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북 1

| 2011. 7. 23. 10:01

어쩌다 이 책을 읽을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만큼 아주 오랫동안, 거의 1년쯤 읽어볼 책 목록에 있었던 책.
추측으로는 언젠가 봤던 영화나 책, 또는 어떤 사람들의 대화에서 이 '양철북'이라는 단어를 캐치했을텐데, 그 매체가 무엇이었든 상당히 고상한, 또는 고상한 척 하는 것이었으리라는 게 이 책의 1권을 읽고 난 후 드는 나의 소감.
아아, 그러고보니 내가 연희입체교차로 근처에 살 무렵 동네에 '양철북'이라는 이름의 단란주점이 있었던 것 같다.
설마 그 유년의 인덱스를 장년의 현실로 끌어온 것은 아니겠지.
나의 어린 시절은 고상하지도, 고상한 척 하지도 않으니까.

양철북1(세계문학전집32)
카테고리 소설 > 독일소설
지은이 귄터 그라스 (민음사,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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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에 만들어진 동명의 영화 '양철북'이 굉장히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에 이 소설의 영화화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겠으나 여긴 내 블로그고 언론의 자유가 200% 보장되는 곳이라서 불가능은 없다.
'양철북'을 읽으면서 내 머리에 떠오르는 심상은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이 '전함 포템킨'이나 '10월'에서 보여준 화면과 비슷했다.
'씬 시티'의 분위기로 에이젠슈타인 감독 하에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면 참 잘 어울렸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이 소설을 지배하고 있는 주요 분위기로 기괴함, 우울함과 어두움, 그리고 불안함을 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난쟁이의 컨셉을 잡고 있는 주인공 오스카와 그가 만나게 되는 또 다른 난쟁이들의 모임, 말 머리로 뱀장어 낚시를 하는 부분, 소리를 질러 유리를 깨고 그 능력을 조절해 자신이 원하는 모양으로 유리에 흠집을 낸다는 설정, 헤어베르트 등에 있는 상처와 그의 죽음 등은 읽는 이에게 엽기스러움을 선사한다.
친위대 돌격 대원이자 드럼펫 주자였던 마인의 삶이나 독일의 나치즘이 대두하며 나타나는 국제적 정세의 변화, 전운의 대두, 1권에서는 아직 그 뒷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지만 어쨌든 정신병원에 수감된 오스카의 처지, 난쟁이라는 특성 때문에 낮고 어두운 곳으로 숨을 수 있다는 점, 주인공 오스카의 부정적이며 냉소적인 서술은 '양철북'에서 색채라는 요소를 배제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아그네스 콜야이체크와 알프레트 마체라트, 얀 브론스키의 불안불안한 삼각 관계나 '나'와 '오스카'를 혼용함으로써, 또한 군데군데 1인칭 주인공 시점과 전지적 작가 시점을 넘나듦으로써 드러나는 자아 분열, 정신 착란의 느낌, 그 정체성의 불안, 그리고 양철북에 대한 강박증이 낳는 긴장감은 독자로 하여금 어떤 부분을 읽고 있더라도 기괴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압박을 한다.

정체성의 불안.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양철북'에선 색감도 느껴지지 않고, 청각을 자극하는 요소도 별로 없다는 점 또한 이 소설과 에이젠슈타인의 유대를 더 강화하는 요소이다.
소설의 화자 오스카는 대개 벌어지는 일의 정황이나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서술하는 것에 대부분의 지면을 사용하지만 때때로 어떤 장면, 어떤 기억에 대해서는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구체적인 모양과 함께 색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는데 그가 말하는 색은 어찌된 일인지 읽는 순간에만 RGB의 3요소를 고루 갖고는 순식간에 빛이 바래고 말았다.
아직까지는 오스카와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양철북과 그의 의지와는 반하는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극적으로 등장하는 고음의 소리 또한 외양으로만 나타나지 실제로 특정한 소리가 나는 존재라고 느끼기가 힘들었다.
대화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입은 뻥긋거리지만 소리의 파동은 없고 단지 글자 그 자체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분위기의 고조가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점 역시 고려해야 한다.
이 세 가지 조합, 색이 없고 소리가 없지만 분위기의 고조가 있다면 그것으로 만들 수 있는 영화는 무성흑백영화에 배경음악이 깔리는 형태다.
바로 에이젠슈타인 시대의 영화.

