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거세다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빗줄기 아래를 무방비 상태로 걸어가면서 ㅡ 아이러니하다면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ㅡ 머리에 불현듯 떠오른 노래는 존 메이어의 데뷔 앨범에 있는 'City love'였다.
뉴욕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사를 유심히 보는 것만으로 이 클래식 풍의 락 발라드의 배경이 뉴욕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은 나도 하도 가사의 뜻이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야 참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으니 나의 거짓 허세에 너무 흥분하지는 말아달라.
짧은 설명을 덧붙인다.
노래의 도입부에서 언급되는 "너무 커서 어렵게 느껴졌다는 사과"는 "큰 사과(Big apple)"라는 별명을 가진 뉴욕을 가리키는 말이고, 후반부에 등장하는 "배터리에서 갤러리"라는 문구는 맨해튼 남쪽 끝에 위치한 배터리 공원(Battery park)을 가리키는 말이란다.
전반적으로 도회지적인, 모던하고 이지하면서 담백하고 조금은 건조한 사랑을 한 트랙에 잘 담아냈다고 본다.
존 메이어의 앨범들 중에서 1집을 특히 좋아하는 편인데 그 1집 중에서도 이 트랙은 특별히 더 좋아한다.
어쨌든 현악 세션이 전면으로 나오는 노래의 클라이막스 부분의 "covered in rain" ㅡ 존 메이어 음악의 끝판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트랙의 제목과 같다 ㅡ 이라는 구절이 머리를 맴돌기 시작했다.
보통의 사람들보다 비 맞는 것을 훨씬 더 싫어하는 내가 하도 충격적인 수준으로 비를 맞으니 뇌에서 무의식적인 기제로 끄집어낸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비를 맞아본 적은 언제였을까.
논산 훈련소에서 맞았던 비?
그래도 그 때는 더럽지만 판초 우의라도 있어 물기는 좀 피할 수 있었다.
내가 어디로 걸어가는지조차 잘 모른 채 그저 친구가 가는 길을 따라가면서 속으로는 계속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기억 여행의 종착역은 무려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의 뒷문 근처에 살았을 때다.
학교 담벼락을 따라 집으로 가는 골목길에는 우측으로는 학교의 높은 담이, 좌측으로는 작지 않은 주택들 제각각의 담, 전봇대 몇 개가 있었고 조금 무질서하게 주차된 자동차들이 몇 대 있었다.
하루는 집에 가는 길에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사방이 담벼락이라 잠시 비를 피할 곳은 전혀 없었다.
도저히 비를 피할 길이 없었던 나는 조금 뛰어 보다가 이내 걷기 시작했는데 참 신기하게도 그 때 정말 시원하고 즐거운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렇게나 비를 맞으면서도 깔깔거리면서 웃을 수 있었던 그 때, 그 순수함과 깨끗함을 떠올리며 '그래, 나도 그렇게 샘물 같은 시절이 있었지.'라는 생각을 했다.
나 같았으면 진심으로 빡쳤을 것 같다. http://freeutil.net/index.php?document_srl=17778264
물론 픽션이다.
비를 맞으면서 걷다가 옛날 생각이 났다는 것까진 레알이지만, 위 문단 맨 마지막 줄이 픽션이다.
무슨 옛날엔 순수하고 자시고 다 멍멍이 같은 소리에 불과하고 당장 1초라도 빨리 이 비를 피하고 싶었다.
평소에 거의, 95% 이상 신호 위반을 하지 않는 나는 그 혼잡한 뉴욕 교통을 뚫고 무단 횡단을 일삼았고 뭔가 손바닥만한 천장이라도 있으면 있으면 잠깐씩 비를 피하면서 극도의 비(雨) 혐오주의자의 모습을 보였다.
진짜 비가 싫었다.
온 몸이 젖어 오는 느낌이 드는데 정말 근 몇 년간 피부로 느낀 것중에 가장 찝찝한 느낌이었다.
이런 비 개객끼!
당시 나의 심정을 아주 잘 대변해주는 짤방.
그렇게 비를 뚫고 10분쯤 걷자 모마가 눈 앞에 나타났다.
입구는 상당히 비를 잘 피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노 스모킹이 적힌 간판 앞에서 당당히 담배를 피는 사람들, 이제 막 관람을 끝낸 건지 미술관에서 나오는 사람들, 나처럼 비를 피해 잠시 쉬는 사람들, 바로 옆에서 엄청나게 맛있는 냄새를 피우면서 고기를 굽는 사람 뭐 별 놈의 인간 군상이 그 좁은 공간에 다 있었다.
