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몰입

| 2011. 8. 6. 10:28

러셀의 자서전을 재미있게 읽던 작년 9월 경, 신문에 실린 작은 책 광고를 보았다.
1부터 100까지의 덧셈을 초등학생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풀어낸 수학자 가우스의 평전 '뜨거운 몰입'.
러셀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이성을 대변하는 사람들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 그 간접 경험으로 인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앞으로 읽을 책 목록에 그 이름을 올려두었다.
이 책을 읽을 기회는 여러 번 있었으나 번번이 더 재밌을 것 같은 책이 눈에 보여 읽는 것을 미뤄왔다.
읽기로 마음 먹은 지 약 1년 만에 드디어 '뜨거운 몰입'을 보았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을 간략히 줄이면, 그렇게 긴 시간동안 집착할만한 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뜨거운몰입:가우스평전차가운수의세계에서절대질서를찾아낸
카테고리 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지은이 후베르트 마니아 (21세기북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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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내 맘에 썩 들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내가 '평전'이라는 장르의 책을 처음 읽어봤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평전은 자서전과 전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한 인물의 인생을 조명한 책이다.
평전은 살아있는 사람에 대해서보다 이미 죽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 책으로, 글쓴이 본인의 평을 곁들여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전기 역시 글에서 다루는 사람과 실제로 글을 쓰는 사람이 다른 경우에 속하지만, 그 사람의 삶에 대한 분석보다는 관찰에 가까운, 제3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글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따라서 내가 어떤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읽으면서 알고 싶었던 그 사람의 가치관이 형성된 방식이나 일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과 당시의 느낌 따위는 평전을 통해서 거의 알 수 있는 바가 없었다.

물론 가우스라는 사람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지 못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수학사와 과학사도 많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그 유명한 5050 이야기[각주:1]가 등장하는 부분에선 그 이야기 자체에서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관습적인 편견을 깬 후 등차수열의 합의 공식에 대한 역사로 나아간다든지, 가우스가 천문학자의 길을 걷게 되는 부분 이전에 굵직굵직한 과학자들의 천문학적 발견을 시간 순으로 서술한다든지하는 것이다.
특히 한 사람의 일생을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같이 고려해 배경 정보를 풍부하게 제시하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의 족적을 나열하는 것보다 독자들로 하여금 그 사람의 인생을 훨씬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독서의 목적을 잘못 잡았던 나에게는 모두 장황하며, 논지를 흐리는 요소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아래 인용한 부분이 그런 대표적인 예다.
소에머링이 등장해 인간의 정신적 근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생뚱맞은 내용이었는데 그렇게 시작된 생뚱맞음은 문단의 끝으로 갈수록 점점 더 가관이다.[각주:2]
대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을까?

소에머링이 자신의 위대한 명제를 동료들이 인정해주기를 마인츠에서 고대하는 동안 다른 곳의 해부학자와 생리학자, 병리학자들은 죽은 환자의 뇌에서 종양을 잘라내 표본으로 만들면서 정보를 저장하는 뇌수를 여느 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쏟아버렸다. 괴팅겐 대학교의 산부인과 교수인 오지안더는 심지어 뇌 표본을 만들 때는 미지근한 빗물이나 눈 녹은 물로 뇌를 깨끗이 헹구라고 가르쳤다. 그의 말대로 뇌를 물로 꼼꼼히 씻는다면 소에머링이 말하는 정신의 물은 한 방울도 남지 않게 된다. 하지만 정신을 죽이는 배수처리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깨끗이 씻은 뇌를 다시 '정신의 액체'라고 부르기에 충분할 만큼 알코올 농도를 높인 '조직화된' 유동체 속에 보관했다. 곡주, 과일주, 포도주 등 술의 신과 '정신'의 어원이 같으니 결국 술과 정신은 하나가 아니던가!

결국 평전을 읽을 때는 작가의 주관적인 입장이 개입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잘 구분해야 한다는 임무가 독자에게 추가적으로 부여된다.
때로는 위와 같이 명백하게 글쓴이의 헛소리임이 보이기도 하나 어떤 부분에서는 사뭇 교묘하게 처리를 하여 글을 읽는 사람을 갸우뚱하게 만들기도 한다.

