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직한 음악 감상법 3

| 2011. 8. 9. 12:01

요새는 별로 그런 경향이 없는 것 같은데,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커피는 아이들에게 금단의 음료였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어른들은 아이들이 커피를 먹으면 머리가 나빠진다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했다.
신기한 것은 어느 모임에 가더라도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아마 그들의 윗대에서도 같은 방식의 주입식 교육이 있었다는 뜻이겠지.
커피를 먹으면 머리가 나빠진다는 이야기를 하도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어릴 때 커피를 조금 먹게 되면 실제로 두통을 느꼈던 것 같다.
부정적 플라시보 효과의 대표적인 예.
그런 이유에서든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든 나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커피를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다.
그 덕분에 지금 그다지 멍청하지 않은 24세가 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커피를 내가 직접 돈을 주고 사먹은 것은, 그 정확한 날은 기억할 수 없지만, 고등학생 때임이 분명하다.
커피 전문점 메뉴판에 적힌, 화장품 이름[각주:1]만큼이나 생소했던 유사 이탈리아어들을 보면서 '세상에는 참 다양한 커피가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커피를 처음으로 사먹은 언젠가 그 날 이후로 여러 번의 시행 착오를 겪으면서 어디를 가든 대충 입맛을 방해하지 않는 커피를 주문하는 법을 익혔다.
절대로 메뉴 첫 머리에 있는 친구들은 피한다는 것은 불문율이요, 중간쯤에 자리 잡은 친구들 중에 왠지 달콤한 인상을 주는 단어에 '라떼'가 붙은 것을 고르면 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우선시되어야 할 원칙.
나는 도무지 아메리카노를 먹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게 아메리카노를 위시한 기타 달지 않은 커피는 돈을 내고 고통을 즐기는, 지극히 마조히즘적인 욕구의 해결책으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유당무죄 무당유죄(有糖無罪 無糖有罪).
나는 커피라면 자고로 달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쓴 커피를 먹는 사람은 고상한 척 허세를 부리는 사람으로, 그 쓴 커피 자체는 변태적이고 불편한 대상으로 취급했다.

기분이 무척 좋아졌습니다.


나의 이런 커피에 대한 태도는 생각보다 최근까지 계속되어왔다.
2010년이 되어서야 겨우 달착지근한 커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런 변화가 있게 된 데에는 커피에 나름 상당한 내공이 있던 지인의 덕이 크다.
그 사람은 쓴 커피가 맛이 없다고 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마치 내가 쓴 커피를 좋아라하며 먹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듯이 말이다.
심지어 커피의 맛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인생의 큰 행복 하나를 즐기지 못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나의 입맛이 어린 아이 같다는 이야기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삶에서 손쉽게 즐길만한 거리를 눈 앞에서 놓치는 것이나 입맛에 있어 어리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왠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억지로 쓴 커피를 먹기 시작했다.
아메리카노는 도저히 입맛에 맞지가 않아 시럽을 넣지 않은 라떼부터 입맛에 맞추어 나갔다.
쓰기는 쓰지만 단지 쓰기만 하다고는 못할 커피의 맛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언젠가 라떼에서 나는 우유 맛이 조금 느끼하다고 느껴 아메리카노를 먹기 시작했다.
전에는 그렇게도 못 먹겠던 각종 쓴 커피들에서 새로운 맛을 느꼈다.
미각이라면 그렇게도 둔한 내가 말이다.
이제 나는 대부분의 커피를 즐겨 먹고 있다.
과거의 편협한 취향을 조금씩 조금씩 넓힌 결과다.
에스프레소와 그의 친구들은 여전히 넘사벽이지만.

코끼리는 실제로 존재하는 삼차원의 벽이다. 넘삼벽.


생뚱 맞은 나의 커피사(史)는 여기까지다.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식으로 끝나는 진부한 일상사가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커피'와 '음악'이라는 두 단어만 놓고 보면 '김치찌개와 스티비 원더'만큼이나 관련성이 없어보이지만 '바람직한 음악 감상법'과 '내가 커피를 먹게 된 과정'으로 논의 범위를 한정시키면 어느 정도 답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을 커피에 비유해보자.
커피의 종류가 수도 없이 많은 것처럼 음악의 장르도 굵직굵직하게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부터 딱히 무어라 이름 지을 수 없는 것까지 다양하게 존재한다.
앞선 두 글에서 언급된 MR 음악은 달콤한 커피와 대응되는 존재다.
심하게 달지 않은 이상 기본적으로 모두가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대중들의 취향에 잘 맞아들어가게 하기 위해 그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요소가 인위적으로 가미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도 있다.
보다 덜 무난하다는 점에서 쓴 커피는 밴드 음악과 비교될 수 있다.[각주:2]

