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 2012. 3. 25. 09:41

이것 저것 알아보지 않고 산 책은 아쉬움을 남긴다는 교훈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 책.
책이 나빴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못내 아쉬움이 남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차베스미국과맞짱뜨다
카테고리 정치/사회 > 정치/외교
지은이 베네수엘라 혁명 연구모임 (시대의창,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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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고 차베스라는 인물에 대한 글을 읽고, 신이 나서 책을 주문하는 바람에 따질 겨를이 없던 이 책 최고의 단점은 책이 전하는 정보가 상당히 일편향적이라는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혁명전 변화와 우고 차베스 대통령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 외에는 공통점이 없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었다는 이 책의 필진들은, 솔직히 다 비슷한 뿌리를 가지고 모인 사람들이다.
물론 위의 인용된 문장이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좀 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했다면 베네수엘라와 차베스에 단순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문구를 썼어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다른 책을 택했을 걸 그랬다.
이들의 다년에 걸친 연구 성과는 훌륭한 것이지만, 그 정보를 중립적이지 않은 어조로 전하는 것은 아무래도 내 취향과는 맞지 않았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제헌의회 전술의 진정한 위력이라 할 수 있다. 1999년에 차베스가 대통령이 됐을 때는 이미 한 해 전인 1998년에 국회의원 선거를 치른 상황이었고, 보수 세력이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만약 제헌의회를 통해서 의회와 사법부 등의 국가기구를 접수하지 않았다면, 1998년에 세워진 보수적인 의회가 사사건건 대통령의 발목을 잡았을 것이고 결국 혁명은 제대로 추진될 수 없었을 것이다.
중립적인 정보를 제공하여 독자들이 스스로 알력 구도를 파악하게 하기보다, 이미 정해진 프레임 안에서 뚜렷하게 나뉜 선악 구도를 전제로 서술을 시도하니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책을 만든 사람들이 다들 훌륭하고 똑똑한 사람들일 텐데 어째서 이 점을 간과했을까.
왜 반대편의 입장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일까.

객관적인 상황 판단은 양측의 입장을 모두 들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렇게 한 방향의 정보가 담긴 책을 읽을 땐 비판적인 수용이 불가피하다.
사전 지식이 부족한 나의 경우는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려야 할지 잘 감이 오지 않았지만 나의 현재 가치관의 잣대에서 최대한의 유도리를 가지고 책을 읽었다.

전반적으로 훑어 보건대, 우고 차베스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혁명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굉장히 역동적이었던 베네수엘라 현대사가 낳은 이 풍운아는 자기 자신을 이 혼란스러운 정치 소용돌이에 내던지고, 직접 부침 가득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차베스는, 통치하는 사람은 달라지지만 결국 같은 방식의 집권만이 이어지던 베네수엘라의 부패한 역사를 종식시키고자 직접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쿠데타에 실패한 뒤 감옥에 갇히지만 운 좋게 기회를 잡은 정권 교체에 힘입어 다시 석방된 뒤 가열찬 선거 운동을 통해 무려 쿠데타에 실패한 사람으로서 베네수엘라의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는 나라의 헌법을 바꾸는 제헌 의회를 소집하고 빠른 시일 내에, 이 책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이라 불릴 만한"이라고 말하는 볼리바리안 헌법을 제정, 개혁을 시작한다.
지지부진한 의회의 반대에 부딪친 차베스는 수권법을 발동해 49개의 개혁 법안을 통과시켜 개혁의 박차를 가한다.
반대파는 쿠데타와 파업, 소환 투표로 이어지는 3단 반대에 나서지만 차베스는 이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대통령 자리를 꿋꿋이 지켰으며 의회에도 친 차베스 의석을 다수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베네수엘라는 민중을 위한 정치를 펼치면서 서민들의 삶의 질 증진을 위한 정책을 다수 실현했고 서민 경제는 조금씩 기지개를 펼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해피 엔딩이 이어진다.
거기에 다른 중남미 국가들에서도 차베스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집권이 이어지며 이 혁명의 불꽃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갈 것 같다는 예상과 함께 책은 끝이 난다.

