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부 41 : 숨 고르기

| 2012. 9. 11. 22:42

대충 내가 돌아다녔던 길을 표시해봤다.

긴 것 같으면서도 막상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을 아이들과 보내고 멋쩍은 인사를 한 뒤 바로 향한 곳은 그나마 유니버시티 시티 근방에서 가장 퀄리티 높은 음식을 파는 파드(Pod)였다.
미국에 온 뒤로 아마 가장 많이 갔던 레스토랑이 아닐까 하는데, 원래부터 내 친구와 구면이었던 주방장 형님이 한국에 들어가기 전에 점심이나 먹으러 오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었다.
라기보다 그냥 맛있는 스시를 먹고 싶었다.
결국 일을 쉬는 날 언제 가볍게 맥주라도 먹자는 약속을 끝끝내 지킬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다음 날 점심에 시내에 나가서 맛있는 점심을 먹는 약속은 잡을 수 있었다.
마지막이라며 차려 주신 스시도 아주 만족스럽게 먹었다.
우걱우걱.

특히 저 새우 튀김의 감칠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식사를 끝내고 간단히 이야기를 나눈 뒤 파드를 나섰다.
내가 다음으로 향했던 곳은 유펜과 관련된 물건을 파는 그런 흔한 기념품점.
이미 "PENN"이라고 적힌 후드 짚업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내가 살 만한 물건은 없었지만 한국에 있는 친구로부터 아무 거라도 좋으니 유펜의 이름이 적힌 펜을 사달라는 부탁을 받았더랬다.
항상 내게 아낌 없이 주는 친구라 아무리 배은망덕한 나라도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는 부탁이었다.

건물 내부는 꽤나 넓은 편이다. 의류와 스포츠 용품과 관련된 물품을 파는 쪽을 찍어봤다.

막상 뭔가를 사려는 마음으로 들어가니 원래는 평범해 보이던 티셔츠들이 갑자기 입고 돌아다녀도 괜찮을 것 같은 수준의 아이템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반팔을 사면 아무래도 오래 입지 못할 것 같아 긴팔을 사려고 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마음에 드는 디자인의 맨투맨 티가 맞는 사이즈가 품절된 상태였다.
생각보다 심플한 디자인을 가진 컵과 텀블러 앞에서도 적지 않은 고민을 했지만 끝내 그것들을 계산대에까지 가져가는 것엔 실패했다.
그냥 부탁 받았던 펜이나 몇 자루 샀다.
유펜의 자랑거리인 와튼 스쿨의 이름이 적힌 펜도 있길래 그냥 유펜이 적힌 펜이냐 아니면 와튼이 적힌 펜이냐를 두고 고민하다가 어차피 몇 푼 하지도 않는 거 두 종류의 펜을 모두 골랐다.

그 뒤로 저녁에 무슨 일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인간 기억 메카니즘의 특성상 어떤 일정의 초반과 마지막이 대체적으로 잘 보존된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딱히 별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아마 그다지 특별한 일이 없다는 것의 방증이 아닐까 싶다.
미국을 떠나기까지 쓰지 않을 짐들을 미리 캐리어에 챙겼던 것은 확실하다.
처음부터 내 흔적을 짙게 남기지 않으려고 아주 한정된 공간에만 짐을 풀었기 때문에 예상보다 빠르게 짐을 챙겼다.
남은 기간 동안 입을 옷가지와 기타 생필품을 제외한 모든 물건을 거대한 캐리어에 넣었다.

언젠가 밥을 먹었을 것이고 또 언젠가 잠에 들었을 것이다.

다음 날, 그러니까 7월 24일 화요일도 아침 일찍 잠에서 깼다.
적당히 정리할 일들을 끝내고 전날 약속했던 시간에 맞춰 외출 준비를 했다.
집 근처에서 형님을 만나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상쾌한 날씨였다.

원래 가려고 했던 쿠바 음식점이 이유를 알 수 없게 닫혀 있었던 지라 급하게 계획을 수정, 어느 정도 맛있다는 평가가 나 있는 다른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여러 음식을 시켜서 정신 없이 먹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은 닭 간을 곱게 갈아서 빵에 발라 먹는, 절대 이름이 기억날 리 없는 그런 샌드위치 같은 거였다.
하지만 계속해서 먹기엔 왠지 질리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그래서 조금 남은 녀석을 사진에 담아봤다.

그렇게 미국에서 먹은 점심 중 가장 많은 양을 섭취한 다음, 레스토랑을 빠져 나와 공손히 인사를 드리고 형님과 헤어졌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다는 진부한 프레이즈는 정말 진부하기 짝이 없는 고리타분함이 느껴지는 말이지만, 그 개념이 진부한 만큼 여행객으로서는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한 이별의 상황에서 씁쓸함을 감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이 시간이 흐르고 나면 대부분 당시의 상황보다 미화되며 따라서 어설픈 미소와 함께 맞이하는 지금의 상황을 애써 더 어색하게 만들 필요는 없는 것이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보자는, 일어나기는 굉장히 힘든 일이나 정말 그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지키고 싶은 약속을 했다.

다음 일정은 어느 새 많이 친해져버린 술 셔틀과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이었다.
일단 친구를 먼저 그 곳으로 보내고, 미리 인터넷에서 찾아 두었던 클래식 기타 가게에 가서 클래식 기타 줄 세트를 하나 샀다.
한 유펜 지인이 여름 방학 동안 방을 비우면서 자신의 기타를 친구의 집에 놓고 갔는데 내가 심심할 때마다 종종 치다가 언젠가 줄을 끊어 먹어버렸고 아무래도 한국에 가기 전에 내 손으로 줄을 갈아 놓고 가야겠다는 의무감이 강하게 들어서였다.

곧바로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했다.
산더미 같은 사이즈의 아이스크림이 이미 주문되어 있었는데 날씨가 살짝 불쾌할 정도까지 더웠던 지라 오악에 버금가는 위세의 그 얼음 산은 금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친구가 교수와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무작정 아이스크림 집에서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다.
일단 친구가 집으로 향하는 길에 바로 필라델피아 미술관으로 향할 계획이었던 나를 중간에 떨궈주기로 했다.
사실 나는 바로 그 곳부터 미술관까지 걸어갈 생각이었지만 도무지 당시의 햇빛 아래서 오래 걸을 용기가 나지 않아 그의 제안에 순순히 응했다.

택시에 내린 뒤로 극초반부터 길을 좀 헤매기는 했지만 어쨌든 거의 예상한 시각쯤에 미술관 근처에 도착했다.
지난 날의 관광에서와 마찬가지로 거의 온 몸이 땀에 절었다.
코 앞에 있는 미술관을 떠나기 직전에서야 가기로 결정한 나의 게으름을 탓하면서 꿋꿋하게 걸었다.

미술관 앞 도로. 미국에서 본 국도 중 가장 한산하고 깔끔하게 뚫려 있던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