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진자 1

| 2011. 5. 19. 20:30

원래 문학 작품을 감상할 때 마음을 썩 진지하게 먹지 않고 보는 편이라 이 3권짜리 시리즈의 책도 가볍게 읽은 뒤 짧은 평으로 마무리 지으려 했으나 첫 권을 읽고 나서 아무래도 따로따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쓰는 ‘푸코의 진자’ 그 첫째 권 리뷰!

푸코의진자1(개정판)
카테고리 소설 > 기타나라소설 > 이탈리아소설
지은이 움베르토 에코 (열린책들,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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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의 책이라면 저 유명한 ‘장미의 이름’을 중학교 때 읽었고, 그 책을 바탕으로 숀 코넬리가 주연하는 동명의 영화를 본 게 2009년 연말이니 나와 글쓴이의 사이가 그렇게 가까운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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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 수첩 속에 그의 책을 꼭 읽어보리라는 글귀를 적어둔 것은 그 오래 전의 기억이 굉장히 강렬하게 기억되어서이리라.
그만큼 움베르토 에코라는 이름은 중학교 시절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있다니’하고 나를 놀라게 만들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보다 훨씬 더 나를 압도했던 것 같다.
각설하고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자.

초반에 에코는 ‘성전 기사단’이라는 소재에 대해 독자들의 주목을 끌려는 이런저런 맛있어 보이는 스끼다시들을 깐다.
등장인물의 대화를 통해서 드러나는 그의 기가 막힌 재치와 구대륙의 고대 문화, 더 자세히 말하자면 중세 시대 성전 기사단이라는 조직의 발이 닿았던 모든 곳의 문화를 모두 아우르는 현학적인 서술은 나의 취향과 아주 궁합이 좋았다.
다음과 같은 대화를 보라.
이 사람의 책을 마구마구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저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또 하나의 중요한 학과가 바로 아디나타, 혹은 임포시빌리아(不可能學科, 불가능학과)라네. 가령 <집시를 위한 도시 계획> 같은 것이지. 수업의 주안점은, 사물이 지닌 불합리한 비관련성의 의미와 이유를 이해시키는 것이야. 이 밖에도 얼마든지 있네. <모르스 부호의 형태학>, <남극 농경술>, <이스터 섬의 회화사>, <수메르의 현대 문학>, <몬테소리 교육의 학력 고사 제도>, <아시리아와 바빌론의 우표 연구>, <신대륙이 발견되기 이전의, 제국의 차륜학>, <무성 영화의 음성학>……」
(중략)
「이름이 암시하거니와 <옥시모로니스[矛盾語法學科, 모순어법학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가당착이야. 내가 <집시를 위한 도시 계획>을 여기에 집어넣자고 한 것도 그 때문이라네.」
「안 돼. <유목민의 도시 계획>이면 또 몰라도. <무용 과학>은 경험적인 불가능성을 다루지만 <옥시모로닉스>는 술어상의 모순을 다루는 학과거든.」
「일리가 있기는 하네만, 우리가 예전에 <옥시모로닉스>에 뭘 넣었었지? 그래…… 여기 있다. <혁명의 전통>, <민주주의적 독재정치>, <파르메니데스적 역동성>, <헤라클레이토스의 정역학>, <스파르타식 쾌락주의>, <동어 반복의 변증법>, <불리적Boolean 기호 논리학적 논쟁>」

현학적인 서술의 예는 이런 간단한 인용구로 소개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현학적이라는 특성 자체가 몇 마디 말로는 절대 나타낼 수 없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야기의 진행에 실마리를 던지는 아르덴티 대령이 주인공 무리에게 던지는 성전 기사단과 관련된 현대까지 전해오는 음모의 전개 과정을 간략히 살펴본다면 글쓴이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지식의 양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에 지식만 어마어마하란 법이 어딨어……


예수의 신화는 켈트족 신화에서 유래했고, 성전 기사단은 아리안 출신이라는 점에서 그는 논의점을 티베트로 옮겼다가 역시 켈트 문화와 연관이 있는 드루이드의 성지라고 주장하는  사르트르 대성당의 성배 든 여신상으로 다시 초점을 옮긴다.
사르트르 대성당이 드루이드의 성지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이유로 에코가 쓴, 아니 아르덴티 대령이 말한 내용을 살펴보면, 성모의 원조는 켈트의 흑성모이며, 성전 기사단을 있게 한 베네딕트 수도회는 드루이드 교의 유산이라고 한다.
우리가 현재 나사렛의 마리아 신화에 훨씬 더 익숙한 까닭은

북방 신화와 켈트족의 전승을 와해시키고 나사렛의 마리아 신화를 유포함으로써 이를 지중해적 종교로 변용시키고 싶어 하는 사람들 손에 파괴되고 말았

 
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그리고는 모든 성전 기사단의 음모가 종국에는 잉글랜드의 스톤 헨지로 귀결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에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 방대한 정보를 고대 룬 문자와 천문학적 관점에 각종 숫자 놀음까지 합쳐서 제시하는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궁금하다면 책을 직접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마지막으로 성전 기사단과 장미 십자단, 태백 우애단, 금양모피 기사단 등 중세에 활약한 카톨릭 단체를 하나의 거대한 줄기로 모으면서 1권이 종료된다.

