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

| 2011. 10. 30. 09:20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는 나의 어머니가 시간이 있으면 읽어보라고 권해주신 책이다.
그 때가 정확히 언젠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기록을 통해 추정해 보면 최소 6개월은 넘은 것 같다.
내가 6달 ㅡ 일단 6달이라고 친다면 ㅡ 전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지난 6달간 나의 생활엔 어느 정도의 변화가 있었을까.
글쓴이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이 어떻게 쓰여진 것인지, 그리고 어떤 의도가 있다면 그 의도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짧게 밝힌다.

그때 느낀 행복감이 이 소설을 계속 쓰게 했다고 하면 믿겠는가. 소설 속 엄마를 그리 불행하게 만들어놓고 말이다. 그런데 사실이다. 그 새벽의 행복을 나만 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행복이었다. 누구에게도 아직 늦은 일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은 내 식의 방법이 이 소설이다. 내 그런 마음이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라는 첫 문장을 탄생시켰다. 연재를 마치고도 고심 끝에 엄마를 되살리기 위해 에필로그 '장미 묵주'편을 썼다. 그 첫 문장을 엄마를 잃어버린 지 구개월째다,로 선택한 이유도 우리가 어머니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돌볼 수 있는 시간이 아직 남아 있음을 말하고 싶어서다. 잃어버렸을 뿐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의 여지를 남겨놓고 싶었다. 오늘의 우리들 뒤에 빈껍데기가 되어 서 있는 우리 어머니들이 이루어낸 것들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가. 그 가슴 아픈 사랑과 열정과 희생을 복원해보려고 애썼을 뿐이다. 이로 인해 묻혀 있는 어머니들의 인생이 어느 만큼이라도 사회적인 의미를 갖기를 바라는 것은 작가로서의 나의 소박한 희망이다. 
 
어머니들의 삶의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평소에 잊고 지냈던 어머니의 가치를 재부각시키겠다는 그녀의 전략은 6달 전의 나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을까.
과연 나의 지난 세월은 그녀의 의도대로 바뀌게 되었을까.
어머니들의 삶을 조명한 책을 진짜 어머니가 권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
'엄마를 부탁해'를 읽으면서 나는 이와 같은 책의 내용과는 다소 별개의 의문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이것이 내가 '엄마를 부탁해'에 대해 이 책이 그 동안 받은 만큼의 칭찬을 마냥 늘어놓을 수만은 없는 이유일까.
이것이 책 뒤표지에 실린 대중음악가 이적의 조금은 허세가 들어간 짧은 평에 공감할 수 없는 이유일까.

엄마를부탁해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신경숙 (창비,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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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를 읽어 나가던 내 머리에 우연히 떠오른 것은 이 책이 한창 유명세를 타고 있을 때 읽은 기사다.
미국의 어떤 여자가 김치 냄새 나는 신파극이라는 식으로 '엄마를 부탁해'를 비아냥거렸던 것.
이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겠지만 조금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전적으로 그 비아냥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기에 뭔가 부담을 느끼게 될 것이다.[각주:1]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은 이런 가족중심주의적인 사고관과 대한민국의 어머니라는 특수성이 범인류적으로 통용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서양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박소녀 씨의 모습은 말 그대로 작가가 지어낸 억지스러운 인간상임이 분명하다.
심지어 한국 사람인 나조차 몇몇 부분에서 작가의 강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책장을 빨리 빨리 넘겨버렸다.

그렇다고 한국 안에서는 나 같은 사람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이 공감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사실은 그것에도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자기 희생과 헌신의 상징으로서의 어머니상은 시류를 많이 타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뒤표지의 평 중에 '엄마를 부탁해' 같은 소설이 요즘 세상에 거의 멸종 위기에 처했다는 말은 그 희귀성을 치켜 세우는 말일 수도 있지만 앞으로는 이런 류의 소설이 뜨기 힘들 것이라는 영리한 디스일 수도 있다.
이 책에 나오는 '그 시대의 그런' 어머니들은 점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나이를 따져 봤을 때 어느 정도 그럴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내가 박소녀 씨의 모델로 삼은 사람은 내 외할머니였다.
그나마 지금의 20대 초중반인 사람들이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의 향취를 간접적으로나마 직접 느낄 수 있는 마지막 세대라는 말이다.
'엄마를 부탁해'를 지금 중학생들에 읽힌다고 가정해 보자.
과연 그들이 이 책에서 느끼게 될 것은 무엇일까.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지 않은 학생들이 이질감을 느끼거나 옛날 이야기라고 들어오던 시대의 이야기려니 하고 넘어가지 않을까.

사라져가는 인간상에 대한 오마쥬라는 면에서 뜨거운 찬사를 보내야 맞는 일일까.
나는 잘 모르겠소.

우리가 이 시대의 어머니에서 느낄 점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까지는 내 개인적인 주변 환경이 많이 작용한 비판이라고 치자.
그러나 단순한 소설로서 '엄마를 부탁해'를 보더라도 집어낼 점은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모습을 면면히 살펴 보면 그 뻔하디 뻔함이 꼭 분식집 육개장을 먹는 맛이다.
물론 가족들 개개인의 특색은 잘 살아있다.
1인칭, 2인칭, 3인칭의 서술 시점을 번갈아 사용하며 각자의 고유한 심리를 극대화했다.
자기만의 세게예 너무 익숙해져서 타인에 대한 ㅡ 여기서는 어머니에 대한 ㅡ 이해의 부족과 자기 고립에 빠진 사람들의 입장을 서술하면서 집어내는 디테일들은 감탄을 자아낸다.
섬세하고 주의력 좋은 작가만이 잡아낼 수 있는 소소한 감동 포인트들을 읽으면 때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분명히 한계는 있다.
자연스럽게 신파를 끌어내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전형적인 캐릭터가 빚어내는 식상한 갈등과 그에 대한 식상한 카타르시스는 독자의 몰입된 감정을 격하게 해친다.

게다가 나는 여기에 대체 내 어미니의 진의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야 하는 짐까지 떠맡고 있지 않았는가!
영리한 나는 애써 그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있었으나 그것이 정답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무슨 의도가 되었든 거기서 빠질 수 없는 것은 어머니가 나에게 변화를 종용했다는 것이다.
마침 이는 내가 근 몇 달간 간간히 생각해오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왜냐하면 나라는 사람 또한 전형적인 인간상과 겹치는 면이 있다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며, 내 어머니 또한 어떤 면에서 박소녀 씨와 닮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결과적으로 작가의 전략은 내겐 꽤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6달 전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지금만큼의 변화를 이끌어내기엔 어려웠을 것이다.
자기 변화는 그 어떤 외부 자극보다 자기 자신의 의지가 중요하기 때문.
어느 정도 생각이 완성되면 나의 가족관에 대한 글을 올릴 예정이다.

명작까지는 아니라고 본다.
수작과 범작 사이에서 수작에 좀 더 가까이 위치한 정도랄까.
정말 사족에 불과했던 해설은 빼버린다면 말이다.
  1. 인종차별적인 발언에 대한 내용은 빼고서 말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김치 냄새가 난다는 말을 인종차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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