의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은 책의 초입에 나오는 간단한 설화로 거의 대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
역지사지가 안 되는 일방향적 억지 논리에 대해 전반적인 모든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촘스키는 이 책에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과 같은 논리로 '내가 하면 제왕, 남이 하면 해적'이고 '내가 하면 보복, 남이 하면 테러'라는 식의 억지 주장에 일침을 놓는다.
살짝만 사고를 전환하면 누구나 그들의 주장이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이런 간단한 논리의 오류는, 하지만 생각보다 어색하게 다가오는 편이다.
그 이유는 일반 대중들로 하여금 정부가 그런 사고의 전환을 불가능하게 하는 여러가지 기술적인 정책을 펼친 탓인데, 그 내용은 놀랍게도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다룬 것과 아주 흡사한 형태를 띄고 있다.
우리가 국제 정세 ㅡ 다른 촘스키의 책을 읽어 보면 국내 정세도 이와 별로 다를 것은 없으나 일단 '해적과 제왕'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국제 정세이다 ㅡ 에 대해 들어 본 많은 용어들은 사실상 '진리부(ministry of truth)'가 만드는 '신어(newspeak)'들이며 주류 언론들은 자신의 의지로든 타인의 의지로든 그에 대한 많은 기록을 '기억통(memory hole)' 속으로 쳐넣고 있는 것이 실상이다.
'1984'는 디스토피아 소설이 아닌, 회의주의적이고 냉소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 본 우리 사회의 모습 그 자체를 그리고 있는, 어떤 의미에서 사실주의에 가까운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촘스키에 따르면 '시오니즘'은 신어다.
언론의 조작은 다음의 간단한 사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사실 이런 식의 예는 이 책에 수도 없이 많이 실려있기 때문에 좀 더 구체적이고 자세한 사항을 알고 싶다면 그냥 이 책을 읽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어느 정도 정의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부분을 읽을 때 분노감이 눈꼽만치도 안 든다고는 못할 것이다.
대체 이런 말 장난 ㅡ 사건을 표현한 그 '말'은 장난에 불과하지만 그 사건 자체는 너무도 잔인하고 끔찍하기에 반어적으로 보이기까지한 그 장난에 대중의 의식은 얼마나 좌지우지 되었을까.
그리고 그 사건의 당사자들은 얼마나 비참한 삶을, 그것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거나 무언가 알려졌더라도 왜곡되어져버린, 살다 갔을까.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조차 없는 상황은 대체 우리의 세상이 얼마나 흐리멍텅하다는 증거일까.
과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ㅡ 철학적인 인식론의 관점이 아닌 단순히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에 대한 대면 ㅡ 세계는 정말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맞는 것일까?
촘스키의 책 역시 그런 의견이 세상에 밝혀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차단하려고만 한다면 차단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해적과 제왕' 같은 책이 출판되었다는 것은 또 다른 그림자의 세계, 허상의 세계를 만드려는 장치는 아닐까?
하지만 어떤 하나의 확고한 기반도 없이 모든 것을 의심하는 태도는 단순한 회의주의자의 자세에 불과하다.
깨어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의 판단을 내려 자기의 사고의 기반을 만들고 그에 대한 신념을 가지는 것이 응당 마땅한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나의 이성은 촘스키의 손을 들고 있다.
최소한 그는 9·11이 미국의 자작극이라거나 기타 그와 비슷한 수준의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음모론을 전제로 받아들이진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책에 실린 방대한 주석을 보면 촘스키는 있는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기타 거대 언론과는 달리 여러가지 다양한 정보원을 인용하고 참조해 자신의 주장에 객관성과 사실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1
또한 그의 저술 활동이 계속해서 출판되며 그와 의견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고 실제로 그런 사람들의 활동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촘스키의 말이 허황된 것도 아니요, 거짓도 아니며 진실을 좇는 소수의 의견이라는 것의 강한 증거가 된다고 본다.
촘스키의 요지는 이것이다.
현재의 지위를 지키려는 자들은 그들의 체제 유지를 방해하려는 세력들에 적당히 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그에 대한 이쪽으로부터의 공격엔 정당함을, 그쪽으로부터에 대응에는 테러리즘의 성격을 부여한다는 것. 2
이런 식의 힘의 논리엔 결국 맨 처음에 누가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있고 누가 더 주류에 속해있느냐가 중요한데, 힘의 균형은 가면 갈수록 한 쪽으로 기울어 뒤집어질 수 없기 때문에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갈 뿐이다.
제왕은 그 자신과 부하에게 무한한 정의를 선포할 수 있고, 해적은 죽을 때까지 해적으로만 살아야 한다.
