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사랑 노래

| 2011. 6. 25. 00:15

마지막으로 '처음부터 버려질 운명의 가사'를 쓴 것은 5월 초순 또는 4월 말의 일이다.
어떤 주제를 잡았다거나 허세기가 들어간 구절이 생각나서였다기보다 그냥 그 날은 가사를 써야겠다는 맹목적인 생각이 들어서였다.
방에서 기타를 끄적거리는데 무언가 방해가 되어 휴게실로 갔다.
분명히 이미 수도 없이 많이 본 영화 또는 만화를 또 보거나, PS3로 박진감 넘치는 게임(이를테면 콜 오브 듀티 : 블랙 옵스나 철권 6)을 하거나, 인터넷으로 시덥잖은 비일상적 셀프카메라 동영상을 찾아보는 것 셋 중 하나를 하고 있던 룸메이트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사를 쓰는데 멜로디가 빠지면 섭섭할 것 같아 기타도 챙겨갔다.
처음 써내려가던 가사의 내용은 찌질하고 두서없는 남자가 자신의 애인 비슷한 존재에게 '가끔은 술 먹고 실수할 때도 있는데 그것 하나 이해 못 해주냐!'는, 작사가의 당시 입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각주:1] 것이었다.

하지만 숙취는 갈 수록 심해진다.


한 석 줄 쓰고는 바로 그만 두었다.
가사를 좀 써본 사람들은 대충 알겠지만 저런 식의 주제는 처음부터 '안 될' 부류의 것이다.

그렇게 싱겁게 끝나버릴 수 있었던 나의 가사 쓰기는 지나가던 지인의 말 한 마디로 인해 생명 연장에 성공하게 된다.
'좋은 가사 거리가 없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창 밖의 비를 잠시 보더니 '비 오는 굿바이'라는 단어를 수줍게 던져주었다.
'비 오는 굿바이'라.곱 씹을 수록 독특한 맛이 나는 구절이었다.
수식의 주객 관계가 맞지 않지만 그 수식 관계에서 바로 떠오르는 느낌이 있는 것이 시적 허용의 분위기를 풍겼다.
'굿바이'라는 외래어가 주는 이국적인 느낌은 제목에 세련됨을 부여하고 다시 '비'의 이미지와 결합해 남국의 몽환을 느끼는 듯 했다.
나는 '이거다!'하는 생각과 함께 가사 쓰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이 글의 도입부에 '처음부터 버려질 운명의'라는 수식어구는 '비 오는 굿바이'에도 걸치는 것이었다.
후렴구로 쓰일 구절로 '비 오는 굿바이'밖에 생각해낼 수 없었던 나의 저주받은 두뇌에 개탄하며 나는 그 날의 모든 창작 활동을 정리, 내가 방을 나설 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의 룸메이트 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당시의 활동이 전혀 의미 없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오늘에서야 증명되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듣다가 문득 그 날 지은 구절이 하나 떠올랐고, 그 기억을 모티브로 삼아 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비 오는 굿바이'에는 바로 이런 구절이 있었다.
'왜 사랑 노래에 비 이야기가 많은지 알겠어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사실만을 집어낸, 당시에는 깊은 생각 없이 툭 튀어나온 구절이었다.
그렇게 적은 문장이 빗소리를 듣고 있던 내게 의문문으로 다가왔다.
왜 사랑 노래에 비 이야기가 많을까?
대체 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비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가 필수적이다.
비라는 것은 기상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특이 현상 중의 하나로 분류된다.
런던이나 멜버른처럼 짓궃은 날씨가 주가 되는 지역을 제외하면, 비는 맑은 날이 갖는 평범함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특수한 성질을 지닌다.
바로 이 특수함이 비를 기억의 인덱스로서 작용하게끔 한다.
비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덱스로 작용할 수 있는 데엔 이런 단순한 특수성 외에도 다양한 이유가 있다.
즉 '오늘은 맑은 날이 아니고 비가 오는 날이다' 같은 기초적인 특수성을 뛰어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 중 두 번째로 우선시할 수 있는 것은 비에는 여러가지 감각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비가 올 때 창이나 난간으로부터 빗소리를 듣고(청각),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특유의 냄새를 맡고(후각), 피부로는 축축함과 눅눅함을 느낀다(촉각).
이렇게 한 대상에 감각적인 요소가 많이 관여할 수록 우리의 기억은 더 또렷해지기 마련이며 그만큼 인덱스로 더 잘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비가 인덱스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한다는 것은, 비가 오던 날의 어떤 특정한 기억은 또 다른 비가 오는 날에 자연스레 연상이 된다는 뜻이다.
당연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문장의 대상을 바꿔 '맑은 날에는 맑은 날의 기억이 많이 난다', 또는 '흐린 날엔 유난히 흐린 날의 기억이 난다'라고 되뇌어보면 비 오는 날이 다른 대상들에 비해 얼마나 더 강한 연상력을 갖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는 그 주체로 하여금 과거의 상념에 빠지게 하는 기제이다.
하지만 비를 기억과 연관지었다는 결론으로 제목이 '비와 사랑 노래'인 글을 끝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의 모든 기억이 오직 사랑과 노래에 관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비에 사랑과 관련된 음악성을 부여하는 또 다른 특성엔 어떤 것이 있을까?

