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 동

| 2011. 7. 30. 16:18

제목과 포스터를 보고는 혜화동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가족적 이야기를 떠올렸으나 제목을 자세히 보니 혜화와 동 사이엔 작은 쉼표와 그것보다는 조금 큰 공간이 있었다.
혜화, 동.
시작하자마자 입김이 훅훅 나오는 장면에 '혜화, 겨울'이라는 생각을 한 뒤에 전혀 제목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뭐 나름 여러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보기에 그다지 중요한 부분은 아닌 것 같지만서도.

혜화,동
감독 민용근 (2010 / 한국)
출연 유다인,유연석
상세보기

'혜화, 동'을 보면서 계속해서 생각이 났던 영화는 얼마 전에 감상했던 '언노운 우먼'이었다.
두 영화는 공유하고 있는 점이 상당히 많다.
'언노운 우먼'과 '혜화, 동' 두 영화 모두 모든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특성, 즉 모성애라는 감정을 그 어머니가 자신의 진짜 아이를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묘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 적당한 서스펜스를 주면서 관객들을 몰입시키는 것 역시 비슷하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열렬하게 좇던 대상이 사실은 껍데기만 존재하는 허상이었다는 엔딩 역시 비슷하다.
두 영화의 트레일러도 굉장히 비슷하다.
'언노운 우먼'의 트레일러'혜화, 동'의 트레일러를 비교해보자.[각주:1]
정말 비슷하다고 느끼는 건 나 뿐인가?

그래서 인터넷을 찾아봤지만 '혜화, 동'과 '언노운 우먼' 사이의 연관성을 찾기는 힘들었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혜화, 동'이 '언노운 우먼'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
개인적인 의견으로 후자가 진실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혜화, 동'이 그저 주세페 토르나토레와 엔니오 모리꼬네의 뒤를 좇는 하나의 아류 영화에 불과하다고 판단하면 큰 오산이다.
두 영화가 비슷한 플롯과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혜화, 동'은 거기에 한국 고유의 정서를 잘 녹여 나름의 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언노운 우먼'을 보면서 나를 계속 갸우뚱하게 만들던 어머니의 모성애라는 것은 '혜화, 동'에서 또 다시 나를 괴롭혔다.
나는 여자가 아니다.
내 유전자를 절반 물려받은 아이가 있어본 적도 없다.
그리고 원래 아이들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도 아니다.
심지어 나는 개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 남자가 보여주는 아이에 대한 메멘토적인 집착도 그렇고, 혜화가 느끼는 자신의 처지와 자기 아이의 처지와 꼬리가 노란 흰둥이를 한데로 묶는 그 정서에 공감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억지스러움을 조금 지나쳐 내 신경을 툭툭 건드렸던 꼬마 여자아이의 말은 애써 쌓아놓은 긴장감을 와르르 망쳐버린다.
그것이 감독이 의도했던 바라면 할 말이 없지만.

하지만 내 신경이 그렇게 방해받았던 것은 단순히 1차적인 영화 연출의 졸렬함이나 스토리의 식상함, 배우들의 발연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1차적인 요소가 잘 구성되어 만들어낸 특유의 2차적인 분위기에 나의 정서가 잘 맞아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영화 '밀양'을 보면서 느끼는 답답함과 거북함은 영화가 후졌기 때문이아니라 영화가 훌륭하기 때문인 것과 같은 이치.
실제로 이 영화의 연출은 매우 훌륭하다.
플롯 또한 내가 '언노운 우먼'을 최근에 보지만 않았더라도 대한민국에서 잘 다루지 않는 소재를 독특한 상황에 접목시킨 훌륭한 결과물임이 틀림없다.
배우의 연기는 '혜화, 동'의 화룡점정.

어쩜 그렇게 답답한 인간 군상만 모아놓았는지 신기할 정도로 무난한 캐릭터라고는 거의 없는 이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굉장히 뛰어나다.
게다가 영화가 끝나기 직전에 등장하는 논쟁 장면을 제외하면 감정 표현이 극도로 자제되어 있는 상황에서 단순히 눈빛과 표정을 통해 대부분의 감정을 전달하는데 성공한 여주인공역의 유다인에게 박수를!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네이버 네티즌 평에 올라온 '유다인.. 애 엄마냐? 왜 이렇게 연기 잘해.'라는 역설적인 10점짜리의 칭찬에 모두 공감하리라.
영화 마지막 논쟁 장면에서 나오는 혜화의 대사 '인정하기 싫다고, 다시 되돌릴 수 있는 거 아니잖아.'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흉터에 대한 일갈이자 남자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의 마음을 다잡는 역할을 하는 자기 연민이 묻어나오는 부분이다.
어머니이면서 어머니가 되지 못한 여자의 그 주체할 수 없는, 끓어 오르는 감정이 잘 표현된 대목이 아닐까.

어떻게 보면 예쁘고 어떻게 보면 안 예쁜데 그래도 자연스럽고 부담스럽지 않게 생긴 얼굴이다. http://sweetbong.egloos.com/2719184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여러분 우리 모두 콘돔을 씁시다'와 같이 단순한 사회 고발적인 내용이 아니다.
'혜화, 동'의 삼촌 격인 '언노운 우먼'이 '암묵적인 범죄 조직을 모두 소탕합시다' 같은 구호를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히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이 미혼모나 입양과 같은 문제를 사회적 문제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을 절대로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보다 특별한 상황에 있는 하나 하나의 개인이 느끼는 감정에 관객들이 공감해주길 바랐을 것이라는 게 나의 의견.

칭찬 일색의 리뷰로 끝을 내고 싶지만 아쉬운 점이 있다는 것은 감출 수가 없다.
이 영화를 보게 된 어제 밤이 찬 입김이 호호 나오고 두터운 목도리를 하고 다니는 겨울이 아니라서 그랬을까.
  1. 오잉, 근데 예고편이 두 개인가? 다음 예고편은 그다지 비슷하다는 느낌이 안 든다. http://www.youtube.com/watch?v=krvv8DsTEW4 [본문으로]

'AR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뜨거운 몰입  (0) 2011.08.06
네이버 음악 이 주의 발견 - 국내 앨범 8월 첫째 주 40자평  (0) 2011.07.31
Pantera - Floods  (0) 2011.07.31
Kill Bill : Vol. 2  (0) 2011.07.31
바람직한 음악 감상법 2  (0) 2011.07.31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0) 2011.07.29
Kill Bill : Vol. 1  (0) 2011.07.28
양철북 2  (0) 2011.07.25
Shakira - Rabiosa  (2) 2011.07.24
바람직한 음악 감상법 1  (0) 2011.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