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전쟁

| 2011. 11. 4. 00:17

KAIST에서 김영길 한동대 총장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할 무렵인 올해 2월, 교내 커뮤니티 아라는 창조 과학자에게 카이스트 명예박사 학위를 주는 것이 합당한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으로 뜨겁게 타올랐다.
대한민국 이공계의 산실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 그런지 반종교적, 탈종교적 성향을 기반으로 한 반대 여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비록 명예박사 학위 수여가 번복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최소한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공학도로서 갖춰야 하는 기본적인 이성적인 틀을 가지고 있음에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그 논쟁을 ㅡ 어떻게 보면 일방적인 비판을 ㅡ 보면서 굉장히 놀랐던 것은 카이스트에 올 만큼의 과학 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내 모교에 창조 과학 전시관 같은 장소가 있다는 것도 그때서야 처음 알게 되었는데, 누가 보기에도 마땅하게 옳은 것과는 반대 편의 입장을 주장하는 동문생들을 보며 정말 치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개탄의 심정을 금치 못했다.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가치관이 협소했던 나는 눈에 불을 켜고 논쟁의 글들과 댓글들을 읽어나갔다.
무언가 나도 한 마디 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논쟁의 주류를 이루는 사람들에 비해 내가 가진 지식은 여성가족부의 '그게 아니고'에 대한 이해 수준 정도로 보잘것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댓글에서 이 책의 이름을 보게 되었다.

모든 논쟁이 종식된 지 한참 지난 지금에서야 '종교전쟁'을 읽었다.
아마 내가 그 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분명히 아라에 몇 줄 댓글이라도 달 수 있었으리라.

종교전쟁종교에미래는있는가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지은이 신재식 (사이언스북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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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도발적인 책 제목 '종교전쟁'이 의미하는 것은 종교 사이의 전쟁이 아닌 종교라는 세계관에 관한 전쟁[각주:1]이다.
'종교전쟁'은 과학 철학자 ㅡ 카이스트 선배다 ㅡ 와 개신교 신학자, 종교학자가 풀어내는 종교에 대한 담론을 실은 아주 흥미로운 책이다.
서간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모두 한 글 쓴다하는 석학의 글인 만큼 문체가 읽기에 최적하된 형태를 띠고 있다.
종교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세 사람의 글을 통해 편협하지 않은 공평무사한 가치관을 기를 수 있다.
이전에 종교에 대해 별 생각이 없이 살았던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것이고, 어떤 하나의 입장을 취하고 살았던 나 같은 사람에겐 한층 넓은 시야를 갖게끔 도와준다.
다루는 내용의 심도가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지도, 말초적이지도 않아서 이 분야에 대해 조금의 배경 지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손쉽게 읽을 수 있고, 가끔 등장하는 생소한 개념엔 친절한 주석이 달려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책은 크게 네 가지 주제에 대한 각각의 편지와 실시간으로 이루어진 세 사람의 대화가 주(主)를 이루고, 세 사람이 별도의 주제로 쓴 짧은 글들이 부(副)를 구성하는데 정말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24살 나의 가치관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준 세 사람 ㅡ 버트런드 러셀, 노암 촘스키, 리처드 도킨스 ㅡ 의 책을 여러권 읽어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세기 후반의 가장 뛰어난 수리 철학자이자 행동하는 지성인의 대표 러셀의 다양한 과학 철학적 분석과 그로부터 기인하는 범세계적 평화 운동의 움직임을 기반으로 촘스키의 세계의 패권을 잡은 미국의 원리주의적 정치 집단에 대한 비판과 도킨스의 무신론적인 신다윈주의적 개념 '밈'으로 무장한 나의 작은 세계관을 이루는 요소들이 더욱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더욱 단단한 무언으로 뭉쳐가는 느낌이 들었다.
띄엄띄엄 떨어져 있던 나의 조각 지식들이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맞춰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 것은 모두 장대익 교수[각주:2]의 몫으로 나는 모든 주제에 대해 항상 나의 입장과 매우 흡사한 입장을 가진 그의 글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차후에 그가 지은 책, 옮긴  책, 언급한 책을 섭렵할 생각이다.
가장 흥미로웠던 진화 vs. 창조 논쟁을 차치하면, 장대익 교수의 글 중에서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종교를 바라보는 입장을 정리한 부분을 참 유익하게 읽었다.
여러가지 다른 이론을 펴는 사람들의 글을 읽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단지 내가 도킨스의 글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덕인지 이공학도로서의 나는 도킨스의 입장을 지지한다.
이런 저런 부분에서 다듬어 나갈 필요는 있지만 그가 제시한 밈 이론은 지나치게 매력적이다.

지나치게 매력적.


김윤성 교수의 글은 이분법의 세계에서 일편항적인 입장만을 가지고 있던 내게 중간지대가 아닌 제3지대의 존재를 알려주었다는 면에서 흥미로웠다.
거의 제갈공명의 천하삼분지계가 떠오르는 대목.
종교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개괄적인 지식을 얻게된 것이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수확이다.
진리 자체에는 관심이 없는 중립적 또는 제3자적 입장의 학문 종교하는 상당히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질성의 토대 위에서 솟아나는 의미의 영역, 그 영역은 과학적 탐구나 예술적 표현이나 종교적 언술로도 결코 고갈되지 않습니다. 의미란 처음부터 정해진 방식으로 있었던 어떤 실체 따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의미라는 것이 단지 우리가 발견하면 되는 고정된 실체였다면 그런 의미는 이미 오래전에 소진되었거나 언젠가는 소진되고 말겠죠. 하지만 의미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의미란 우리가 삶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던지는 물음들에 의해 예기치 못했던 방식으로 계속 생성되는 효과일 뿐입니다. 종교와 과학에 관한 논의들에서는 이렇게 새로운 의미들이 지속적으로 생성되는 생생하고 흥미진진한 과정이 드러납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삶의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들을 생성해 내기 위해 분투하는 우리 인간의 한 단면이기도 하겠고요.