기억에 기여한다는 성질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는 비의 두 번째 성질은 비가 우리의 육체적인 활동을 제한함으로써 내면을 돌아볼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내가 일반인보다 몸을 움직이는 것을 덜 선호하는 편이긴 하지만 내 생각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비가 올 때 육체적인 활동을 꺼리는 편이다.
몸을 움직이지 않을 때 자연히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집중하게 된다.
물리적인 부동에서 우리는 차분함, 고요함 따위를 느끼고, 그로부터 잡다한 생각이 유발되며, 그 생각들은 대개 우리를 감상적으로 만든다.

조금 벗어나는 이야기지만 이와 같이 비가 갖는 정적인 분위기는 눈의 그것과의 차이를 만든다.
눈이라는 기상 현상 역시 비와 같은 강우의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기억의 인덱스가 될만한 조건을 두루 갖춘 존재이다.
우리가 눈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비에 대해 느끼는 관점이 다른 가장 큰 이유는 눈 같은 경우 우리의 육체적인 활동을 비만큼 크게 제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볍고 말도 안 되는 예로 눈싸움은 있지만 비싸움은 없지 않은가!

이런 건 물론 비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사진 같은 상황은 '비가 올 때의 싸움'이지 '비로 하는 싸움'이 아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우리는 눈이라는 소재로 '화이트 크리스마스' 같은 음악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징글벨' 같은 노래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돌아가자.
비가 현 주제와 관련되어 갖는 마지막 성질은 비라는 현상 자체에 내포되어 있다.
이는 대한민국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좀 더 구체화하자면 대입 수능 준비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거릴만한 내용이다.
비라는 소재가 다양한 시에서 갖는 다양한 심상이 바로 그것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은 우리들의 머리에 무의식적으로 하강의 이미지를 심어 준다.
중력 방향으로 자유 낙하하는 물체는 구속감과 불안함 같은 인상을 지니고, 낙하하는 순간 자체에 초점을 맞추면 그 광경에서 어떤 아련함이나 몽롱함, 아찔함도 느낄 수 있다.
하늘에서 물이 떨어진다는 데에서는 일종의 거룩함과 신비함도 엿보인다.
또한 모든 것은 순리에 맞아들어간다는 숙명을 느끼게 하기도 하고, 대지를 씻어내리는 정화의 이미지도 지닌다.
이것이 비가 유도하는 1차적인 심상을 간략하게 적은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들을 포함해, 이 1차적 심상이 불러오는 2차적 심상은 개인과 상황에 따라 수백가지에 이를 것이다.
물론 여기서 비라는 대상을 떠올릴 때 위에서 언급한 느낌 대신 비가 오면 느려지는 카이스트의 인터넷이나 교통 체증, 창문 난간 청소를 언제 마지막으로 했는지, 지난 번의 치수 공사는 성공적이었는지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은 논외로 한다.

홍수가 나서 떠내려가는 중일지라도 V를 그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살겠다.


자, 그럼 이제 모든 재료는 준비되었다.첫째로 서술한 비의 특징은 기억에 도움울 준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비를 감상하는 자가 감상적이 되게끔 유도한다는 것이었고, 마지막은 비가 갖는 기초적 심상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그 종류가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이 재료들을 잘 배합해 비와 사랑 노래 간의 깊은 연관성을 도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감상적인 기억은, 물론 항상 그렇다는 억지를 부리는 것은 아니고, 지나간 사랑이나 현재진행형인 사랑, 또는 앞으로 찾아올 것 같은 사랑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바로 그런 생각이 당사자가 당시 비를 보고 느낀 지배적인 심상이 무엇이었느냐에 따라 다양한 분위기를 내는 사랑 음악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비는 마룬 5의 'Sunday Morning'처럼 다소 장난스러운 분위기의 재즈 곡이 될 수도,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 같은 애잔한 발라드 곡이 될 수도 있다.
비는 김종서의 '겨울비'로,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으로, 에픽하이의 '우산'으로, 브라운 아이즈의 '비 오는 압구정'으로, 그리고 이한결의 '비 오는 굿바이'로도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각주:2]

사랑 노래에 비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각주:3]
비 오는 날 떠나간 옛 애인이 떠오르는 것, 그로부터 영감을 받아 구구절절한 발라드를 떠올리는 것은 노래를 만드는 사람들의 의도적인 분위기 잡기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심지어 현재 애인의 유무와도 무관하다고 취급하는 것이 더 옳은, 창작 활동이다.
지나간 연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가사를 쓰고 멜로디를 입히는 일련의 과정.
세월이 지남에 따라 풍화되어 사라질 기억을 박제로 굳혀버리는 공정.
쿨한 남성의 관점에서 보면 찌질하기 그지없는 행위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찌질함이 없었더라면, 누가 아랴.
우리가 듣고 있는 수많은 아름다운 사랑 노래가 어디서 시작되었을는지.
어쩌면 그 쿨함을 지키고자 하는 고집 속에 묻혀 그 아름다움을 뽐내지 못할 뻔 했던 것은 아닐는지.

여전히 창 밖에는 비가 내린다.
  1. 그래, 저런 내용의 가사를 쓸 때면 분명히 5월 셋째 주 주중의 어느 날임이 틀림없다. [본문으로]
  2. 심지어 한 아티스트의 예명이 될 수도 있다. 태양을 피하고 싶어하는 그 사람처럼 말이다. [본문으로]
  3. 이별 노래까지 포함한다면 '사랑을 소재로 하는 노래'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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