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 자신을 포함해 내 주변 사람들을 웃기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다.
내 스타일의 개그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 몇몇은 내게 개그맨 공채를 권할만큼 나의 개그는 어떤 특정한 부분에서 어느 정도 자타가 인정하는 수준에 올라있다.
그 특정한 부분의 예로 들 수 있는 것은 걸쭉한 섹드립, 기가 막히는 말장난, 절실히 와닿는 각종 비유, 다른 사람의 '구린' 점 따라하기 등이다.
몇몇 나의 개그 재능을 질투하는 자들은 나의 주옥 같은 드립을 저질이라고, 방법론적인 부분에서 웃음이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오는 것이지 그 내용이 진실한 해학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는 비판을 하지만 모두 근거없는 비난일 뿐이다.
상황을 꿰뚫는 날카로운 통찰력과 해학적 공기를 조성하는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 거기에 기본적으로 말을 만들어 분위기를 이끌어나가는 화술을 겸비하지 못한다면 내 것과 같은 개그를 구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얼핏 완전무결해 보이는 나의 개그에도 단점은 존재한다.
이한결(24세)식 개그의 치명적 단점은 나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특성에서 유래한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심정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에 있어 평균적인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FM에서처럼 사람의 정신적 능력을 수치화 할 수 있다면 나의 이 '상대방 심정 파악력'은 약 5점 부근에 머무를 것이다. 1
나는 상대방이 뚜렷한 표현을 하지 않는 이상 저 사람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성적 사고를 제외한 감정적 사고에 있어서 그 생각을 그 사람의 외면으로부터, 또는 그 사람의 주변 상황으로부터 유추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오래 전부터 직설적인 표현에 익숙해졌다.
가뜩이나 대화라는 것 자체가 갖는 애매모호함 때문에 의미전달에 있어 손실이 있는데 거기에 다른 사람이 심정을 읽어내는 능력마저 떨어지니 어떻게든 있는 그대로의 단호한 표현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2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만큼 다른 사람들도 나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나하는 생각이 들었기에 나는 내 대화의 상대방들도 내게 직설적인 화법으로 말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많은 한국인들이 그런 화법에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불과 1년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 동안에 나는 본심은 따로 있으면서도 제대로 표현하지 않아서 얻는 손해는 무조건 본인 부담이라는 사고 체계를 구축해나갔고 더욱 건방지고 독단적인 말투를 사용했다.
이런 말투는 유세윤이 만들어 낸 건방진 개그의 컨셉 같은 것과 잘 맞아들어가는 면이 있었다. 3
나는 이를 내 개그의 한 방식으로 삼았다.
나 자신을 높이는 또는 타인을 깎아내리는, 성공과 실패가 극명하게 갈리는 스타일을 채택한 것이다.
이런 개그로 나는 수많은 성공 사례를 거두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때로 몇몇 문제들은 상당히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지만 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잘못은 본인 탓'이라는 생각에, 그리고 마약과도 같은 개그 성공시의 쾌감에 빠져 그 문제들을 모두 도외시하고 말았다.
바로 이 문제들의 원인이자 내 개그의 치명적 단점은 위의 두 가지 요소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상대방의 기분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사람의 특이사항(역시 그 상대방 본인에게 어느 정도의 의미가 있는지는 개이치 않았다.)을 있는 그대로, 아니 유쾌함을 끌어내기 위해 실제보다 더 희화화하여 꼬집어 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여러 방법이 존재한다.
먼저 듣는 이가 내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방법이 있다.
실제로 내 주변에 여태까지 나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하는 말을 정도껏 흘려듣는데 성공한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 내게 물세례를 내린 그 사람처럼 갈등을 겪고 나를 떠났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이쿠, 원 투
문제의 기원이 나로부터 출발된 것이라면 고쳐야 할 점 역시 나로부터 찾아야 한다.