 하지만 마지막 대화편에서 김윤성 교수의 발언을 읽다 보면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보기에 그의 말은 상당 부분이 핵심을 피한 겉돌기에 불과했다.
종교학의 제3자적인 관점은 동전의 양면이 될 소지가 다분하다.
한 걸은 물러서 현상을 관찰하는 태도는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수단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아무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나의 이분법적 사고에 다소 간의 여유 공간이 생긴 것은 김윤성 교수 덕이다.
과학과 종교는 그 시작점이 아예 다르기 때문에 그 둘 사이엔 절대적인 척력만이 작용할 거라 생각했고, 나 또한 그 척력으로 종교를 멀리 해왔다.
하지만 과학과 종교를 자연과 우주에 대한 나름의 해석법이라는 관점을 취하면 그와 같은 범주에 속하는 동등한 지위의 다른 개념들이, 예를 들어 위에서 말했던 여러 예술 분야들이 등장하게 되고 사고에 유연성이 생긴다.
각각의 해석법은 부분 집합을 공유하기도 하지만 분명히 다른 집합과는 공유하지 않는 고유의 공간을 가질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고유의 공간은 다른 쪽의 입장으로부터 불가침의 영역이 되고 만다.
테일러 급수를 사용해 'Bohemian rhapsody'의 감동이 존재 불가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이런 상황이라면 예전의 나처럼 마냥 종교를 밀어 내는 것은 아주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짓이 되고 만다.
'과학 중심주의'라는 신선한 딜레마를 나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흥미로운 과제다.

김윤성 교수가 주장하는 무신론과 유신론의 대립이 무의미한 형이상학적 쟁점이라는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무엇을 믿는지는 개개인이 판단할 일이다.
이 다음에 문제가 되는 것은 종교의 필요성인데 나는 여기서 러셀과 촘스키, 도킨스의 그것과 의견을 같이 한다.
종교의 역기능은 순기능을 한참이나 상회한다.
김윤성 교수가 종교의 순기능을 두둔하며 간과한 점은, 종교의 역기능은 대부분이 종교 없이는 발생할 수 없는 것이지만, 종교의 순기능은 종교가 아예 없더라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종교만의 순기능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종교만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아니다.
그러나 종교는, 우리가 종교와 관련되었다고 하는 갈등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위에서 언급한 세 위인도 활발히 언급한 바 있고 그 외에도 수많은 읽을 거리가 나와있으리라고 본다.
종교학자가 종교의 존재 의의를 주장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연구 대상이 인간에게 불필요한 것이고 그 실체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

사진은 인터넷에서 '명동 쿨가이'로 검색하면 쉽게 얻을 수 있다.


신재식 교수의 글을 통해 여전히 종교인들의 주장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어째서 그들의 생각이 종교라는 기반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신앙을 가졌다는 것을 이성의 부재 ㅡ 모든 이성이 상실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핵심적인 부분의 합리성을 잃었다고 느꼈다 ㅡ 라고 생각했던 내게는 극적인 사고 전환이 아닐 수 없는 부분.
비록 내가 종교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신재식 교수는 배울 점 많은 참 훌륭한 목회자가 아닌가 한다.

3년 전 여름에 고민하던 '신 없는 종교'에 대한 담론을 비롯해 우리가 앞으로 더 생각해 봐야 할 시사점을 짧고 굵게 나열한 마지막 대화의 장도 흥미롭긴 하지만 누가 뭐래도(누가 뭐래도) 나에겐 진화 vs. 창조 논쟁을 다룬 부분이 가장 재밌었다.
명예박사 학위 논란 당시 이 책이 언급되었던 것도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론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부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종교전쟁'의 4장을 읽고 나면 이제 인간의 의식 영역에서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론이라는, 사이비 과학조차 되지 못하는 억지로 가득 찬 똥 푸대는 이제 사라져야 할 때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 것이다.
신재식 교수의 신사적이지만 신랄한 비판을 보라.
기독교 진영 내부에서의 비판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야구 선수들이 축구 경기장에 와서 축구 선수들에게 축구공만으로 충분치 못하니 야구 배트를 도입하고 야구 규정대로 경쟁하자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유신론적 과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야구 선수들입니다. 자신들의 규정을 관철시키고자 억지를 쓰는 사람들이죠. 아직까지도 현대 과학은 무신론자부터 불가지론자, 다양한 전통의 종교인들이 같은 룰 아래서 함께 논의하는 마당이죠. 이와 달리 유신론적 과학은 '그들만의 리그'일 뿐입니다.

책 '종교전쟁'의 단점을 굳이 찾아 보자면, 그것도 나의 책에만 국한되는 문제일 가능성이 높은데, 책의 제본이 튼튼하지 못하다는 것 정도이려나.
  1. 여전히 전쟁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지만 말이다. [본문으로]
  2. 보통 사람 이름 뒤에 직책을 붙여 말하는 편이 아닌데 학교 선배라 그런지 그냥 이름만 두고 말하기가 좀 그렇다. 내친 김에 이 책의 저자 세 사람 모두에게 '교수'를 붙이기로 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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