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을 쫓는 아이

| 2011. 8. 9. 11:08

내가 다음에 읽어야 할 책을 고르는 정보원은 대개 내가 당시에 읽고 있는 책이다.
예를 들어 나는 노암 촘스키의 책을 읽으면서 버트런드 러셀과 조지 오웰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책을 읽게 되었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배가 본드'를 통해 요시카와 에이지의 '무사시'를 읽었고 그의 다른 작품인 '나루토 비첩'과 '다이코'까지 섭렵하게 되었다.
아직 읽지는 못했지만,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으며 마르셀 프루스트나 귀스타브 플로베르, 존 러스킨, 알렉산더 훔볼트의 책을 읽을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 '연을 쫓는 아이'는 다른 책에서 영감을 받아 읽게 된 책이 아니다.
그만큼 이 책을 누가 썼는지, 언제 썼는지, 줄거리가 무엇인지와 같은 정보가 전무한 상태에서 읽은 책이다.
본격적인 리뷰에 들어가기 앞서 짧은 평을 하자면 '연을 쫓는 아이'는 준수하지만 훌륭하다기엔 조금 모자란 재미있는 소설이다.

연을쫓는아이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지은이 할레드 호세이니 (현대문학,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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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쫓는 아이'는 아프가니스탄인이 쓴 최초의 영어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나?
이슬람, 알라신, 터번, 황야, 낙타, 탈레반, 알 카에다, 오사마 빈 라덴, 석유, 테러리스트, 알 자지라, 위험한 나라, 왠지 적대적인 느낌이 드는 나라, 김선일, 남녀 차별, 부르카, 차도르, 히잡 같은 것들?
사실 내가 위에서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단어를 이란이나 이라크, 사우디 아라비아 따위로 바꾼다고 해도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 지배적인 분위기는 비슷비슷하리라고 본다.
나 역시 우리가 흔히 중동이라고 부르는 지역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각 나라들이 대충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도 몰랐고, 중동이라고 묶이는 나라들을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그들을 비슷한 하나의 뭉텅이로 취급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게 된다면 그와 같은 사고가 몹시 편협한 축에 속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비록 우리가 느끼기에 그들은 국적과는 무관하게 비슷비슷한 사람들이라고 느낄지도 모르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의 국민에겐 그들만의 정체성이, 그들만의 민족의식이, 그들만의 자의식이 있다.
그런 특성은 이웃 나라의 그것과 분명히 구별되는 성격의 것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 그들의 문화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중동 지방 국가들의 외교적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하찮은 종교 차이[각주:1]로 이런 비극적인 사태가 발생한 것은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뒤집어서 생각하면 서방의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과 한국, 일본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또는 한국 사람이라고 하면 '뻑킹 김치맨'을 떠올리는 상황을 끄덕이며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 스스로를 몰상식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스스로를 뻑킹 김치맨이라고 부르는 것을 두고 누가 무슨 말을 할쏘냐. 이말년 화이팅.


자연스레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에 흥미가 생긴다.
로스탐과 소랍이 등장하는 '왕들의 이야기'란 어떤 책일까?
전통적인 연례 행사였다는 연 날리기 대회의 광경이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주로 먹는 음식은?
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음악은?
여자는?
내년 봄 무렵, 아프가니스탄과 가까운 곳에 가볼 기회가 생길 수도 있다.
그 때라면 아프가니스탄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허허, 먼 미래는 나중에 생각하자.

'연을 쫓는 아이'의 앞부분 약 300쪽 분량이 도입부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아프가니스탄이라는 특수한 소재가 갖는 매력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 책이 재미있는 이유로 작가의 훌륭한 전개 방식을 빼놓는다면 그가 섭섭해하겠지.
책의 저자 할레드 호세이니는 주인공 아미르의 눈을 통해, 그리고 그의 눈에 비치는 다른 인물들을 통해 조국의 과거와 현재의 상황과 그에 대한 견해를 피력한다.
때로는 보수적인 입장에서 이슬람 고유의 또는 아프가니스탄 고유의 문화를 옹호한다.
때로는 진보주의의 입장에 서서 어떤 이의도 제기되지 않고 무의미하게 대물림되는 악습을 비평하고, 즉 전통적으로 전해지는 '이슬람 사람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라든가 '아프가니스탄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래야지'하는 선입견을 버리고 더 나은 길을 제시하기도 한다.
캘리포니아라는 인종의 용광로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서 그런지 초민족적, 탈종교적인 관점이 자주 보인다.[각주:2]
그런 이념적인 다툼보다 지구에 사는 인류가 함께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고민하는 것이 더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려나.

그 모든 것은 중요하지 않다. 역사를 극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어쨌든 나는 파쉬툰인이고 하산은 하자라인이었다. 나는 수니파이고 그는 시아파였다. 그리고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그 사실은 바뀔 수 없었다.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그러나 우리는 어렸을 적에 함께 기어가는 법을 배웠다. 역사도, 인종도, 사회도, 종교도 그것을 바꿀 수는 없었다.

이스라엘에 대한 견해 때문에 그는 프리몬트에 사는 아프가니스탄인들로부터 분노를 사곤 했다. 그들은 바바가 친유대적일뿐 아니라 사실상 반이슬람적이라고 비난했다. 바바는 공원에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만나 차와 케이크를 먹곤 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관을 입에 올려 다른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곤 했다.
"종교와 정치가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을 그 사람들은 절대 이해 못 해."

"믿기지가 않아서요."
"때로는 나 자신도 내가 여기 온 게 믿기지 않소."
"아니…… 제 말은 왜 그애를 데리러 왔냐는 거예요. 미국에서 그 먼 길을 온 게…… 시아파 애 때문이라고요?"
그 말을 듣자 웃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버렸다. 그리고 더불어 잠도 달아나버렸다.
"피곤해요. 그냥 잠이나 잡시다."

이야기와 관련된 문화적, 정치적 양념을 싹 벗겨버리고 플롯 자체에 집중하자면 치밀하게 잘 짜인 이야기라고 평할 수 있다.
이야기의 흐름을 도입에서 전개로 전환해주는 큰 반전이 있는 뒤로는 다소 뻔한 이야기가 이어지기는 하지만 이런 식의 소설이 향할 수 있는 결론이야 어차피 제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므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아니다.
주인공 아미르의 성장 소설이라고 봐도 된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원죄의 극복이라거나 속죄에의 몸부림이라고 주제를 잡아도 무난하고, 문학적인 면에선 개인적인 과거의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담은 이야기라고 해도 되겠다.

기회가 된다면 2007년에 개봉해 준수한 박스 오피스 성적을 올린 동명의 영화를 봐야겠다.
영화를 보는 궁극적 목적은, 내가 그토록 궁금해하던, 아프간의 여인들을 보기 위해서다.

이런 장면만 등장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1. 하찮다는 것은 종교를 수식하기도 하고 차이를 수식하기도 한다. 스스로의 가치관에 맞게 알아서 판단해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하찮은'이라는 수식어가 맘에 들지 않는다면 그냥 생각이 다른 사람이라고 판단해주면 고맙겠다. [본문으로]
  2. 사실 할레드 호세이니가 종교인인지 비종교인인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끊임없이 기도를 올리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그가 신앙심이 아주 깊지는 않은 이슬람 교도일 것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겠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