다른 사람들의 책이라고 특별히 다른 것이 있겠냐마는 이 사람의 이야기 전개에 절대 빠질 수 없는 요소는 바로 갑작스러운 죽음이다.
사건의 실마리를 가진 사람들을 끊임없이 서든 데스로 몰아넣으면서 이야기의 톱니 바퀴를 착착 맞춰 나가는 바람에 책을 한 번 손에 잡으면 놓기가 힘들다.
또한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과거에 알게 된 사실들을 현재 시제에서 되새김하며 방대한 지식을 과식하게 되는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한 숨 돌리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글에 노련미가 넘친다.[각주:1]

책의 초반에 주인공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 서술하는 장면에서는 얼핏 에코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나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를 읽어보면 대표적 무신론자인 움베르토 에코가 어찌하여 이런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소설을 써낼 수 있었는지 추측할 수 있다.

그날부터 나는 매사를 미심쩍어 하게 되었다.
아니, 그보다는 매사를 너무 잘 믿어 왔던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마음의 원(願)에 나 자신을 맡겨 왔던 것을 후회했다. 믿는다는 것은 곧 마음의 원일 뿐이다.
의심 많은 사람이란, 무엇이든 믿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모든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 또는 한꺼번에 믿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사람은 근시안적이고 방법론적이어서 거시안적이기를 기피한다. 반대로, 그 두 가지가 연관성이 없는데도 둘 모두 믿는 사람, 어딘가에 이 두 가지를 연결시키는 세 번째 사실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이 너무 쉽게 믿는 사람인 것이다.
의심은 호기심을 죽이지 않는다. 오히려 부추긴다. 나는 관념의 논리적인 연맥은 재미없게 생각하지만 관념의 대위법은 좋아한다. 우리가 믿지 않는 이상, 두 관념(둘 다 헛것인)의 충돌은, 중세에는 <디아볼루스 인 무지카>, 곧 악마적인 음계라고 불리던 기분 좋은 불협화음을 지어낸다. 나는 사람들이 목을 매는 사상이나 관념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별로 존중하지 않는 두세 가지 사상이나 관념은 훌륭한 멜로디를 지어내기도 하고 듣기 좋은 장단을 지니기도 한다.

‘움반다’를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도올이 ‘여자란 무엇인가’에서 설명하던 한국의 굿 문화에 대한 부분과 닮아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말인즉슨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눈꼽만큼도 공감하지 못하겠다는 것이고 그 행위 뒤에 깔린 설명에 있어서는 배경지식이 전혀 없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거의 알아듣지를 못하겠다는 것이다.

귀 간지러우세요?


카톨릭에 대한 조소와 반감 또한 그의 서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교황청으로부터 신성모독의 내용으로 가득 찬 쓰레기라는 혹평을 받을만도 하다.
물론 교황청쯤 되니까, 진짜 교황청 같은 단체쯤 되니까 그런 '혹평'을 할 수 있었겠지.

그 말 잘했군. 어디 한번 보자.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은 뛰어난 재담꾼들로, 언제 어디에서 만나 한판 붙어 보기로 한다. 한 인물을 설정하고 몇 가지 기본적인 사실에 합의한 다음, 각자 그 합의된 것으로 마음대로 이야기를 꾸미고, 나중에 만나 누가 잘 꾸몄는지 겨루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쓰인 글이 평론가로 행세하는 몇몇 친구들 손아귀로 들어가게 돼. 평론가는 평론하겠지. 마태오는 상당히 사실적이지만 메시아 사업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 마르코도 나쁘지는 않지만 다소 감상적이다. 루가가 적당한 품격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요한은 지나치게 철학적이다. 이런 장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 네 권의 책은 상당히 매력 있는 것이어서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게 된다. 네 저자가 이걸 알았을 때는 때늦은 뒤, 바울은 벌써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그리스도를 만난 뒤였고, 플리니우스는 근심에 잠긴 황제의 명을 받아 조사를 시작하고, 4인조의 줄거리를 가지고 무수한 위작가들은 아는 체하면서 써대고……. 그대 위선적인 독자여, 내 닮은꼴이여. 그러다 보니 베드로는 유명세에 맛을 들이기 시작하지. 거기에다 요한은 사실을 공개하겠다고 위협하고. 그래서 베드로와 바울은 요한을 꽁꽁 묶어 파트모스 섬으로 보내 버리지. 가엾은 요한은 헛것을 보게 돼. 사람 살려, 메뚜기 떼가 내 침대를 뒤덮고 있어요, 저 나팔소리 좀 멎게 해주. 아니, 이 취했거나 동맥 경화증 말기 증세를 보인다고 했고……. 누가 알아? 정말 이랬던 건지?

간만에 읽는 좋은 소설이다.
흥미진진.


  1. ’장미의 이름’ 다음으로 쓴 두 번째 소설이라지만 그의 나이 56세에 쓴 책이라는 면을 감안하면 노련미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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