그들의 본질은 똑같은 ㅡ 죄질을 따지자면 전자의 것이 후자의 것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나쁘지만 ㅡ 데도 말이다.
설마 여기서 촘스키가 해적을 옹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촘스키가 해적 옹호론자라며 날뛸 안쓰럽고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분명히 말하자면, 촘스키는 절대 해적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제왕의 횡포는 여러가지 예를 통해 설명되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골랐다.
촘스키는 책의 절반 이상 동안 과거의 예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6장 '9·11 이후의 세계'에서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역설한다.
"외부의 도움 ㅡ 그저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성격이 아니라 건설적이고 진실한 것이라면 ㅡ 을 받으며 내부에서 처리해야 한다"고 서술하는 모습에서, 아프간 여성혁명연합의 공식 성명인 "아프간 국민들의 "전면적 봉기"에 의한 "탈레반과 알 카에다 역병의 제거"를 요구하면서, 오직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나라에 들이닥친 대재앙의 재발과 악순환을 막을 수 있다""는 입장을 모습에서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ㅡ 신어적인 용법이 아니라면 ㅡ 와 비슷한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백범일지'를 읽은 사람이라면 백범 선생의 정치 철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으리라.
하지만 한 나라의 한 민족들끼리도 단일한 하나의 의견을 내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다.
너무나도 힘들어서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하는데 그런 면에서 촘스키가 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지 않은 점은 조금 아쉽다.
'해적과 제왕'이라는 책의 제목을 고려했을 때 그런 방법론이 자세하게 다뤄질 필요까지는 없지만 말이다.
그가 간단히 언급한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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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내용은 책의 초입에 나오는 간단한 설화로 거의 대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는 알렉산더 대왕 앞에 사로잡혀 온 한 해적에 관해 이야기해준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 해적에게 물었다. "넌 어찌하여 감히 바다를 어지럽히느뇨?" 그러자 그 해적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는 당신은 어찌하여 감히 온 세상을 어지럽히는 건가요? 전 그저 자그만 배 한 척으로 그 짓을 하기 때문에 도둑놈 소릴 듣는 것이고, 당신은 거대한 함대를 이끌고 그 짓을 하기 때문에 제왕이라 불리는 것뿐이외다."
역지사지가 안 되는 일방향적 억지 논리에 대해 전반적인 모든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촘스키는 이 책에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과 같은 논리로 '내가 하면 제왕, 남이 하면 해적'이고 '내가 하면 보복, 남이 하면 테러'라는 식의 억지 주장에 일침을 놓는다.
살짝만 사고를 전환하면 누구나 그들의 주장이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이런 간단한 논리의 오류는, 하지만 생각보다 어색하게 다가오는 편이다.
그 이유는 일반 대중들로 하여금 정부가 그런 사고의 전환을 불가능하게 하는 여러가지 기술적인 정책을 펼친 탓인데, 그 내용은 놀랍게도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다룬 것과 아주 흡사한 형태를 띄고 있다.
우리가 국제 정세 ㅡ 다른 촘스키의 책을 읽어 보면 국내 정세도 이와 별로 다를 것은 없으나 일단 '해적과 제왕'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국제 정세이다 ㅡ 에 대해 들어 본 많은 용어들은 사실상 '진리부(ministry of truth)'가 만드는 '신어(newspeak)'들이며 주류 언론들은 자신의 의지로든 타인의 의지로든 그에 대한 많은 기록을 '기억통(memory hole)' 속으로 쳐넣고 있는 것이 실상이다.
'1984'는 디스토피아 소설이 아닌, 회의주의적이고 냉소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 본 우리 사회의 모습 그 자체를 그리고 있는, 어떤 의미에서 사실주의에 가까운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촘스키에 따르면 '시오니즘'은 신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시오니즘Zionism"이란 용어가 교리적 순수성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에 의해 정의되는 흥미로운 방식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필자의 견해는 주기적으로 "호전적 반反시오니즘"으로 비난받는다.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들은, 내가 거듭 거듭, 그리고 분명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국제적으로 승인된 국경 안에서 국제적 체제 속의 모든 국가가 갖는 권리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똑같은 권리를 부여받아야 하며,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국가에서 법률상 그리고 관행상 특정한 한 부류의 시민들(유대인, 백인, 기독교인 등)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그래서 그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겐 금지된 권리를 허락하는 차별적 구조는 해체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견해임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무엇이 "시오니즘"으로 불려야 적절한지의 문제를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런 견해들을 "호전적 반시오니즘"으로 규정함으로써 파생하는 결과에 주목할 것이다. 이런 규정에 의해 시오니즘은, 이스라엘이 다른 모든 국가들이 누리는 권리를 초월하는 권리를 부여받아야 한다는 교리, 이스라엘이 점령지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해야 하며, 따라서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한 어떤 현실성 있는 형태의 자결권 수단도 금지해야 한다는 교리, 그리고 이스라엘이 앞으로도 계속 비유대인 시민들에 대한 차별의 원칙에 기반을 둔 국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교리로 이해된다. 자신들을 "이스라엘의 지지자들"이라고 선언한 사람들이 시오니즘을 인종차별로 규정하는 악명 높은 유엔 결의안의 합법성을 주장하는 것은 자못 흥미롭기까지 하다.
