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비

| 2011. 5. 21. 16:00

고등학교 이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음악적 취향을 가지고 살았던 내가 윤도현밴드를 처음 접했던 것은 초등학교 6학년이 아니면 중학교 1학년일 것이다.
어떤 토크쇼에 나온 그들은 당시 대표곡이었던 '너를 보내고'를 불렀고, 자신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 그리고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던 걸로 기억한다.
그 때만 해도 내가 이렇게 밴드라는 것과 가까이 지내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윤도현 밴드는 그 뒤에 바로 월드컵을 통해 국민 밴드로 거듭나게 되고 고등학교, 대학교 밴드 동아리 또는 중학생 남자 아이들의 선곡 차트에서 항상 상위권에 랭크되며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그리고 최근 우리나라를 강타하고 있는 나가수 신드롬의 핵심으로 여전히 그들의 주가는 상승세다.

윤도현의 저 플라잉 브이는 짐 크리버에서 만들었더라. 나도 거기서 헤드머신을 교체한 적이 있다.


이 '나는 나비'라는 영화는 2009년 워프드 투어(Warped Tour)에 참가하는 YB의 모습을 다큐멘터리식으로 담아낸 영화다.
익숙하지 않은 투어라 위키피디어를 조금 살펴보니 반스에서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락 & X 스포츠 페스티벌로 한 쪽에서는 콘서트를, 한 쪽에서는 각종 X 스포츠를 진행하는 모양이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2009년의 워프드 투어의 메인 스테이지 공연팀 중에 내가 그 이름이나마 알고 있는 팀이 배드 릴리전, 파라모어 정도인 걸 보면 그렇게 시끌벅적한 투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YB가 공연했던 기아 후원의 KIA/Kevin Says 스테이지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팀이 공연을 했는데 다들 투어 참여 기간이 짧은 탓이다.

'나는 나비'는 열정을 가지고 밴드를 했던, 또는 하는 사람들에게 굉장히 큰 의미로 다가올 영화다.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그냥 음악을 좋아하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보다 더 공감하고 감정이입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노래를 쓴다는 것, 공연을 준비한다는 것, 음악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힘이 드는 일이다.[각주:1]
YB는 이 투어에서 7번의 공연을 한다고 했는데 8월 15일부터 8월 23일까지 공연을 했다고 나와있으니 8박 9일동안 7번이나 공연을 한 셈이다.
게다가 시애틀부터 시작해 캘리포니아 남부까지 내려오는 대장정과 함께 이루어진 공연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살인적인 스케줄에서 공연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짧은 시간 안에 무대 세팅을 완료하고 30분간 임팩트있는 공연에 에너지를 쏟고 잽싸게 짐을 꾸리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나고 하루 묵을 숙소에 짐을 풀고 다음 날 공연을 준비하고 다시 짐을 꾸리고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생활의 반복 속에서도 자신의 컨디션을 매일매일 최상으로 끌어올리고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게 끊임없이 무대에 대해 생각하고 팀원과의 사소한 마찰을 방지한다는 것은 위인전에 나올 법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 위대한 일을 YB는 별 문제없이 이끌어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같은 밴드라는 이름 아래 생활한 지 11년쯤[각주:2] 되면 이 정도 일은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여태까지 녹음했던 공연 실황 테이프가 모두 없어지고,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장비를 잃어버리는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꿋꿋해보였다.
미국에까지 날아가서 투어를 한다는 소중한 기회를 날리지 않기 위해 일단 이 순간은 버티고 넘어가자는 식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밴드와 여행이라는 '남자 사이가 나빠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 2위와 3위를 동시에 안고 가는 이들이 마음을 모아 손과 입을 맞춰 멋진 공연을 보여주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가슴 짠하게 만드는 것은 윤도현이 말하듯이

한국에선 저 정도 하는 

YB가 미국이라는 나라 아닌 대륙과 부딪치며 겪는 성장통의 극복을 바라보는 것이다.
드러머 김진원씨가 첫 공연이 끝난 다음에 과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는 소감을 말했다.
이 외에도 중간중간에 들어가는 이들의 인터뷰를 보면 그들이 새삼스럽게 겪는 시작의 고통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어쩌면 '나는 나비'라는 이 영화의 제목은 여태까지 나비인줄만 알았던 번데기 YB의 진짜 탈피를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겠다.

YB의 이야기와 평행적으로 진행되는 써니와 미카야의 이야기는 아예 빠져버렸으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이야기를 넣었는지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무슨 대단한 사연이라도 있는 것처럼 행세하더니 그 뒤로 아무런 언급도 없고, 무슨 열혈 팬이라도 되는 줄 알았으나 그렇게 YB 자체의 열렬한 팬이라고 느껴지는 부분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처음에는 아예 다른 컨셉으로 한 쪽 이야기는 리얼 다큐멘터리고, 이 쪽 이야기는 진짜 '영화'라는 컨셉을 잡고 만든 건 줄 알았다.
차라리 이 꼬맹이들 이야기를 다 빼버리고 YB의 모습을 더 담았으면 얼마나 속이 후련했겠냐! XX새끼들아.

이 장면이 움짤이 없다는 게 아쉽다. 옛날에 직접 만들었던 게 기억난다.


마지막에 살짝 다른 이야기를 하면, 내가 노래하는 직업을 가진 우리나라 남자 사람 중에 가장 따라가고 싶은 사람이 바로 윤도현이다.
근데 이 사람, 이 아저씨, 아니 이 형은 노래를 너무 잘 한다.

흑흑.
내 눈시울을 촉촉하게 적신 영화.
누구에게나 한 번 권해보고 싶은 영화다.
추천하는 영화니까 동영상 하나 올리고 사라져야지.

 
  1. 확실히 말하기가 좀 애매한 게 ,재능이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나 힘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본문으로]
  2. 기타리스트 유병열이 YB를 떠난 고 허준을 영입한 것이 2000년이라 그 이후의 햇수만 따졌다. [본문으로]

'ART' 카테고리의 다른 글

A Few Good Men  (2) 2011.06.09
멈출 수 없는  (4) 2011.06.08
해피 엔드  (0) 2011.05.29
푸코의 진자 3  (0) 2011.05.27
푸코의 진자 2  (0) 2011.05.23
Raising Arizona  (0) 2011.05.21
푸코의 진자 1  (0) 2011.05.19
EuroTrip  (3) 2011.05.15
Let Me In  (0) 2011.05.14
국화와 칼  (1) 2011.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