간단히 생각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는 세 가지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이 문제는 두 가지 원인이 서로 결합해 발생한 것이므로 둘 중에 하나 또는 두 원인 모두를 제거하면 되는 것이다.
즉, 상대방의 비위를 적절히 파악하면서 개그를 치거나(최선책) 상대방의 기분을 잘 모르겠으면 위험한 개그는 삼가거나(차선책) 아니면 상대방의 기분도 잘 맞추면서도 뭔가를 끄집어내는 말은 안 하는 것(불가능)이 그 세 가지 방법이다.
문제점을 인식한 이후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최선책이었다.
하지만 결국엔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었는데 그 이유는 나의 상대방의 기분을 읽어내는 능력이 발달하는 속도는 이대호의 주루만큼이나 느렸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대화계의 GTA 생활을 멈추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이 문제의 진척이 정체되어있음을 깨닫고 고안해낸 방법이 있기는 하나 ㅡ 고작 신나게 떠들다가 문득 분위기가 이상해졌음을 깨닫고는 '아, 혹시 이 이야기 때문에 기분 상했어?'라든가 '아, 이거 장난인데 너무 심한 것 같으면 말해줘.' 따위의 말을 하는 것 ㅡ 역시 말을 직설적으로 하지 못하는 친구들에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차선책을 택할 수도 있기는 하다.
실제로 이런저런 주변 사람들의 충고를 받아들인 나는 내 단점을 고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거의 작년 이맘때부터 나는 '착하고' '순해졌다'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강한 남성상을 꿈꾸는 내게 썩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는 증거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담배와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막연히 참는다는 것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가끔은 근질거리는 입을 참을 수 없어 못된 말을 내뱉고 만다.
뭔가 그 반응을 보고 즐기는 것인지, 그것도 꼭 하필이면 내 말을 듣고 기분이 상할 사람 앞에서만 그런다.
또 많은 경우, 기억이 썩 잘 나지 않을만큼 술을 먹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더라.
이성의 제국이 무너지면서 자제력을 잃고 나면 발생하는 현상이 아닐까 한다. 4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나는 개그하는 것을 좋아한다.
2. 나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는데 서툴다.
3. 나는 말을 직설적으로 한다.
4. 1~3번을 합치면 내게서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종종 생긴다.
5. 2번을 고치자니 그 속도가 너무 더디다.
6. 3번을 고치고 있는데 가끔은 삑사리가 난다.
나는 몇몇 사람들의 인식과는 다르게, 다른 사람이 나 때문에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상처를 입는 것을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런 일이 발생하더라도 그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잘 알고 있으며 그에 대해 사과할 마음도 분명히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어떻게해서든 고치고 싶은 나의 이 단점을 고칠 수 있는 궁극적 요소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내가 몇 달 전, 내 술 습관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나서 서서히, 하지만 눈에 띌만큼의 정도로 상황이 나아지고 있는 것과 비슷한 경우이겠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고, 어떻게 고쳐나가야 하는지 알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시간뿐이다.
몇 년 동안 유지해온 습관을 하루 아침에 고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지난 1년간 보여준 변화의 추세를 이어나간다면 머지않아 내 말에서 상처를 입는 사람은 극극소수의 사람들에 국한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극극소수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은 나중에 알량하게 피해나갈 쥐구멍을 미리 만들어 둔 것이 아니고, 정말 내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상처를 받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길을 가다가 술이 먹고 싶다고 했는데 지나가는 여자애의 이름이 원술이라서 수치심을 느꼈다거나 하는 경우가 남은 인생동안 1번도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그 누가 장담하겠는가.)
하지만 아무래도 정말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면 그냥 내게 말해주는 편이 훨씬 좋다.
내가 그런 일에 뒤끝이 없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모두가 마음을 털어놓고 말하는 그 모습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이겠느냐!
솔직하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은 오늘 언급한 내용과는 조금 다르므로 다음 기회에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런 경우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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