아이들이 교리를 암기하도록 글자를 가르치라는 군주의 명령을 따르는 일이 뷔트너 선생님의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의무였다. 그렇다 보니 놀라운 암기력을 지닌 가우스는 학교 입학 후 2년 동안 사막에 살던 고대민족의 역사와 아주 오래전의 유목생활 등을 암기하는 일 외에 다른 암기 거리를 얻지 못했다. 가우스는 이 외에도 성가를 배웠고 읽기 능력이 뛰어난 아이로 선정되어 의무화된 교리 교육도 마쳤다.


어떤 사람들은 단번에 이 부분에서 드러난 무신론적인 또는 반카톨릭적인 입장이 글쓴이의 것임을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질 못했다.
일단 표시를 해두고 가우스가 어릴 적부터 이런 반종교적 관점을 가졌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나와 비슷한 노선의 사람이라고 쓸 요량이었다.
하지만 가우스는 절대 반종교적인 사람이 아니며 구약 성경의 이야기를 사막의 고대민족의 역사라든지, 오래전의 유목생활이라는 표현으로 깎아내릴 성격의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책을 더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종교관처럼 한 사람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치는 부분에 대해 저런 미적지근한 설명이라니.

진짜 가우스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소소한 불평 하나만 더.
공격 대상은 '옮긴이의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든, 흔히 엄청난 사람이라고 생각되어 그 사람의 일생을 다룬 책이 나온 경우, 거의 대부분의 책의 리뷰이든 서평이든 띄지든 표지든 어쨌든 어딘가에는 대충 이런 맥락의 글이 쓰여있다.
김개똥이라는 인물을 다루는 이 책은 흔히 어떠어떠하다고 알려진 김개똥이 사실은 평범한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에 대한 이러저러한 선입견을 고쳐줄 책,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었고 어쩌구, 위대한 인물인줄만 알았던 그가 겪었던 인간적인 고민을 보면 어쩌구.
이제 그런 글귀는 너무 진부하고 식상하지 않은가?
세상에 그렇게 일상의 생활까지 파헤쳐도 인간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초인적인 사람이 누가 있을까?
특정 분야에 종사했던 인물을 바라볼 때 갖는 스테레오타입이 전형적인 형태로 굳어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왜 트라우마에서 기업 이름에 '가우스'를 넣었는지도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다.


가우스는 완벽주의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한 수학자요, 천문학자요, 측지학자며 물리학자다.
생각보다 수학 그 자체에 파고들기보다 측지학과 물리학에 인생의 상당한 열정을 투자한 사람이었다.
천재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아깝지 않을 만큼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고, 저 밑의 기반부터 자기의 손으로 이룩해나가길 원하는 끈질김과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평생을 자존심이 굉장히 강하고 원칙을 중시하는 고지식적이며 융퉁성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나이가 들 수록 학문이나 정치적 견해에 있어 보수주의적인 입장을 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는 진심으로 학문 그 자체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학문은 실용의 노예가 아니라 친구여야 한다. 학문은 실용에 선물을 줄 뿐, 실용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버트런드 러셀이 자서전을 써내려가면서 가장 많이 참조한 기록은 바로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나눈 편지들이었다.
가우스 평전 '뜨거운 몰입' 역시 가우스의 편지에서 많은 사실을 유추해낸다.
문득 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언젠가 어떤 경우로든 나의 옛 기록이 필요하다면, 그 기준이 되는 것은 무엇이려나.
이 블로그가 그 일종이 될 수 있을까.
별로 중요한 기록은 아니겠지만 옛 여자친구들이 소유하고 있는, 최소한 소유하고 있었을 그 편지들이 생각났다.
다시는 내 손에 들어오지 않게 될 그 고리타분한 감정의 기록들.
꽝들을 위한 마지막 오마쥬.

여자를 믿지 말라면서 확률의 함정을 빌어 경고한 친구의 편지에 가우스는 공감을 표하는 동시에 낙관적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는 답장을 보냈다. "꽝은 많고 당첨은 거의 없는 제비뽑기가 바로 결혼이라는 말은 유감스럽지만 맞는 말이군. 하지만 내가 제비를 뽑는다면, 나 역시 꽝을 뽑지 않으리라 믿네."


  1. 1부터 100까지의 합은 5050. [본문으로]
  2. 비록 마지막 문장은 나의 가치관과 많이 부합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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