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

| 2013. 11. 30. 17:56

http://www.killerfilm.com/interviews/read/exclusive-robert-hall-talks-quarantine-2-and-old-scratch-36330

나는 스릴러 또는 호러물은 굉장히 좋아하지만 좀비물은 극도로 싫어하는 편이다. 애초에 좀비라는 대상 자체에 흥미를 느끼지도 못할 뿐더러 최소 내가 알고 있는 한 존재하지 않는 어떤 생명체의 등장은 스릴러라면 스릴감을, 호러라면 공포심을 늘려주지는 못할 망정 온갖 산통을 다 깨버리는 소재가 된다. 전통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공포 영화들 ㅡ 여기서 스릴러물을 제외하는 이유는 SF가 아닌 이상 보통의 스릴러물에는 비현실적인, 즉 상상 속의 생명체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ㅡ 이 내게 크게 어필하지 않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엑소시스트》의 명장면 같은 것은 내게 웃음거리에 불과했다[각주:1].

그러나 이 78분짜리 영화를 보게 된 이후로 좀비물에 대한 나의 시각이 조금은 달라지게 되었다. 좀비물은 재밌는 영화가 될 수 있다. 단 《REC》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조건을 충족시킨다면 말이다.

1. 앞뒤를 다 빼먹은 설정

결정적으로 나 같이 가슴이 차가운 리얼리스트들에게는 아주 필수적인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좀비병(?)의 발병 원인 및 해결책 조사, 그 뒤에 숨겨진 거대한 음모 뭐 이딴 이야기는 솔직히 말해서 어떻게 되었든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좀비 영화의 관객들에겐 그저 좀비 같은 녀석들이 나오고 주인공 그룹원들이 점점 감염되며 더 좁은 공간으로 고립되어가고 거기서 어떤 극적인 반전을 꾀하든 그냥 그렇게 숨이 말라 죽어버리든 끝까지 긴장감을 주는 요소만이 필요할 뿐이다. 사실 펜트하우스에 올라간 장면부터 영화가 다 끝나가는 마당에 설마 배경 설명을 장황하게 하려는 것은 아닌지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그런 불안함을 명민하게 해소시키는 ㅡ 게다가 후속편에 대한 미련까지 남겨놓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었다 ㅡ 제작진의 재치를 보고 참 많은 공을 들여 만든 영화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2. 사실적인 인물 묘사

그렇다. 애초에 거대하고 진지한 설정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등장인물들 또한 각각의 고유한 캐릭터를 보유할 필요가 없어졌다. 주연과 조연 정도만 정하고, 모두가 흥분하고 모두가 겁에 질리며 모두가 실수를 하는 역할을 연기하면 된다. 쓸데없이 진지해서 문제를 착착 해결해 나갈 주인공도 필요 없고, 자기 욕심만 챙기려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는 주인공의 친구도 필요 없고, 무모하게 자신의 힘만 믿고 도전하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는 주인공의 친구도 필요 없고, 그 틈을 타서 어떻게 애매한 러브라인을 만드려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는 주인공의 친구도 필요 없다. 어쩌다보니 모이게 된 대(對) 좀비 드림팀 ㅡ 예를 들어 뭐 경찰 하나, 의사 하나, 베어 그릴스 하나, 천재 똑똑이 하나, 생물학자 하나 등 ㅡ 같은 것 역시 필요가 없다. 그냥 소리 지르고 죽고 싸우고 도망만 가는 다수의 등장인물들만이 필요할 뿐이다.

3. 짧은 러닝타임

모든 조건이 만족되더라도 영화를 보는 일 자체가 노동처럼 느껴지면 말짱 도루묵이다. 사람은 그렇게 오래 자신의 집중력을 쏟아가며 긴장하기가 쉽지 않다. 78분의 러닝 타임은 그런 면에서 대단히 만족스럽다.

종합적으로 판단했을 때 《REC》는 내 영화 인생의 한 획을 긋는 대단한 스릴러 물이었다. 이 대단한 기대감 때문에 후속작을 보는 것이 조금 꺼려지긴 하지만 언젠가 생각이 나면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행위일 것이다.

  1. 하지만 여기엔 AVGN도 단단히 한 몫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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