달콤한 커피만을 먹으면서 모든 커피의 맛이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좌정관천의 자세다.
사실 진정한 커피의 맛은 별 다른 첨가제 없이 먹을 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MR 음악만을 들으면서 몇 번 들어보려고 시도했던 밴드 음악이 불편하다고 느껴 다시는 그런 음악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바닐라 라떼야말로 진정한 커피의 맛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것과 다른 것이 없다.
줄곧 시럽으로 중무장된 '그런' 녀석들만 들이키고 있는 셈이다.
진짜 커피는 거들떠보지도, 먹어보려고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이런 음악적 편식의 문제는 내가 달지 않은 커피에 익숙해졌던 과정과 유사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
계기는 아무래도 좋다.
다소 입맛에 맛지 않더라도 기존의 취향에서 벗어난 음악을 들어보는 그 시작이 중요하다.
처음부터 에스프레소를 단숨에 들이키라는 것이 아니다.
조금씩 조금씩 차근차근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나가야 한다.
처음부터 레드 제플린이나 크림의 음악을 듣는다면 필시 체(滯)를 하기 마련이다.
이미 어느 정도 우리의 귀에 친숙한 제이슨 므라즈나 마룬 5 같은 뮤지션이라면 좋은 시작을 끊어줄 수 있겠다.
그러다가 특정한 곡이나 장르가 맘에 들었다면 호이겐스의 원리에 따라 파동이 발생하듯, 땅따먹기를 할 때 한 뼘 한 뼘 땅을 늘려나가듯 그 점을 중심으로 영역을 넓혀보자.
비슷한 음악적 취향을 가진 뮤지션이나 곡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손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블루스적인 감성에 공감했다면 존 메이어로, 통통 튀는 베이스 라인에 그루브를 느꼈다면 RHCP로, 힘 있는 보컬의 매력에 빠졌다면 퀸으로, 화려한 전자음의 리듬에 어깨가 들썩였다면 자미로콰이로 새로운 가지를 치면 된다.

이렇게 마인드 맵 식으로 음악적 가지를 뻗는 데엔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정한 분위기를 좇을 수도 있다.
우울한 감성이라면 뮤즈나 포티쉐드, 스타세일러 등의 음악이 제격이다.
따뜻한 봄날의 햇살 같은 분위기라면 스완 다이브, 티아고 요르크, 페퍼톤스 등의 음악이 들을만 하겠다.
사나이의 음악이라면 YB나 익스트림이, 젊은이의 음악이라면 그린 데이나 프란츠 퍼디난드가 어울린다.
동시대의 음악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 중에 하나다.
음악적 영향 관계의 나무를 타고 위로 아래로 옮겨가는 것도 역시 추천하는 방법이다.

어느 정도 새로운 음악을 찾아 듣는 것에 익숙해질 수록 음악 세계가 넓어지는 속도도 덩달아 빨라진다.
예전 같으면 절대 듣지 못했을 것 같은 음악을 듣는 능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단순히 예전보다 불편한 것을 더 잘 참게 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음악적인 취향이 더 성숙해졌다는 증거다.

비유를 사용해서 설명하면 한도 끝도 없다.
달달한 칵테일 소주만 홀짝인다면, 호연지기를 품은 소주의 담대함이나 산토리니의 푸르름이 담긴 마티니의 청아함은 죽어도 느낄 수가 없다.
빈둥거리기 좋아하고 땀 흘리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그런 생활은 안락함 그 자체일 수 있으나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같은 정체모를 뿌듯함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착하고 순한 여자만 만나 본 남자는 스릴 넘치는 연애가 생산하는 러브러브 엔돌핀이 결핍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개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은 고기를 논할 자격이 없으며, '반항하지마'를 보지 않은 사람은 순수한 열정과 근성을 안다고 할 수 없으며, 우크라이나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여자친구를 예쁘다고 판단할 수준이 못 되는 것과 모두 같은 이치다.
경험은 성숙에의 필요 조건이다.

다시 가고 싶다 우크라이나.


경계해야 할 점은 위와 같은 논지에서 역(逆)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장르 상대주의의 공정성을 잃고 MR 음악을 저급하고 상업성으로 물든 퇴출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태도다.
원래 있던 우물에서 힘겹게 빠져나와 또 다른 우물로 기어들어가는 개구리가 되어선 안 된다.
자신의 취향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 타인의 취향을 배격하는 것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내가 얘기하고자 했던 바는 균형 잡힌 음악 섭취를 위해 현재의 불균형한 상태를 조금이나마 만회하자는 것이다.
추호도 다른 한 쪽을 일방적으로 치켜 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지난 글에서 지적한 문제점의 해결책은 뻔한 것이었다.
따라서 구체적인 방법론 같은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이번 글에서 의도했던 것은 그 당연한 방법을 제시하면서 약간의 동기와 당위성을 부여한 것이다.
다음에는 기타 덧붙이면 좋을만한 내용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그 다음 글로 '좋은 음악 감상법' 시리즈를 마무리 지으면 되겠다.
  1. 이제 커피는 조금 알게 되었지만 화장품 이름은 여전히 낯설다. [본문으로]
  2. 정확히 말하자면 비(非) MR 음악이라고 해야 하나, 여지껏 우리가 말하던 논의 대상으로 그 범위를 한정지어 보자. [본문으로]