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cm - 그게 아니고

| 2011. 10. 23. 15:44

'그게 아니고'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상에 가장 좋은 노래' 중에 하나로 꼽힐 수준의 노래다.
이런 노래가 '아메리카노' 같은 이벤트성 노래에 묻혀 원래 받아야 할 수준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심지어 10cm 본인들은 이 노래를 데뷔 앨범의 타이틀 곡으로 내세웠는데도 말이다.
그러니 나 같은 재야의 블로거라도 힘을 내어 조금이나마 더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노래의 구성은 아주 간단하다.
처음 두 소절은 Bm7 - E7 - AM7 - F#m7[각주:1]의 안정적인 투-파이브-원-식스 구조를 취하고 있다.
그러다가 멜로디가 바뀌면서 세 번째 코드가 C#m7으로 바뀌는데 이 기가 막힌 전조 하나로 '그게 아니고'는 세상을 다 얻었다.
코드 진행보다 보컬의 멜로디 라인으로 승부를 거는 요새 음악의 트렌드에 아주 잘 영합하면서 곡의 긴장감을 단 한 순간에 극적으로 끌어올리는 엄청난 전환이다.
'투-파이브-원-식스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을 정도.
나긋나긋하고 심플한 솔로와 '울지~'의 '지~'의 떨어지는 음은 '그게 아니고'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숨은 공신들이다.
차분함에서 절규로 바뀌어가는 드럼과 드라이브 걸린 기타 소리야 모두가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므로 따로 언급하지는 않겠다고 하면서 이렇게 언급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이 노래의 장점이 단지 멜로디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디테일한 스토리식의 가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20대 젊은이들의 '가을 집단 무의식'을 자극하면서 노래의 서정성을 내가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그런 높은 경지로 승화한다.
그게 아니라며 보일러의 고장으로 자신의 울음의 이유를 돌리는 화자의 찌질한 정서는 떠나간 사람의 양말과 감기약이라는 사소한 소재에서도 그를 그리워하는 애틋함과 더해져 청자의 마음을 아리게 만든다.
그리고 결국엔 네 생각에 운다고 자백하는 부분에서는 카타르시스인지 뭔지 애매한 감정이 차오른다.
이별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쓸 수 없는 가사이면서 마찬가지로 이별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가사.

이 엄청난 노래에 19금 판정을 내린 여성가족부에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잠시 미뤄두고 일단은 가사와 함께 '그게 아니고'를 감상해 보자.
도대체가 이부자리를 치우다 양말이 나온 것[각주:2]에 19금 판정을 내린 것은 무슨 상식으로 한 일인지 알 수가 없다.
이 이야기의 '너'가 일찍 죽어버린 자식이나 부모님 또는 형제 자매일 가능성에 대해선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인지?
뭐 조금 오바한다면 이 가사의 '너'에 화자가 기르던 개를 감정이입 할 수도 있겠다.
요새는 개도 감기약 먹고 양말 신고 다니는 것 같으니 말이다.

아, 개소리는 여기까지.

어두운 밤 골목길을 혼자 털레털레 오르다
지나가는 네 생각에 내가 눈물이 난 게 아니고
이부자리를 치우다 너의 양말 한 짝이 나와서
갈아 신던 그 모습이 내가 그리워져 운 게 아니고

보일러가 고장 나서 울지

책상 서랍을 비우다 니가 먹던 감기약을 보곤
환절기마다 아프던 니가 걱정돼서 운 게 아니고
선물 받았던 목도리 말라빠진 어깨에 두르고
늦은 밤 내내 못 자고 술이나 마시며 운 게 아니고

보일러가 고장 나서 울지

어두운 밤 골목길을 혼자 털레털레 오르다
지나가는 네 생각에 우네

분명히 노래가 끝나면 다시 재생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재'재생이 끝나면 '재재'재생을 하게 될 것이고 질릴 때까지 무한 루프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어느 새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정말이지 최고다.
  1. 자세하게 딴 코드가 아니므로 원곡과 다르다고 태클 걸지 말라. [본문으로]
  2. 곰곰히 생각해 보아도 이 부분이 아니면 '그게 아니고'에 19금 판정을 내릴 수 있는 부분은 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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