뉴욕은 인종 전시장이라는 말의 의미를 새삼 깨달으며 몸을 조금 말린 뒤 바로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목요일 오후 1시 무렵의 내부. 무슨 놈의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거냐.
아무래도 예상치 못한 날씨 때문에 실내 관광으로 방향을 튼 관광객들이 많은 것 같았다.
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잽싸게 표를 사고 가방을 맡긴 뒤 관람을 시작했다.
비록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보다 그 규모가 작다고는 했지만 미술관이라는 공간이란 특성 상,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휙휙 둘러보면 차라리 그 입장료로 우산을 사느니만 못한 돈 낭비 & 시간 낭비가 될 게 뻔했고, 그런 이중 낭비를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선 우선 시간을 버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표를 사는 것보다 가방을 맡기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썼다.
같은 창구에서 가방을 맡기는 것과 찾아가는 일을 동시에 해야 했기에 벌어진 사태였다.
팜플렛을 훑어 보니 나에게 익숙한 작가들의 익숙한 작품들을 효율적으로 보려면 위에서 부터 내려오면서 보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섰다.
아래로는 그냥 내가 찍었던 사진들 모음이다.
나의 관광 기조에 맞게 별 의미도 없이 그냥 셔터만 눌러대는 것은 삼갔고, 내가 마음에 드는 작품들 위주로 사진을 찍었다.
플래쉬만 터트리지 않으면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환경이 맘에 들었다.
스웨덴 출신의 극사실주의 작가의 '발과 바닥'이라는 작품이 아니고, 실내광에서 플래쉬가 터지나 안 터지나 시험 삼아 바닥을 찍어본 내 사진이다.
무엇보다, 한국 같았으면 잘 보기 힘든 작가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외국에 나가서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꼭 들르는 이유는 바로 이런 점에 있으리라.
뭐 설명이 필요 없는 피에트 몬드리안.
사진 사이 사이에 뭔가 글귀를 넣으려고 했으나 벌써 할 말이 떨어졌다.
아, 워낙에 미술관 내부 규율이 자유로워서였을까, 미술관에는 작은 공책을 들고 스케치를 하거나 거대한 사진기로 촤르르륵 사진을 찍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누구의 그림일까? 바로 앙리 마티스.
미술관에서 또 하나 좋았던 점이 있더라면 건조한 공기 덕에 몸이 급속도로 말라갔다는 것 정도?
회화 작품만 있던 것은 아니다. 마르셀 뒤샹의 작품.
어디선가 희미하게 잡히는 와이파이로 페이스북에 체크인도 했더랬다.
역시나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독특한 화풍의 폴 고갱.
중간에 어떤 한국인 아저씨를 만났는데 뭐 그냥 인사치레 정도만 하고 헤어졌다.
혼자서 여행하는 분 같던데 무슨 사연이었을까?
내 주변 여자들이 좋아하는 편인 구스타프 클림트.
2층과 5층에는 특별 전시관이 있었는데 특별 전시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별로 재미는 없었다.
구석탱이에 가서야 겨우 볼 수 있었던 바실리 칸딘스키의 그림.
아주 유명한 작품들 앞에서 자신의 모습과 그림을 같이 사진에 박으려는 관광객들이 의외로 많이 있었다.
뭔가 그렇게 하는 것이 유행인 것 같아 나도 내가 마음에 드는 그림 옆에서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뭐 그냥 말았다.
눈을 부릅 뜨면 르네 마그리트의 이름이 보일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오래 감상했던 그림.
역시나 후반부에 가서는 다리가 아파왔지만 순수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중도에 포기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었다.
존 케이지의 작품이란다. 역시나 인상 깊어서 사진기에 담아 왔다.
거의 세 시간을 미술관에서 서 있었던 것 같았다.
미술관 내부에 있는 까페에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며 지친 다리를 달래려고 했으나 입이 벌어지는 줄 앞에 포기.
한 번 입장권을 사면 그 날의 폐관 시각 전까지는 언제라도 다시 들어올 수 있다는 확인을 받고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내려가는 길에 찍은 모마의 내부. 이렇게 보면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지만 갤러리 안에는 정말 사람들이 많았다. 대체 성수기에 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말인가.
뿌듯한 마음과 무거운 다리를 동시에 겟하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이 개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짓궂게 내리던 비는 어느 새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이제서야 제대로 된 뉴욕 여행이 시작하는 것인가 하는 기대에 부풀어 큰 길로 걸어 나갔다.
별로 글씨는 없지만 사진들 덕에 스크롤이 길어졌으니 남은 뉴욕 여정은 다음 포스트로 넘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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