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북 2

| 2011. 7. 25. 18:56

'2권까지 다 읽는다면 뭔가 크게 느끼는 점이 있을지도.'
내가 양철북 1권을 읽고 쓴 평의 맨 마지막 문장인데 2권을 다 읽고 나서 나의 예상이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결국 10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가 느낀 것은 귄터 그라스가 의도한 바에 비하면 아주 적은 양에 지나지 않을 터.

양철북2(세계문학전집33)
카테고리 소설 > 독일소설
지은이 귄터 그라스 (민음사,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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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중반부터 3부까지 실린 2권.
전반적인 분위기는 1권의 그것과 별로 차이가 없었다.
기괴하고 어둡고 불안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2권을 열자마자 등장하는 알브레히트 그레프의 자살은 기괴함 그 자체였다.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에서 벨보가 죽게 된 그 이중 진자의 기이함과 흡사한, 인공적이며 물리학적인 미학을 내포한 그 목매닮이 상당히 인상 깊었다.
사실 이런 교사(絞死)에서는 은근한 멋드러짐까지 느껴지는데, 혹시나 해서 자신도 이렇게 멋진 교사를 행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다음의 링크를 권한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지 못했다면 절대 클릭하지 않는 것을 추천.
개인적으로 나는 저 링크를 주욱 훑어본 이후에 절대로 절대로 목을 매달아 죽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다.

오스카가 이른바 '제 3의 북채'라고 하는 자신의 조그마한 성기를 그레프 부인에게 마음껏 휘두르는 장면 또한 실제로 떠올려보면 상당히 거북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신장 94cm의 겉보기 세 살 사내와 성인 여자와의 성교.
SOD의 기획물에서조차 보기 힘들 것 같은 이런 컨셉을 통해 귄터 그라스가 나타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전쟁 이후에 남성의 수가 상대적으로 희귀해진 상황에 대한 풍자?
러시아 점령군이 도시에 들어닥친 이후 바로 여러 군인 기둥서방을 두면서 자신의 생활을 꾸려나가는 그레프 부인의 모습을 보면, 전후 일반인의 생활상을 묘사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오스카 본인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런 '어른'들의 행위가 후에 겪게 되는 성장의 한 요소로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예상도 가능하다.
그러니까 단순한 문학적 장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것.
모르겠다.
진실은 저 너머에.

베브라를 따라 곡예를 부리는 장면은 영화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서커스 장면을 생각나게 했다.
영화를 봤을 때는 그 장면에 대해 데빌 돌에게 뮤직 비디오가 있으면 마치 그런 식일 거라고 평했던 것 같은데, 데빌 돌의 음악이나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서커스나 양철북의 곡예나 각각 표현하는 수단은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매한가지가 아닐까.



콘크리트 벙커를 방문했을 때 생뚱맞게 등장하는 극대본식의 진행은 독자의 의식을 곧바로 허먼 멜빌의 기작 '백경'으로 이어지게 하는 연상의 트리거다.
'양철북'과 '백경'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두 작품 다 도저히 내가 이해할만한 수준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겠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오스카의 주변 인물들은 계속해서 죽어나간다.
역설적이게도 오스카는 다른 이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성장한다.
신체적인 조건에서 가장 이상적인 오스카의 여자였던 로스비타의 죽음에 스승 베브라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는다.

우리들 소인이나 광대는 콘크리트 위에서 춤을 추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거인들을 위해서 밟아서 굳혀놓은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연단 밑에 숨어 있어야만 했다.

1권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난, 육체적 한계에서 오는 좌절감과 비하감,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서 헤어나오지를 못했던 오스카의 세상에 대한 자위적인 태도는 뒤를 잇는 먼지떨이들의 몰락과 마체라트의 죽음을 계기로 극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어쩌면 마체라트를 죽음으로 몰고, 먼지떨이들을 나락의 그 곳으로 몰았던 것은 오스카의 성장에의 욕구 표현이 아니었을까.
처음에는 전혀 의도적이지 않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다가 나중에서야 그 순간에 당의 뱃지를 건내준 것은 순전히 자신의 의도였으며 그 의도는 악의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넌지시 언급하는 부분은 내 주장에 하나의 근거로 작용할 수 있겠다.
아니면 인과 관계를 바꾸어, 마체라트의 죽음이 오스카의 성장 욕구를 불러일으켰다고 볼 수도 있다.
무엇이 맞든 오스카는 '자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의 태도에서 '자라야 한다, 자랄 것이다'의 태도로 근본적인 변화를 맛보게 된다.

