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부 3 : 바람의 도시에서

| 2012. 5. 19. 18:54

아쉽게도 두 번째이자 마지막 기내식은 무려 조식이었기 때문에 맥주 따위는 먹을 수 없었다.

비행기가 시카고에 내리기 무섭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오징어덮밥!이 아니고 캐비닛에서 짐을 꺼내 저돌적으로 나갈 길을 뚫었다.
인터넷에서 워낙에 많이 봤던 것이, 시카고 오헤어 공항의 환승이 상당히 끔찍하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굴지의 항공사인 아메리칸 에어라인이 국내선의 거점으로 삼고 있는 공항인 만큼 여러 비행기가 겹쳐 환승객이 몰리면 고작 환승하는 데에만 넉넉잡아 2~3시간은 족히 걸린다니 바짝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이 들었던 ㅡ 물론 일방향적인 것이겠지 ㅡ 스튜어디스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바로 입국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나는 트래픽 잼에서 빨리 탈출한 편이었다.
짧은 대화 끝에 상당히 위압적으로 보였던 흑인 아저씨에게 “웰컴 투 시카고” 소리를 듣고 정식으로 미국에 들어갔다.
내 짧은 25년 인생에서 처음으로 맛보는 미국의 공기라니!
흔해 빠진 LA나 뉴욕이 아닌 시카고를 통해 처음 미국을 방문하는 한국인이 몇 명이나 될 것인가!
시카고 불스로 NBA에 입문하는 한국인은 많았겠지만, 시카고로 미국에 "입문"하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봤자 몇 명이나 있을 것인가!

나는 왠지 모를 감격에 빠져 잠시 짐을 내려두고 바람의 도시 ㅡ 비록 공항의 넓디 넓은 창 때문에 직접 그 바람을 느끼지는 못하겠지만 ㅡ 에서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긴 개뿔, 머리 속은 어떻게 빨리 짐을 찾아 어떻게 빨리 환승을 하는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미 한 번 그 길을 빠르게 통과한 사람으로서 여기에 간단한 팁 따위를 적으려고 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재미도 없고 어차피 미국을 몇 번 가본 사람들이라면 잘 알 테고 미국을 처음 가보는 사람들에겐 경험 삼아 아무 것도 모른 채 스스로 즐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생략한다.
약 18개월 간의 용산 생활 동안 배운 깍듯한 영어를 구사하여 이리 묻고 저리 물은 끝에 정말 빠르게 환승에 성공했다.
내 가방을 못 알아보고 두 바퀴나 컨베이어 벨트가 더 돌 때까지 기다렸던 것과, 전신 검색에 랜덤으로 뽑혔던 것을 제외하면 비행기에서 띡 나온 지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아무런 문제도 없이 지나갈 수는 없는 법.
일단 시카고에 도착하면 한국에 연락을 하기 위해 손목 시계의 시각을 바꾸지 않은 것이 화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내가 보딩을 할 때까지 몇 분이나 여유가 있나 시계를 봤는데, 시계대로라면 이미 나의 환승 비행기는 떠난 것이 아닌가.
물론 최소한 내가 1시간에서 2시간의 여유가 있는 줄은 알고 있었으나 나의 환승 게이트에 허겁지겁 ㅡ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좀 서둘렀다.
이럴 때는 담이 한없이 줄어드는 이한결(25세) ㅡ 도착했을 때 막 보딩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를 보고는 가슴이 철렁했다.

철~렁.

아니, 어떻게 공항에 도착했는데 거기에 달린 시계를 하나 못 보고 지나칠 수 있냐!고 나한테 혼쭐을 내려는 사람이 있다는 거 나도 물론 안다.
근데 이건 정말 놀라운 고급 정보인데, 시카고 공항에서 공공적으로 내달린 시계를 찾는 일은 TV판 '월리를 찾아라'에서 1분만에 월리를 찾는 것보다도 훨씬 어려운 일이다!
농담이 아니다.
대체가 이 놈의 공항에는 시계가 없다.
나중에 나에게 충분한 여유가 있음을 알고 공항이나 좀 둘러볼 생각으로 이곳 저곳 기웃기웃 거리다가 각 비행기의 도착과 출발을 알려주는 작은 모니터 하단 부에 정말 작은 글씨로, 눈에 잘 띄지도 않게 검은 배경에 빨간 글씨로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 전부다.

그럼 왜 진작에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묻지 않았냐고?
그래서 게이트에 도착하자마자 직원 아주머니 ㅡ 역시나 매우 위압적으로 보이는 흑인 아주머니 ㅡ 에게 내가 이 비행기를 타는 것이 맞냐고 물었다.
아주머니는 무관심하게 내 티켓을 보더니 여기서 타는 것은 맞지만 앞으로 2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고 이야기 해줬다.
그러면 그렇지하고 고맙다는 말을 건넨 뒤에서야 마음의 평정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화장실에 갔고, 위에서 언급한 대로 공항을 둘러보다가 시계도 발견하고 슬렁슬렁 걸어다녔다.
아시아나의 조식을 맛있게 먹기는 했지만 시차 탓인지 바로 배가 고파졌기 때문에 맥도날드에서 빅맥 세트를 하나 사먹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세트라고 부르는 것을 유럽에서는 메뉴라고 부르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서 짐짓 당당하게 빅맥 메뉴 달라고 했더니 밀(meal) 달라는 뜻이냐고 물어봐서 뻘쭘하게 “ㅇㅇ”했다.

개찐따답게 이렇게 의미 없는 음식 사진이나 찍고 앉았다.

정말 아쉽게도,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선 돈을 내지 않으면 와이파이를 이용할 수가 없었다.
비행기에서 썼던 두 번째 여행기와 틈틈이 찍은 나의 뉴비 냄새 풀풀 나는 사진들 업로드는 필라델피아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바쁘게 업로드 하고 나면 바로 비행기를 타야 할 것 같았던 일정이 취소되는 바람에 게이트 앞에 앉아 이 짧은 글을 쓰고 있다.

비행기는 1시간 내로 시카고를 출발할 것이다.
충분히 매력적인 도시인 것이 공항의 인상으로부터 팍팍 느껴지지만 일단은 짜여진 일정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필라델피아에서는 부디 인터넷을 쓸 수 있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