정열적이고 추진력이 넘치는 리더십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사건들을 좀 더 디테일하게 살펴보자.
차베스는 2001년 11월에 49개의 중요한 개혁법안을 통과시킨다. 이 49개의 개혁법안은 차베스가 수권법(의회의 승인 아래 1년간 대통령에게 법안을 승인하는 권한을 주는 법)을 발동해서 갑작스럽게 공포했다. 수권법을 발동한 이유는 개혁법안을 놓고 의회에서의 대립이 심해져 법안 통과가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음, 결국 특별 권한을 발휘하여 자기 입맛에 맞는 법안을 "갑작스럽게" 통과시켰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유권자 등록운동을 벌여 수십만 명의 새로운 유권자를 만들었고, 장기간 거주한 이민자들에게 시민권을 주었다. 이민자들 대부분이 차베스를 지지했기 때문에 차베스에게 매우 유리했다.
이건 <정글>에서 낯이 익은 부분이 아닌가.
원래는 투표권이 없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시민권을 부여, 투표권을 동시에 준 뒤에 특정 정당을 찍게끔 로비하는 것.
물론 책의 서술에 따르자면 "이민자들 대부분이 차베스를 지지"하고 있던 상황인지라 로비 같은 것은 없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꺼름칙한 느낌을 감출 수는 없다.

물론 차베스의 이와 같은 행보는 모두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하지만 과연 대중의 반응만으로 정책에 대한 정당성이 부여될 수 있는 것인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문제다.
각종 복지 정책의 돈이 대부분 베네수엘라의 풍부한 석유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베네수엘라 혁명의 핵심일 수밖에 없는 석유에 대한 이야기는 책의 뒤편에서 하나의 독립된 파트로 다루어진다.
나는 석유 장사를 기가 막히게 잘 해내는 차베스의 장사꾼적인 기질을 보면서, 결국 전략적인 장사가 많은 이익을 불러왔고, OPEC의 결집은 비산유국 측면에서는 담합의 일종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책은 이에 대해 우리나라의 비싼 유류세를 원인으로 들기는 하지만, 찝찝한 마음은 어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끊임없이 어떤 정해진, 또는 외도된 결론으로 독자를 유도하려는 노력이 보였고, 따라서 이 책이 진정하고 순수한 의미에서의 연구는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순수하지 못하다고.

하지만 다시금 강조하는 것은 그렇다고 내가 차베스라는 인물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이 혁명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에 많은 호감을 느꼈고, 그가 실시한 몇몇 정책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특히 식량 주권과 환경 보호, 자생적 성장과 아래서부터의 복지를 정책의 우선으로 삼는 모습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보수와 기득권의 입장에서 포퓰리즘 정치라고 아무리 비난한다 해도 일단은 민중을 위한 정치 실험이 오일 머니 기반으로나마 성공적일 수 있다는 것은 사회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나에게 고무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어떤 식의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책이 전하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차베스가 내세운 정책들은 상당히 이상적인 정책들임에도 불구하고[각주:1] 꾸준히 그 실효성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또한 대외적으로 미국의 패권주의 정책에 맞서 남미를 하나의 단일한 경제, 정치 공동체로 뭉치게 하려는 그의 노력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친북 정책[각주:2]에 대해서는 반미 세력을 키우려다가 결국 더 큰 반반미 세력을 만들거나 세계 정세를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몰고 가고 말리라는 강한 확신이 들지만 비판할 점은 비판하고, 배울 만한 점은 배우는 분리적인 태도가 필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1. 나는 이 부분에서, 하긴 모든 정치 구조가 그것이 원래 의도했던 것대로만 흘러간다면 다들 손색이 없는 이념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어떤 체제 아래서든 자꾸 편법을 쓰고 꼼수를 부리는 무리들이 생기고, 거기서부터 이념의 이상이 깨진다는 것이 아닐까. [본문으로]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최근에 대사관 설립에 합의했고, 조만간에 에너지 관련 협력을 강화할 것으로 관측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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