마리아는 울면서도 여전히 가톨릭식으로 정성어린 기도를 하고 있었다. 파인골트 씨는 아직도 갈리치아를 생각하고 있거나 아니면 복잡한 계산 문제를 풀고 있는 것 같았다. 쿠르트는 지치긴 했지만 끈질기게 삽질을 하고 있었다. 묘지의 담 위에는 여전히 재잘거리고 있는 러시아 소년 두 명이 걸터앉아 있었다. 하일란트 노인은 내내 시무룩한 표정으로 자스페 묘지의 모래를 마가린 상자로 만든 판자 위에 퍼붓고 있었다. 비텔로라는 단어의 세 자모가 아직 모래에 덮이지 않고 보이고 있었을 때, 오스카가 목에 건 양철을 벗겼다. 그리고 이제는 「자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가 아니라 「자라야 한다!」 라고 말하면서 관 위에다 북을 던졌다. 거기에는 이미 모래가 충분히 덮여 있어서 덜커덩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는 북채도 잇따라서 던졌다. 북채는 모래 속에 꽂혀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것은 먼지떨이 시대 이래로 내가 사용하던 북이었다. 전선 극장의 예비품 중의 하나였으며, 베브라가 내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 스승은 나의 이 행동을 어떻게 판단할까? 예수도 그 양철을 두들겼었다. 상자처럼 네모나고 커다란 마마 자국이 있는 러시아 병사도 그것을 두들겼었다. 그 북의 수명은 이제 얼마 남아 있지 않긴 했다. 하지만 모래 한 삽이 북 표면에 떨어지자 북은 그래도 소리를 냈다. 두번재 삽에도 약간 소리를 냈다. 세번째에는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았고, 다만 희게 래커칠한 양철만을 약간 드러내었다. 마침내 그 부분마저도 다른 모래 부분과 똑같이 되어버리고, 계속해서 모래가 쏟아졌다. 내 북 위에는 모래가 불어나고 쌓이고 성장했다 ㅡ 그러자 나도 성장하기 시작했다. 심하게 코피가 나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일련의 성장 과정에서 북을 포기하는 오스카의 모습을 보고 '과연 이 뒤로도 이 소설이 '양철북'인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오스카는 전과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자신의 거의 모든 기억이 연관된 북이라는 소재를 던져버리는 것과,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던 신비의 목소리를 잃게 되는 것은 오스카에게 있어서 엄청난 변화임이 분명하다.
귄터 그라스는 2부의 마지막에서 화자를 브루노로 전환시켜 좀 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정신적, 육체적 변화를 겪은 오스카의 상황과 심정을 서술함으로써 3부로 넘어가기 전에 결말을 이끌어 낼 준비를 마친다.

하지만 3부의 실상은 그러지 못하다.
오스카는 꾸준히 양철북을 다시 접하게 되고 곳곳에서 양철북의 대체물을 발견한다.
심지어 양철북을 들고 재즈 밴드의 일원으로 술집에서 공연까지 하게 된다.

그 재즈 밴드는 양철북과 플룻, 그리고 기타로 구성되어 있다.


간호사에 대한 집착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모계의, 또는 여성의 사랑을 꾸준히 받아왔다는 점에서 애정 결핍의 결과는 아닐 것이다.
작가의 개인적 취향이라고 하기에 이 사람의 풍자와 비유 능력은 너무 고도의 것이라 특정 대상에 대한 집착에는 어떤 숨은 뜻이 있을 것만 같다.
에나멜 벨트와 뱀장어의 연상 작용은?
왜 오스카는 그토록 과거의 기억에 집착하는 것일까?
양파 주점에서 나타난 그 엽기적인 눈물의 모임은?
전후의 가치관 불안, 기형적인 정서의 대변인가?
30세가 되어 무엇무엇을 해야 한다라는 의무감이 나타내는 것은 무엇일까?
오스카의 비정상적인 성장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궁극적으로, 이 세상의 많고 많은 소재 중에 하필 양철북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고른 것은 무슨 이유이며 양철북이 갖는 특성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고, 대체 그 무엇이 무엇이길래 그토록 주인공이 집착하게 되는 것일까?

많은 의문에 해답을 얻기 위해 책 뒤의 작품 해설을 읽었다.
아주 조금은 이 답답함의 갈증이 해소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대부분이다.
흥미로운 것은 귄터 그라스의 삶이 오스카의 삶과 많이 흡사하다는 것이며 또한 그 오스카의 삶이 독일의 역사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귄터 그라스 = 오스카 = 독일'이라는 공식이 성립하는 것을 보면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느꼈던 작가 자신의 고유한 경험이 훌륭한[각주:1] 작품을 쓰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상기했다.

해설을 봐도 잘 모르겠다면 스스로 더 똑똑해지는 수밖에 없겠다.
뒤집어 말하면 똑똑하지 않으면 이 작품을 이해하기는 힘들며, 그에 대한 해설조차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표현력이나 이야기 전개 방식 같이 글 자체에 중점을 두는 독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괴하고 어둡고 불안한 전제의 스토리텔링이 무엇인지 궁금하더라도 그 답을 추구하기 위해 1000여쪽에 달하는 책을 읽는 것은 기회 비용의 측면에서 손해를 보는 일이 아닐까.


  1. 지극히 주관적인 입장에서 '훌륭한'이라는 형용사보다 '훌륭하다고 하는'이러는 형용사가 더 잘 어울린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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