억지스러운 '양철북'의 영화화 이야기를 이쯤 그만두고 나면 사실 별로 이야기 할 것이 없다.
소설을 읽으면서 저렇게 단편적으로 들었던 느낌을 제외하면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냐'라는 생각이 내 대뇌를 점령했기 때문이다.
'양철북'은 절대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당시 시대상에 대한 많은 문화적,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문학적 컨텍스트를 파악하고 있어야만 이 책에 뒷표지에서 말하는 '암시적인 이미지, 반어와 역설, 풍자로 가득한 서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주석을 더 신경 써서 달았더라면 좋았겠지만 원래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은 주석에 별로 신경 쓰는 편이 아니므로 패스.
결국 만족스러운 수준의 이해에는 실패.

귄터 그라스 개인의 철학을 표현한 글일까?
분명히 몇몇 부분은 그럴 것이다.

이미 모든 것이 역사가 되었고, 아직까지 뜨거워지는 일은 있다 하더라도 곧 차가운 쇠로 굳어져 버리는 오늘날, 나는 정신 병원의 개인 환자로서 연단 밑에 숨어 북을 치던 때의 일을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다. 군중 집회를 여섯 차롄가 일곱 차례 망쳐버리고, 세 차례인가 네 차례 행진과 분열식을 내 북으로 흩뜨려놓았다고 해서 나를 저항의 용사로 보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다. 저항이란 말은 널리 유행어가 되었다. 사람들은 저항 정신, 저항 조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심지어 저항을 내면화할 수 있다고들 말하기도 한다. 일컬어 국내 망명이라고 말이다. 전쟁 동안 침실의 등화관제를 소홀히하여 방공 감시원으로부터 벌금형에 처해졌던 것을 내세우며 지금 저항의 용사, 저항의 사나이로 자칭하고 있는 저 완고한 신사분들에 대해서는 입에 담고 싶지도 않다.

더 노골적인 것도 있다.

온다! 온다! 대체 누가 왔느냐? 아기 그리스도냐, 구세주냐? 아니면 언제나 칙칙 소리를 내는 가스 미터기를 겨드랑이에 낀 천상의 가스 설비공이 왔단 말인가? 가스 설비공이 말했다. 나는 이 세상의 구세주다. 내가 없이는 너희들은 요리를 할 수 없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를 믿게 한 다음에 유리한 요금표를 제시하고, 깨끗이 닦은 가스 꼭지를 틀어 그들이 비둘기를 구울 수 있도록 성령을 내보내 주었다. 그리고 금방 쪼갠 호두와 편도를 배분하였으며 또한 동시에 성령과 가스를 흘려보냈다. 그 때문에 속기 쉬운 사람들이 짙고 푸르스름한 공기로 휩싸여 있는 백화점 앞에 서 있는 가스 설비공들에게서 여러 가지 크기와 가격의 산타클로스와 아기 예수를 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일하게 성스러운 가스 회사를 믿었다. 그것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가스 미터기로 운명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강림절에는 표준 가격으로 영업을 했다. 그후로도 이어질 크리스마스를 많은 사람들이 믿기는 했지만, 강림절의 긴장에 찬 주일들을 살아 남은 자들은 저장되어 있는 편도와 호두가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 사람들뿐이었다. 사실은 모두들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나의 부족한 지적 역량에 따르면 이 소설은 기형적인 사회상에서 유래된 기형적 인간상을 강한 메타포에 실어 날리는 그런 이야기다.
1부에서는 정말 종잡을 수 없이 페이스에 질질 끌려다녔지만 2부로 접어들면서 어느 정도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맥박에 나의 뇌가 조금씩 공진하기 시작했다.
2권까지 다 읽는다면 뭔가 크게 느끼는 점이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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