언론의 조작은 다음의 간단한 사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사실 이런 식의 예는 이 책에 수도 없이 많이 실려있기 때문에 좀 더 구체적이고 자세한 사항을 알고 싶다면 그냥 이 책을 읽어 보는 것을 추천한다.
"보복"(이스라엘의)과 "테러"(팔레스타인의)의 악순환은 한 단계 한 단계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 되짚어볼 수 있는데, 그러다 보면 용어법이 사실적 기술이 아닌 정치 선전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이 금세 드러난다.
이 시점에서 우린 역사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더 편리한 형태로 재구성되었는지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토머스 프리드먼은 "이스라엘의 대항 테러" 전략을 평하면서, 비록 "이 [이스라엘의] 보복 사례들 중 적어도 한 건은 민간인 사상자들이 발생했으므로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ㅡ 아마도 이 말은 키브야를 두고 한 듯함 ㅡ "제1기인 1948년부터 1956년까지는 보복을 통한 대항 테러, 혹은 네거티브 피드백negative feedback의 시기로 규정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 것 같다"고 쓰고 있다. 테러리즘에 관한 학계의 기록 역시 대부분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
어느 정도 정의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부분을 읽을 때 분노감이 눈꼽만치도 안 든다고는 못할 것이다.
대체 이런 말 장난 ㅡ 사건을 표현한 그 '말'은 장난에 불과하지만 그 사건 자체는 너무도 잔인하고 끔찍하기에 반어적으로 보이기까지한 그 장난에 대중의 의식은 얼마나 좌지우지 되었을까.
그리고 그 사건의 당사자들은 얼마나 비참한 삶을, 그것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거나 무언가 알려졌더라도 왜곡되어져버린, 살다 갔을까.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조차 없는 상황은 대체 우리의 세상이 얼마나 흐리멍텅하다는 증거일까.
과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ㅡ 철학적인 인식론의 관점이 아닌 단순히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에 대한 대면 ㅡ 세계는 정말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맞는 것일까?
촘스키의 책 역시 그런 의견이 세상에 밝혀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차단하려고만 한다면 차단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해적과 제왕' 같은 책이 출판되었다는 것은 또 다른 그림자의 세계, 허상의 세계를 만드려는 장치는 아닐까?
그 수많은 야동 또한 실재하지 않는 행동과 그를 기반으로 하는 세계에 대한 조작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하나의 확고한 기반도 없이 모든 것을 의심하는 태도는 단순한 회의주의자의 자세에 불과하다.
깨어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의 판단을 내려 자기의 사고의 기반을 만들고 그에 대한 신념을 가지는 것이 응당 마땅한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나의 이성은 촘스키의 손을 들고 있다.
최소한 그는 9·11이 미국의 자작극이라거나 기타 그와 비슷한 수준의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음모론을 전제로 받아들이진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책에 실린 방대한 주석을 보면 촘스키는 있는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기타 거대 언론과는 달리 여러가지 다양한 정보원을 인용하고 참조해 자신의 주장에 객관성과 사실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1
또한 그의 저술 활동이 계속해서 출판되며 그와 의견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고 실제로 그런 사람들의 활동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촘스키의 말이 허황된 것도 아니요, 거짓도 아니며 진실을 좇는 소수의 의견이라는 것의 강한 증거가 된다고 본다.
촘스키의 요지는 이것이다.
현재의 지위를 지키려는 자들은 그들의 체제 유지를 방해하려는 세력들에 적당히 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그에 대한 이쪽으로부터의 공격엔 정당함을, 그쪽으로부터에 대응에는 테러리즘의 성격을 부여한다는 것. 2
이런 식의 힘의 논리엔 결국 맨 처음에 누가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있고 누가 더 주류에 속해있느냐가 중요한데, 힘의 균형은 가면 갈수록 한 쪽으로 기울어 뒤집어질 수 없기 때문에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갈 뿐이다.
제왕은 그 자신과 부하에게 무한한 정의를 선포할 수 있고, 해적은 죽을 때까지 해적으로만 살아야 한다.
그들의 본질은 똑같은 ㅡ 죄질을 따지자면 전자의 것이 후자의 것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나쁘지만 ㅡ 데도 말이다.
설마 여기서 촘스키가 해적을 옹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촘스키가 해적 옹호론자라며 날뛸 안쓰럽고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분명히 말하자면, 촘스키는 절대 해적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제왕의 횡포는 여러가지 예를 통해 설명되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골랐다.
좀더 세세한 근거로 볼 때 미국의 입장은 그 진의가 의심스럽다. 언론은 줄곧 "해양법"을 얘기했지만, 레이건 정부가 해양법 조약을 거부했다는 점만으로도 미국은 마음 편히 이 명분에 호소할 입장이 못 된다. 뿐만 아니라 리비아는 미국의 선박이 아니라 미국의 항공기에 사격을 가한 것이며, "영공법"은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라마다 주장하는 바가 다양하다. 예를 들어, 미국은 침범한 항공기가 적대적인 것으로 판단될 경우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200마일 방공식별구역을 주장하고 있다. 분명 미국 항공기들은 리비아 영공에서 200마일 이내에 ㅡ 펜타곤의 주장에 따르면 40마일까지 접근 ㅡ 있었고 적대적이었으므로, 미국의 기준으로 볼 때 리비아에게는 그 항공기들을 차단할 정당할 권리가 있었다.
국방부 대변인 로버트 심스는 시드라 만 침공의 범위와 의미를 명확히 밝혔는데, 그는 "미국의 방침은 시드라 만에서 미 해군의 작전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그곳 국제 수역으로 들어오는 모든 리비아 선박에 대해 ㅡ 그 선박이 미국 선박들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지 간에 ㅡ 사격을 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심스는 미국 군용기들을 격추시키려 함으로써 드러난 리비아의 '적대적 의도'를 감안할 때 리비아의 모든 군용 선박은 "우리 군에 위협"이 된다고 말했다. 간단히 말해서, 미국은 리비아 해안에 있는 자국 함대에 접근해오는 모든 리비아 선박에 대해 "자위" 차원에서 사격을 가할 권리가 있지만, 리비아는 자국 영토 인근 상공에서의 자위권 ㅡ 미국 스스로 선언한 권리의 일부분 ㅡ 조차도 갖고 있지 않다는 얘기다.
촘스키는 책의 절반 이상 동안 과거의 예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6장 '9·11 이후의 세계'에서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역설한다.
"외부의 도움 ㅡ 그저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성격이 아니라 건설적이고 진실한 것이라면 ㅡ 을 받으며 내부에서 처리해야 한다"고 서술하는 모습에서, 아프간 여성혁명연합의 공식 성명인 "아프간 국민들의 "전면적 봉기"에 의한 "탈레반과 알 카에다 역병의 제거"를 요구하면서, 오직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나라에 들이닥친 대재앙의 재발과 악순환을 막을 수 있다""는 입장을 모습에서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ㅡ 신어적인 용법이 아니라면 ㅡ 와 비슷한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백범일지'를 읽은 사람이라면 백범 선생의 정치 철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으리라.
하지만 한 나라의 한 민족들끼리도 단일한 하나의 의견을 내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다.
너무나도 힘들어서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하는데 그런 면에서 촘스키가 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지 않은 점은 조금 아쉽다.
'해적과 제왕'이라는 책의 제목을 고려했을 때 그런 방법론이 자세하게 다뤄질 필요까지는 없지만 말이다.
그가 간단히 언급한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이상이 현재의 경향이 지속될 경우 일어날 수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현실적 전망의 일부다. 하지만 그런 인들이 현실로 일어나야 할 이유는 없다. 희소식은 현재의 권력 시스템이 무너지기 쉽다는 점이며, 그들도 그 점을 알고 있다. 현재 조성된 기회의 창窓을 악용해 잔인하고도 퇴행적인 프로그램들을 시행하고, 전례 없이 특별하고도 매우 고무적인 모습으로 세계 전역에서 일고 있는 대규모 대중운동들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가 집요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런 시도들에 굴복할 이유는 없다. 아니, 모든 이유들로 볼 때 그러지 말아야 한다. 많은 선택과 대안들이 가능하다. 항상 그렇듯이, 필요한 것은 그런 선택과 대안들을 추구하려는 의지와 헌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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